행인(杏仁)

중국 한나라 때 동봉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독약을 먹고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시체까지 살린 의사로 소문 났지만 환자를 치료하고도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주면 받고 줄 형편이 못 되면 괜찮다고 위로하는 기인이었다. 다만 중환자에게는 살구나무 5그루를, 좀 약한 환자에게는 살구나무 1그루를 심으라고 권해는데 그렇게 하기를 수십년이 되자 어느덧 동네는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로 숲을 이루게 됐다. 엄청난 양의 살구가 열리자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곡식을 가져와 그 값어치만큼 살구를 따먹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모아진 곡식으로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그래서 인술을 베푸는 의사를 살구나무 행(杏)자를 써서 ‘행림(杏林)’이라고 부르게 됐다. 살구는 사과·배·복숭아만큼 친숙한 과일은 아니다. 예전에는 흔했지만 요즘은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살구씨는 좀 다르다. 씨앗들 중 약재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의보감’에도 “살구씨는 기침이 북받쳐서 호흡곤란을 일으킬 때, 숨이 가쁘고 가래가 끓을 때 사용한다. 그리고 진해거담제 역할을 한다”고 기록돼 있다. 행인(杏仁·살구)은 기침·인후통·편도선염에도 좋다. 살구씨에는 지방성분이 많이 함유돼 위를 편안하게 하며 대장운동을 촉진, 변비개선에도 효과적이다. 특히 진액이 말라 오는 노인성 변비와 산후 변비에 좋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훌륭한 식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서양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정의 주식이 살구였으며, 아폴로 13호에 싣고 가 우주탐사대의 건강식으로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비타민A와 C가 많고 무기물인 칼륨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 비행사들의 심장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최근에는 살구씨 가루나 기름을 이용한 피부 미용법이 인기를 끌고 생리통 생리불순 치료에도 쓰인다. 그렇다고 행인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약간의 독성이 있어 성인은 한 번에 10알 이상 먹지 말고, 어린이는 3알 이상은 먹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행인에 중독됐을 때 살구나무 껍질이나 뿌리를 달여 마시면 해독이 된다니 신묘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고란초

고란사(皐蘭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백제의 옛 궁터였던 부소산(扶蘇山) 북쪽 기슭 백마강변에 있는 사찰이다. 경치가 좋아 고도 부여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들러 보는 곳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說)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있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손실된 것을 고려 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중창하였다. 그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皐蘭草·멸종위기 제99호)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로 불리게 되었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城) 등이 있다. 고란사가 먼저인 지 고란초가 먼저인 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란초는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절벽 밑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은 고란정(皐蘭井)이다. 고란초는 고란사를 찾는 관광객들에 의하여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사람들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만 약간 남아 있는 걸로 알려졌다. 사람들은 대개 고란초가 고란사에서만 자란다고 알고 있으나 공중의 습기를 받을 수 있는 강가 절벽이나 바닷가 숲속에서도 자란다. 고란초는 갈라진 바위틈과 이끼가 붙은 곳에서 근경(根莖)이 옆으로 뻗어가면서 자란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궁녀들이 임금에게 바칠 물을 고란정에서 받아갈 때 고란초 잎을 한 두개씩 물위에 띄웠다고 한다. 그런데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망국한과 삼천궁녀들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고란초 군락지가 부여가 아닌 경기도 화성·안산 등 서해안 지역 일대에서 발견된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계곡의 그늘진 바위틈에서 자라는 상록다년초인 고란초 서식지는 우리나라에서 극히 제한된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데 시흥환경운동연합에 의해 제부도 북사면과 대부도 행섬의 동서면에서 고란초의 국내 중부 이북 최대 군락지가 처음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제부도의 경우 컨테이너와 어류장비를 쌓아 놓거나 서식처의 자연 파손 등으로 고란초가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이 겨울에 희귀한 고란초가 무탈한 지 걱정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시험부정

입신양명의 출세길이었던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도 부정이 많았다. 대표적인 부정 방법은 ‘차술차작(借述借作·대리시험)’, ‘수종협책(隨從挾冊·시험장에 책 반입)’, ‘입문유린(入門蹂躪·시험장에 드나들기)’, ‘정권분답(呈券分遝·답안지 바꿔치기)’, ‘외장서입(外場書入·시험장 밖에서 답안작성)’ 등이다. 시대만 달랐지 최근 대입수능부정과 방법이 흡사하다. 숙종 때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의 ‘전성기’였다. 숙종시대에는 시험부정사건인 ‘과옥(科獄)’이 세 차례나 일어났다. 기묘·임오·임진과옥이 그것이다. 기묘과옥은 5년 간의 조사기간을 거쳐 50명의 수험생들이 처벌받고 문과시험은 시험자체가 무효화된 대형사건이었다. 임오과옥은 9명의 합격자 가운데 채점자와 사촌 이내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 8명에 이르렀다는 사실때문에 각종 의혹이 제기됐었다. 임진과옥 역시 채점자가 알아볼 수 있는 암표가 쓰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크게 문제가 됐다. 과옥은 단순한 시험부정 사건이 아니었다. 때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론·소론간 다툼에 원인이 있었다. 임진과옥의 경우 문제가 된 채점자가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집권 때는 합격이 전부 취소됐다가 소론 집권 때는 다시 원상복귀되는 등 정치적 부침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부정부패로 인해 숙종 때에 지속적인 제도개선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노론·소론간 다툼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처벌은 엄정해지고 규율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과거제 관련 지침의 80%가 이때 새로 만들어지고 정비됐다. 이런 숙종 때의 노력이 영조·정조대의 법전 편찬과 정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토대 아래 영·정조대 안정과 번영이 가능했다. 부정을 덮어둔 게 아니라 밝혀내 처벌함으로써 제도개선·개혁이 가능했다는 사실(史實)이다. 오늘날 대학입학수능시험 부정 사건이나 각종 국가시험제도의 부작용이 흐지부지 처리돼서는 안되는 뜻이 여기에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物價高 ‘物價苦’

“집안 정치도 바쁜데 나라 정치에 관심이 가나요?” 이렇게 말하던 어느 주부가 있었다. 남편의 박봉으로 아이들 키우랴 공부시키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이런 가운데 먹고 살자니 ‘집안 정치’에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그 주부가 요즘엔 좀 달라졌다. 나라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대체가 저축은 고사하고 생활비 쪼개기가 점점 더 빠듯해져 왜 이러는가 싶어 신문도 보고 텔레비전 뉴스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주부의 말이 걸작이다. “나라 정치가 별 것인가요…, 집안 정치하고 같은 거죠!” 듣고보니 딴은 그렇다. 정치가 뭣인가, 다스리는 게 정치다. 다스리기로 하면 집안을 다스리는 거나 나라를 다스리는 거나 원리는 같다. 수학을 예로 들면 같은 수를 나누거나 곱하거나 등식의 제값은 같다. 집안 정치와 나라 정치는 다만 단위만 다를 뿐 다스리는 값은 같은 동일 공식의 원리인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장바구니 물가가 또 올랐다는 주부들의 비명이 드높다. 벌기는 어려운 만원짜리 한 장이 뭘 산 것도 없이 눈녹듯 없어진다는 것이다. 장보러 가기가 겁이 날 지경이라고 말한다. 담뱃값 25% 인상에 이어 경유값 전기사용료며 텔레비전 수신료 등 공공요금 인상이 들먹이는 가운데 햄 제품류·포장만두·라면·스낵 및 빙과류 기타 과자 등이 일제히 올랐다. 올라도 겁없이 오른다. 10~15%씩 마구 뛴다. 한 자릿 수 인상도 서민층 소비자들에겐 큰 부담인 판에 두 자릿 수 인상이 예사가 됐다. 나라를 다스리는 높은 분들은 그래도 느긋하기만 하다. 체감물가고에 새우 등 터지는 것은 힘없는 민초들 뿐이다. 가뜩이나 불황으로 살기가 어려운 마당에 물가마저 못살게 군다. 그 주부는 “도대체 나라 살림을 어떻게 하길래 백성들 살림 꼴이 이 지경이 됐느냐?”며 혀를 몇번이고 찼다. 이유는 간단하다. 벼슬 자리에 그럭저럭 있다가 물러가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이 꼴로 만들었다. 나라 살림을 제집 살림처럼 여겨 책임감을 가지면 백성들 살기가 이토록 어렵지마는 않을 것이다. /임양은 주필

지진

남국의 햇살이 쨍쨍한 가운데 열대의 운치가 넘치는 평화로운 해변, 이를 덮친 난데없는 산더미같은 해일파도 쓰나미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인근 해저에서 용틀임을 튼 지진은 지각 변동을 일으키면서 1천여㎞나 떨어진 스리랑카 태국 등 동서남아 여러 나라를 강타했다. 인류적 재앙의 대참사가 난지 열흘이 넘었으나 정확한 인명피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초 2만명으로 보았던 것이 5만, 10만명이라더니 15만명이라고 한다. 이러다간 20만명을 넘어설 공산이 높다. 현지 마을주민과 관광객들을 집어삼킨 잔혹한 쓰나미는 주검이 수백구씩 엉킨 시신 더미를 군데 군데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남겨놨다. 길마저 끊겼는가 하면 통신이 두절된 고립지역이 피해국마다 수두룩 하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지질학자 케리 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이번 지진을 예고했다는 외신 보도가 눈길을 끈다. 인도네시아 지진을 10년간 연구해 온 그는 지난해 12월 중순 초대형 지진이 일어날 것 이라며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어 해변촌 주민에게 거처를 옮기도록 포스터 등을 배포한 것이 이번 참사로 피해를 본 지역으로 적중했으나 당시엔 시 교수의 경고를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유엔이 중심이 된 이재지역의 구조활동으로 더러는 생사가 엇갈린 기적의 희비가 잇따른 가운데 지구촌 온정이 쏟아져 20억달러의 구호금이 답지됐다. 한국인 희생자도 늘어 사망 및 실종이 20명으로 확인됐으나 소재불명이 330여명이나 되어 가족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희생된 사람 중엔 신혼여행이나 효도관광을 갔다가 뜬금없는 참변을 당하는 등 애절한 사연이 많아 실로 안타깝다. 중동 등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 지진 피해가 없는 곳은 동북아 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후속 강진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한반도가 지층 구조상 비교적 지진으로부터 안전지대인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지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대비는 무슨 대비든 평시에 해두는 것이 최상책이다. 정부의 국내 지진에 대한 연구와 관심도가 얼마나 되는지가 무척 궁금하다. /임양은 주필

닭의 해

닭은 원래가 꿩처럼 야생동물이었다. 들닭을 가축화한 게 BC 7세기경으로 전한다. 그러니까 약 2천700년 전이 된다. 국내 고문헌에 닭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설화가 있다. 신라 탈해왕 9년에 왕이 금성(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나는 꿈을 꾸어 사람을 보내보니 나뭇 가지에 걸려있는 금빛나는 궤안에 사내 아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가 바로 경주 김씨의 시조로 김알지(金閼知)다. 시림 숲을 오늘의 계림(鷄林)으로 바꿔 부른 것이 그때부터다. AD 65년의 일이므로 닭이 이미 우리 나라에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닭은 난용종·육용종·난육겸종이 있고 또 애완종과 투계용이 있다. 재래종인 토종닭은 육용종에 속한다. 지금 많이 사육되고 있는 난육겸종의 흰색 레그흔은 이탈리아가 원산지다. 닭은 약용식으로도 많이 쓰인다. 동의보감은 검은 암탉의 날개는 아이가 밤에 울며 보채는 것을 고치고, 날갯죽지는 하혈을 막고 부스럼을 고치며, 닭똥은 중풍으로 말을 못하는 증상을 치유한다는 등 이밖에도 많은 처방이 나 있다. 닭은 지네의 천적으로 아무리 큰 지네도 꼼짝을 못한다. 요물로 둔갑하여 인명을 해치는 지네를 물리치는 닭의 전설이 이래서 많이 전한다. 속설도 많다. 경기지방에서는 ‘여자가 닭발을 먹으면 그릇을 잘 깬다’는 말이 있다. ‘며느리가 닭 대가리를 먹으면 시어머니 눈밖에 난다’는 말은 호남지방의 속설이다. 정월 초하룻날 벽위에 닭과 호랑이를 그려 놓으면 액이 물러간다는 것은 ‘동국세시기’의 기록으로 항간의 전래 풍속을 집대성한 이 책은 조선 순조 때 홍석모가 편찬했다. 올 을유년(乙酉年)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육십갑자(六十甲子)에서 스물 두째가 되는 해다. 지네같은 요물을 물리치고 액 막음을 하는 닭같은 닭의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아무쪼록이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형편이 나아지고 싸움질도 덜해 좀 평안한 나라가 되는 을유년이 되길 기원한다. /임양은 주필

새벽

‘새벽’은 동서고금을 통해 예술, 특히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됐다. 한국에는 정한모(鄭漢模·1923~1991)선생의 제4시집 <새벽>이 유명하다. 새벽의 뜻이 날이 밝을 녘, 먼동이 트기 전이 듯 새벽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기대감을 갖게 한다. 정한모의 시집 <새벽>의 작품세계 역시 독자들에게 희망과 기대감을 준다. 시집 <새벽>은 크게 보아 ‘새벽’이라는 미래지향의 역사의식을 다룬 시와 ‘어머니’라는 대지적 사랑, 또는 근원적 고향을 천착한 시로 대변된다. ‘새벽·1’은 어둠속에서 새로운 빛과 생명을 예감하는 미래지향의 시의식을 보여준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은 험난한 과거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밝고 힘찬 미래를 내다보는 정신의 힘, 즉 역사의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벽·7’에는 밤이 표상하는 현실의 어둠에 대한 대결정신이 드러난다. “암흑의 공포 / 그 두꺼운 벽을 향해 / 건곤일척 / 일격을 가하는 / 철권같은 울음 소리”라는 구절 속에는 온갖 불의와 비순수, 그리고 악덕에 저항하는 휴머니즘의 대결정신이 들어 있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과 대결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신념과 희망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정한모의 역사의식은 확실한 방향성을 획득하게 된다. 연작시 ‘새벽’이 미래지향의 역사의식을 지향한 데 비해 ‘어머니’는 현실을 있게 하고 튼튼히 지탱시켜 주는 과거지향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 ‘어머니·1’에서 어머니는 온 가족의 “생명의 샘꼭지”이며 동시에 “우리집 기둥”을 떠받치는 힘으로 존재한다. 부부와 자식만 있고 점차 ‘어머니’를 잃어가는 핵가족 중심의 불안한 현대적 가족구조 속에서 잊혀져 가는 어머니의 의미와 그 위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올바른 인생이 가족질서의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데서 성취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한모는 시집 <새벽>을 통해 미래지향의 역사의식과 균형잡힌 휴머니즘을 집약시켰다. ‘당동벌이 (黨同伐異)’의 해 2004년이 지나갔고 2005년 새벽이 열렸다. 정한모의 시집 내용처럼 올해는 미래를 지향하는 생명의 빛이 넘치고, 가족질서가 균형과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세모의 노래

경기문학인협회(회장 송효숙)가 마련한 제7회 경기문학인상 시상식 및 2004년 송년문학축제가 그제 저녁 경기도여성회관 강당에서 있었다. 본상은 은결 시인, 젊은 작가상은 박병철 시인이 각각 수상한 이날 축제 프로그램 중 명사들의 애송시 낭송이 있었는데 유동준 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장은 신동엽(1930 ~1969)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낭송했다. 원로시인 황금찬(1918 ~)선생과 만해마을 대표 이근배 시인은 수백 편의 시를 암송하는 기억력을 갖고 있지만 시를 암송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유동준 회장은 전에 다른 문학행사에서도 그랬었지만 “껍데기는 가라. / 4월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후략)” 하고 듣기 좋게 낭송했다. 애송시 낭송은 뒤풀이 장소에서도 이어졌다. 하객으로 참석한 강성구 전 국회의원이 대학동기인 조석구(전 오산문화원장) 시인의 ‘작은 숲 속 길’과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을 낭송했다. MBC TV 기자, 앵커, 사장을 역임한 강 전 의원은 “투명한 생각 하나 / 숲 속으로 난 / 작은 길을 걸어 간다 // 이런 날은 으레 / 순금빛 바람이 불어 온다 // 우리들은 참나무 아래 모여 앉아 / 붉은 가난과 외나무다리를 꺼냈다 // 사는 거여 / 참고 사는 거여 // 그 날의 결론이었다” 라고 보기에 좋은 모습으로 낭송했다. 그러고 보니 2004년 한 해는 정말 무던히도 많이 참고 살았다. 오늘 밤만 지나면 2005년이다. 그래서 임병호 시인은 ‘歲暮의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 “세월은 / 떠나는 것이 아니다. / 세월은 / 흘러오는 것. // 그리움 가슴에 안고 / 잠 못 이룬 날도 있었지만 / 삼백육십오일을 / 하루처럼 살았다. // 서러워하지 않으며 / 분노하지 않으며 / 뉘우치지 않기 위하여 / 삶을 사랑했다. 사랑했다. // 세월은 / 떠나는 것이 아니다. / 세월은 / 보내는 것. // 잘 가거라, 세월이여 / 올 한 해도 행복했다. // 제야의 언덕에서 / 그리운 이름 부르면 / 눈부신 세월이 흘러온다. / 새 빛이 가슴을 밝혀준다.” /임병호 논설위원

스캔들

1970년 초 미국 국무성에 근무하던 중년 외교관 헨리 키신저는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임에서 자주 목격됐다. 키신저는 질 세인트 존이나 말로 토머스 같은 신인 여배우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자 “권력은 최고의 최음제”라고 말했다. 에바 페론은 잠자리를 통해 정상에 오른 대표적 사례다. 아르헨티나 팜파스(대초원)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의 엄마는 하숙집을 운영했으며 에바의 세 언니 모두 그 집에 묵었던 총각들(군 장교·변호사·승강기 기사)과 결혼했다. 에바의 가족들은 적당한 남자와의 성관계가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에바는 언니들과는 달리 좀 더 높은 곳에 뜻을 두었다. 열 다섯번째 생일이 막 지난 후 탱고 가수 아구스틴 마갈디가 마을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갈 때 그와 동행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했다. 시골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에바였지만 스무살에 섹스 파트너들의 도움을 받아 유명 배우로 성공했고 결국 페론 대통령과 만나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양귀비와 프랑스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풍파두르 부인도 에바 페론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의 스캔들 역사도 뿌리가 깊다. 미국 초기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흑인노예였던 샐리 헤밍스와 오랫동안 성관계를 가지면서 몇 명의 아이를 낳았다.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과 성(性)은 상대적으로 끝없는 유혹의 미로를 헤맸다. 한국에도 권력·금력 등을 둘러싼 섹스 스캔들은 많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스캔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를 뒤흔든 10·26사태와 박정희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와 친일성 등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극비리에 촬영을 마치고 내년 2월초 개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 비록 가명을 쓴 영화이긴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삽입돼 있어 파장 또한 적지 않을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스캔들 없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 임병호 논설위원

‘비럭질’

북의 식량 구원은 국제사회에 이미 정평이 나있다. 남쪽에서 해마다 쌀 40만t, 비료 20만~30만t씩 보내주는 것 말고도 미국 일본 중국 등지서 쌀을 보내준다. 지난 용천 폭발사고 땐 국제사회에서 245억원 상당의 구호품을 지원했다. 남에서는 646억원 상당의 구호품을 보냈었다. 일본은 가짜 유골사건으로 올 대북 식량 지원계획 중 남은 쌀 2만t을 선적하려다가 보류해 놓고 있다. 북측 당국은 쌀 지원을 노골적으로 요구해 왔다. 이러다보니 이젠 얻어먹는데도 이골이 났다. ‘주민들이 사사려행(개인여행)으로 이웃나라(중국 러시아)에 가 민족적 존엄을 훼손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북측 로동당이 간부용 ‘국경연선(지역) 정치사업 자료’로 펴낸 교양(교육) 내용의 일부다. 이웃 나라에 려행 가서는 친척 등에게 ‘무엇이 부족하오’ ‘무엇이 없소 하면서 비럭질(빌어먹는 짓)을 하고 있다’고 했다. 려행자의 짐에서 입지도 못할 헌옷가지가 나오고, 돈벌이할 녹화물 중엔 이색녹화물(음란성 비디오 테이프)이 적지 않다고 예시했다. 북측은 이를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반공화국 모략 책동을 도와주는 이적행위’라는 것이다. 이적행위의 적은 남쪽을 지칭한다. 쌀과 비료를 보내주고 구호품을 보내주고, 주적 표현을 삭제하고, 국가보안법을 폐기한다 어쩐다 하는 데도 북측은 여전히 남쪽을 적의 개념 속에 넣고 있다. 북녘 정권은 국제사회에 식량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수치감을 모른다. 자기 나라 인민들이 배고파 탈북 사태를 빚고 있는 데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미가 없다. 인민들에게 먹이는 것 하나 제대로 못먹이면서도 되는 말 안되는 말 온갖 허튼 소린 다 한다. 국제사회로부터 얻어먹는 데 이골이 난 평양 정권이 인민들이 비럭질하는 것을 이적행위라고 하는 건 억지다. 집권세력이 국제사회에서 쌀 비럭질하는 것은 비럭질이 아니고, 인민들이 사사로 비럭질하는 것은 범죄가 된다는 논리는 웃긴다. 제발 식량의 자급자족으로 국제사회에서 쌀 비럭질 안해도 되길 바란다. 자기네 말대로 ‘민족적 존엄을 훼손’시키는 쌀 동냥을 국제사회에서 더는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임양은 주필

담배

담배 피우는 애연가는 ‘봉’이다. 조세나 준조세를 마구 부과하는 것은 안피우면 답답할 테니 그래도 된다고 보는 하대(下待) 관념이다. 정부는 건강증진부담금 354원, 담배소비세 131원, 지방교육세 66원 인상분에 현행 10%의 부가가치세를 포함해 담배 한갑당 균일 500원씩 올렸다. 원가 상승으로 갑당 40원의 추가 요인이 발생하지만 소비자 부담을 덜기위해 추가 요인을 자체적으로 흡수한다고 했다. ‘고양이가 쥐 걱정해주듯 한다’는 속담과 같은 소리다. 올려도 그렇게 일약 25% 인상은 물가를 감안해 해도 너무했다. 애연가들은 이처럼 납세보국을 하면서도 온갖 천대란 천대는 다 받는다. 사무실이나 상가에서도 심지어는 길에서도 담배 한대를 마음 편히 피울 곳이 없다. 정부가 앞장서 끽연권보다 혐연권에 우선을 주어 흡연을 마치 이단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서도 담배 태우기가 마땅치 않다는 애연가들의 호소가 높다. 아닌게 아니라 담배를 피우면 주변이 지저분해 지는 것은 맞긴 맞다. 새로 방안 도배를 해도 서너달만 가면 이내 담배 연기가 배어 벽지가 노랗게 찌든다. 재털이가 있지만 담뱃재가 방바닥에 흩날리기도 한다. 담배를 많이 태우면 입에서 악취가 나 남에게 불쾌감을 주기가 일쑤다. 몇달 전엔 유명 인사들도 있는 어느 애연가 모임에서 끽연권 주창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지만 이래서 혐연권 우선이 사회적으로 더 인정되고 있다. 비록 이렇긴 해도 담배를 기호품 삼는 애연가들에게도 최소한의 권리는 있어야 할 터인데도 날이 갈수록이 설 자리가 더 좁아져 가기만 한다.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라고 답뱃갑에 적힌 경고에도 불구하고 피우는 애연가들이 안타깝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같은 경고문을 써놨다하여 담배 피해에 대한 담배 제조 및 전매행위에 책임을 다했다 할 수는 없다. 아예 만들지를 말든지 아니면 완전 민간기업으로 넘겨야 할 것이다. 담배 전매로 온갖 수익을 다 보는 정부가 얄팍한 문구 한구절로 애연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하는 것도 웃기는 소리다. 이번 기회에 이래저래 하는 꼬락서니가 보기싫어 담배를 끊어버리겠다는 애연가들이 적잖다. /임양은 주필

조수(助手)

‘주장(主掌)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 대학에서 교수의 지휘를 받아 학술·기예에 관한 사무를 보조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수(助手)의 낱말 풀이다. 민중서림이 펴낸 국어대사전에서다. 다른 사전 역시 거의 마찬가지다. 나이든 사람들이 갖는 조수의 어감은 선뜻 자동차 운전수 조수를 떠올린다. 일본의 자동차회사인 도요타(豊田)나 미국 제너럴 모터카 코포레이션(General Motorcar Corporation)사가 만든 군용 트럭이 국내에 일반화됐을 때다. 여객 버스가 대중화되지 못했으므로 돈 받고 화물도 싣고 사람도 태우곤 했다. 도요타 트럭은 일본식 발음인 ‘도라쿠’라고 했고 GMC트럭은 ‘제무시’로 통칭됐다. 그 무렵은 운전수라고 불렀지만 ‘운전사’라고 하는 지금보다 더 대우받았다. 트럭 운전수를 따라 다니는 조수는 온갖 잡심부름과 기름 범벅이 되는 고생을 하면서도 선망의 운전수가 되기 위해 충성을 다 했다. 중국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들은 ‘조수’란 말에 중국 외교부의 해명이 있었다. 우방궈(吳邦國)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면담을 갖는 자리에서 정 장관을 가리켜 “노무현 대통령의 조수…”라고 한 것은 좋은 의미라는 것이다. 한국 기자들이 어색하게 여겨 질문한데 대한 이같은 중국측 해명은 “중국에서 조수라는 표현은 핵심 참모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통역자가 한자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서 오해가 생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 장관은 중국서 가진 국내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앞으로 북한 문제는 미국의 개념에 맞출 게 아니라 우리를 중심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여전히 (미국내에서) 체제 변경론, 북한 붕괴론이 있지만 이는 한국 정부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면서 그같이 밝혔다. 정 장관의 중국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과 상통하는 발언으로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다. 중국을 간게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간 것이어서 새삼스럽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생각되는 건 있다. 그 옛날 운전수가 되기 위해 온갖 충성을 다하던 조수가 떠오르면서 우 위원장의 ‘조수’ 표현이 어떤 의미였던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임양은 주필

과천·구리·안양

과천시가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한 기초자치단체의 노력과 성과를 평가하는 ‘2004 도시평가’에서 최우수도시로 선정돼 대통령상을 받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도시평가 수상 도시는 친환경, 녹색교통, 문화, 도시관리 주민참여, 정보화 등 6개 부문에 걸쳐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전문가 80여명이 9월부터 3개월 동안 서류심사 및 현지방문 평가를 통해 선정됐다. 과천시는 보행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전거도로를 건설하고 장애인 심부름 차량 및 도우미 차량을 운영해 노약자와 장애인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등 녹색교통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정보화·문화부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친환경부문 대상을 받는 구리시는 토평동 한강둔치 21만6천500㎡(6만5천500평)에 유채·코스모스 꽃단지를 조성, 상수원 수질을 보호하고 시민참여형 프로그램을 개발·도입함으로써 자연학습장 및 시민축제행사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봄·가을이면 유채와 코스모스가 만발하고 계절마다 야생화가 가득한 한강둔치 자연학습장은 그림대회·시민백일장 등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지고 평일엔 생태지도자·학생·유치원생의 현장 체험 학습장소로 쓰인다. 농업용수로 활용하던 자연하천형 연못인 장자못에 수생식물을 심어 습지로 조성, 수면생태공원으로 되살려 내기도 했다. 안양시도 특별상을 수상했다. 안양시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며 공장도시로 변했다. 대표적인 후유증으로 안양천이 병들기 시작해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하천이 되었다. 그러나 안양천을 살리기 위해 1999년 이후 꾸준히 수질개선사업, 수량확보사업, 자연형 하천정비 및 생태복원 사업에 나서 지금은 수질이 2급수로 크게 개선됐다. 이제 안양천에서는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할뿐 아니라 많은 물고기와 철새들이 찾아오고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공원으로 바뀌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과천·구리·안양 3개 시가 전국 시·군 중 최우수도시, 찬환경부문 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지자체의 발전일 뿐 아니라 특히 주민복지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다른 시·군들도 본보기로 삼기 바란다./임병호 논설위원

詩 원고료

재단법인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하는 불교계 계간 문예지 ‘유심’이 내년 봄호에 ‘격외시단(格外詩壇)을 신설하고 시 한 편에 원고료 100만원을 지급한다고 밝혀 문단에 화제가 일고 있는 중이다. 매호 4명의 시인과 2명의 시조시인을 선정해 격외시단 원고를 청탁한다는데 선정대상은 1980년 이후 등단한 문인 중 문학성이 높고 꾸준하게 활동해 온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내년 봄호에 먼저 청탁한 시인은 정일근·고진하·문태준·박영근씨, 시조시인은 정수자(수원)·오승철(제주도)씨 에게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춘문예 말고 현재 가장 비싼 시 원고료는 포항제철에서 발행하는 사보 ‘포스코신문’이 지급하는 편당 20만원이다. ‘문학과 사회’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문학수첩’등 대표적인 문예지들의 시 원고료가 편당 10만원이고 보통 8만원(세계의 문학), 3만원~10만원(시인세계·월간문학·현대시 등)이다. 일부 시 전문지의 경우 아예 원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곳도 있다. 일간신문, 특히 지방신문의 문화면에 발표되는 시에 원고료를 지급하는 곳은 손꼽을 정도다. ‘유심’의 격외시단 시 한편 원고료가 100만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기울인 시인들의 고뇌에 찬 작업에 비하면 또 그리 큰 금액도 아니다. ‘유심’ 이 청탁대상자를 1980년 이후 등단한 문인으로 정한 것은 고육지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로를 예우하는 문단정황으로 봐서 현재 한국시단에는 1980년 이전 등단한 시인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시인이 원고료로만 생활할 수 있는 게 바람직스러운 일인지는 단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들리기로는 이달 초 몇몇 시인들이 ‘유심’의 실질적 운영자인 오현 스님 등과 저녁자리에서 장난스럽게 나온 제안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돼 시 한 편에 100만원의 고료를 주기로 결정됐다고 한다. 시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비싼 원고료를 내건 게 어떻게 보면 쑥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싶으면서도 시가 돈으로 환산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이마누엘 칸트

근대 서구철학의 최고봉으로 추앙받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1804년 2월12일 밤 임종의 침상에서 목이 마르다고 했다. 옆에 서 있던 이가 포도주와 물을 섞어 기력이 완전히 쇠잔한 그의 목을 축여 주었다. 기운이 조금 돌았던 걸까.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것으로 좋다’(Es istgut)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대로 여든살의 칸트는 영면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두고 남겨진 사람들의 해석이 분분했다. 단 음료수 맛이 좋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살아온 삶이 만족스러웠다는 뜻 이었을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후자의 뜻으로 해석하고 싶어했다. 칸트는 오늘날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대결해야 할 인물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비롯한 그의 철학적 저작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실로 커서 거의 모든 철학적 저작이 이 3대 비판서를 포함한 칸트 철학을 회피해가지 못한다. 생활인으로서 칸트에게는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평생 고향 괴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돼 줄곧 공부만 하며 살았다. 규칙적인 자기반복적 생활은 칸트 철학을 모르는 사람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철학이 그의 애인이었다. 칸트에게 ‘아이의 첫 울음소리’는 ‘인간의 고뇌에 찬 자유의 충동’이었다. 그의 철학적 주제는 처음부터 ‘자유’였다. 그에게 진정한 사건이 있었다면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의 저작을 읽었을 때, 그리고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회의주의자 데이비드 흠의 저작을 읽었을 때 받은 지적 충격이었다. 이 두 사건은 그를 공허하고 독단적인 형이상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연세계의 객관적 질서를 뛰어 넘는 초월적인 숭고의 세계, 이성의 정언명령에 따른 도덕률의 세계를 끝까지 간직했다. 이를테면 그가 마지막에 썼던 경구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법칙’은 그가 평생 간직했던 ‘형이상학적세계’였다. 생활은 단조로웠으나 철학엔 혁명을 몰고 온 ‘자유사상가’의 삶이 요즈음 자꾸만 생각난다./임병호 논설위원

‘만물박사’ 핸드폰

자석식전화, 공전식전화가 있었다. 지금의 자동식전화가 있기 전이다. 자석식 전화는 전화기 안에 자력을 일으키는 손잡이를 돌렸다. 송수화기가 따로 있었다. 광복전 장면의 영화에서 흔히 나온다. 공전식전화는 1960년대 자동식전화가 나오기 이전에 있었던 걸로 송수화기를 그냥 드는 것이었다. 자석식이나 공전식이나 전화국의 교환수에게 상대편 번호를 알려 연결해 주어야 통화가 가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환수가 필요없는 자동식전화도 처음엔 다이얼을 돌렸다가 돌리는 것도 시간이 걸리고 귀찮아져 이젠 버튼을 누르게 됐다. 전화로 사람을 찾는 일명 삐삐라는 호출기가 처음 나왔을 때 굉장하다고 여겼다. 직장마다 삐삐를 필수품처럼 알았던 것을 이동통신인 핸드폰이 보편화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핸드폰의 기능도 다양해졌다. 폰 뱅킹, 폰카메라 등 이밖에도 많아 핸드폰 하나가 족히 사무실 구실을 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지그비(ZigBee)란 게 나오는 모양이다. 외출중에 집안의 갖가지 가전제품을 핸드폰에 달린 리모컨 작동으로 예컨대 문단속도 하고 밥도 짓고 텔레비전이나 전등도 켰다 껐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자제품연구원이 이같은 무선통신기술의 시연을 얼마전에 선보여 실용화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전에도 적외선을 이용하는 이와 비슷한 무선통신기술이 있긴 하였지만 전력이 많이 들고 통신거리가 짧아 보편화되지 못했던 단점을 지그비가 해결하여 앞으로 시판되면 또 불티날 전망이다. 놀라운 것은 지그비를 응용해 만든 원격 검침기로 옥외에서 수도나 전기 등의 사용량을 정확히 포착해 낸다는 점이다. 이젠 집에 사람이 없어도 검침원의 검침이 가능할 날이 멀지 않았다. 또 차를 타고 가거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핸드폰을 이용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한 휴대인터넷 시제품이 삼성전자와 전자통신연구원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다. 새 무선통신 기술의 발달은 홈네트 워킹 제품 개발을 잇따라 가져와 또 무엇이 나올 것인 지 실로 상상을 불허한다. 경복궁에 고종 황제 어용의 궐내 전화가 이 땅에 처음 가설됐던 게 약 100년 전이다. 당시 최신 문명으로 꼽혔던 전화를 지금 보면 지극히 원시적이다. ‘만물박사’화 하는 핸드폰 이용기술의 발달이 근래들어 굉장히 발 빠르다는 생각을 갖는다./임양은 주필

이상한 남북관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북측의 비위를 맞추는 것일까, 변덕도 심하고 탈도 많고 탓도 많은 게 평양 정권이다. 이유도 많고 억지도 많다. 정말 피곤한 상대다. 그러니 믿을 수 없어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다. 그래도 남쪽에서 만은 버려선 안 된다는 게 이 정권이 갖는 기본적 대북관이다. 나쁜 건 아니다. 동포이므로 그래야 하는 게 맞긴 맞다. 북측 인민의 인권이 엉망인 것을 알면서도 거론하면 내정 간섭이 된다는 구실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국군 포로나 납북자 송환 문제도 외면하고 있다. 6·25동란을 일으킨 것도 문제삼지 않고 있다. 탈북자들을 데려오는 것도 눈치를 살펴가며 한다. 그저 퍼주기만 한다. 저들의 비위를 건들지 않기 위해서다. 듣기 싫은 소리는 쉬쉬해가며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 김동식 목사가 납북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는 데도 정부는 거의 침묵만 지킨다.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달라는 가족들의 애탄 호소마저 못들은 체 한다. 김 목사는 중국서 탈북자들을 돕다가 북측 공작원에 의해 지난 2000년 1월16일 낮 12시30분경 옌지(延吉)시내에서 피랍됐다. 일본은 북측이 돌려준 납북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이 가짜로 밝혀져 온 나라 안이 분노로 가득차 시끌벅적 했다. 우리는 일본 같은 처지가 아니어서 대북 제재를 한다고는 못할 지라도 좀 물을 것은 묻고 따질 것은 따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 어린아이나 망나니 달래듯 마냥 ‘오냐 오냐’하는 건 남북관계를 오히려 변질시킬 수 있다. 진정한 화해협력의 길을 저해한다. 당국은 김 목사 납북 관련자의 한 사람인 북측 공작원 1명을 국내에서 체포한 바가 있으나 이 역시 쉬쉬했다. 놀라운 것은 또 있다. 북의 공작원이 마음만 먹으면 국내를 수시로 드나들 수 있고 한중간 국제전화로 중국에 있는 자기네들 공작원과 접촉이 가능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생각으로는 도시 믿기지 않는 소리다. 나라 모양새가 참 이상하게 돌아간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는 지 걱정이다. 앞으로는 또 뭐가 어떻게 될 건지 또 알 수 없다. 이 정권이 작심한 남북관계의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 지 의아스럽다./임양은 주필

한국 대 독일 축구 대표팀 평가전

한국축구의 영파워가 독일의 전차군단을 격파했다. 3-1의 스코어는 완승이다. 독일은 2006년 월드컵 개최국이다. 월드컵 우승의 전력을 지닌 세계적 축구 강호다. 독일 대표팀도 젊은 피로 대체했다. 이 독일 신세대를 한국의 신세대가 완파하면서 무패 행진의 클린스만 독일팀 감독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었다. 본프레레 한국대표팀 감독이 구사한 신세대 용병술이 독일 축구의 정규 군단을 격파한 평가전은 놀라운 수확이다. 양 윙백 김동진 박규선, 중앙수비 김진규, 중앙 미드필더 김두현, 공격수 김동현, 이밖의 이동국 김정우 남궁도 김상식 등이 신예의 투지와 기동력을 무기화한 세트 플레이는 일품이었다. 단 둘 뿐인 젊은 해외파 차두리 조재진은 게임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고, 수문장 이운재가 페널티킥을 쳐내는 등 신들린듯한 ‘거미손’ 선방 또한 빛을 뿜었다. 이번 평가전에 나선 젊은 피의 신세대 대표팀은 급조된 팀인 데도 높은 가능성을 보인 건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해외파 안정환 유상철 설기현 이영표 박지성 이천수 등 역시 훌륭한 선수들이다. 다만 한국 축구는 이제 2002년 월드컵의 4강 창조 신화를 잊어야 한다. 이래야 매너리즘과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신화 창조의 분출력이 창출된다. 물론 독일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승리를 낚았다하여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상대 패스에 너무 잦게 뚫린 스리백 수비의 허점은 앞으로 보완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파워와 스피드가 뛰어난 신세대 대표팀은 주전으로 뛸 충분한 재목들임을 입증하였다. 대인방어를 위한 체력 배양과 공수 전환이 빠른 조직력 강화로 더욱 공격적 한국형 플레이를 연마할 수가 있다. 솔직히 이번에 한국 축구가 독일 대표팀을 깰 것으로는 거의 예상치 못했다. 이랬는데도 이긴 건 한국 축구의 성장 동력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처 진단해내지 못했던 숨은 성장 동력을 극대화하여야 한다. 우울한 세모, 답답한 세모다. 이런 가운데 보여준 신세대의 한국 축구 대표팀 승전보는 정말 청량제와 같다. 어려운 세월속에 그래도 2006년 월드컵 청신호의 희망을 지펴주었다. /임양은 주필

대마초

‘마리화나’로 불리는 대마초의 주 성분은 ‘테트라하이드로카나비놀(THC)’로 진통작용이 있어 말기암 환자 등의 통증 치료에 사용된다. 경련과 설사를 멎게 하며 심장박동을 빠르게 한다. 또 식욕과 성욕을 증가시키는 등의 신체적 효과도 있다고 한다. 정신적으로는 긴장이 완화되면서 다행감(多幸感), 상상력이 증가한다. 자꾸 웃음이 나고 시간 개념이 불분명해지게 된다. 그러나 다량 흡입할 경우 환각제와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어렵게 되며 감각의 왜곡현상도 심해진다고 한다. 대마초를 자주 피우는 사람은 좀 더 강력한 환각· 진정 효과가 있는 마약을 찾는 경향이 있어 ‘초보자용 마약’이란 뜻에서 대마초를 ‘관문 마약(gateway dnug)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대마 사범이 처벌 받는 법적 근거는 2000년 1월 제정된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로 이는 기존 마약법, 대마관리법,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 일부 주(州)에서 대마초 흡연을 합법화한 곳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대마초의 매매·소지· 흡연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는 없다는 게 대검 마약과의 설명이다. 흔히 ‘대마 흡연자의 천국’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도 법적으로는 약용(藥用)판매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처럼 단순 사용자도 처벌하고 있다. 미얀마는 대마초 거래상의 경우 5년 이상 징역형을, 필리핀은 최고 종신형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거래상을 단속하면서 사용자들에게는 강제 치료처분을 내리고 있다. 중국은 사용자도 처벌대상이나 혐의가 경미한 때에는 과태료를 부과한다. 최근 소수의 영화감독, 가수, 탤런트 등이 ‘대마초 합법화’를 촉구한 것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수차례 구속된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이 헌법의 행복 추구권과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며 낸 위헌소송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초를 피울 경우 내재돼 있던 불안장애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 질환이 발현돼 정신병 환자가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합법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민생법안

제251회 임시국회에 계류중인 법안 중에는 민생법안이 많다. 법사위에 계류중인 민법 개정안은 1958년 민법 제정 이래 46년 만에 처음 재산법편을 대대적으로 손보는 법안이다. 보증을 서준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여건을 엄격히 하고 비행기·선박사고 등의 특별실종기간을 1년에서 6개월로 단축하며 성년 연령을 19세로 낮추도록 하고 있다. 법사위에는 또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급료에 대해서는 압류를 못하도록 하는 민사집행법 개정안이 있다. 지금은 월급의 절반까지를 압류할 수 있지만 법안이 통과되면 4인 가족의 경우 106만원(최저생계비)은 압류할 수 없게 돼 압류액은 54만원으로 준다. 교육위 학교용지 확보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은 대단지 아파트 등을 분양받는 사람들이 내는 학교용지 부담금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낮춰주는 법안이다. 지금은 분양가 3억원인 아파트라면 240만원(0.8%)을 내야 하는데 이를 120만원(0.4%)으로 줄여준다. 법안이 늦게 통과되면 될수록 현행 제도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 국민들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교육위에는 또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학교발전기금을 폐지토록 한 초·중등 교육법 개정안이 올라가 있다. 재경위에 계류중인 소득세법은 소득세율을 1%포인트(정부안) 혹은 3% 포인트(한나라당 안) 낮춰주도록 하고 있다. 법안이 상대적으로 낮은 정부 안으로 통과되더라도 근로자와 자영업자들은 세금을 1인당 연평균 20만~30만원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민생법안은 이른바 4대 입법(국가보안법·과거사법·언론관계법·사립학교법)과 ‘뉴딜3법’(기금관리기본법·민간투자법·국민연금법)에 가려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시급히 처리돼야 한다. 호주제 폐지 등 여론이 크게 갈리는 가족법과 달리 재산법에 대해서는 큰 논란이 있지 않는 데도 한나라당 의원들의 법사위 회의장 점거로 법사위가 전혀 열리지 못하면서 심의가 아예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민생법안 지연에 ‘멍드는 민생’이 있는 줄 모르고 ‘안들어 오면 단독국회를 열겠다’는 여당이나 ‘혼자서 할테면 해보라’는 야당이나 참으로 한심하다. 세비를 몰수해도 시원치 않은 사람들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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