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리 자급률

2003년 이후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칼로리 기준)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식생활 서구화와 농산물시장 개방확대의 결과이지만, 같은 입장인 일본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도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도는 심각하게 낮은 수준이다. 특정 국가의 식량자급도를 표시하는 대표적인 지표인 ‘칼로리 자급률은 국산 및 수입 식품을 통해 국민이 섭취한 칼로리(열량) 중 국산의 비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칼로리 자급률은 1970년(79.5%) 이후 줄곧 하락하다가 2000 ~ 2002년에는 49%대의 마지노선을 지켜왔다. 그러다가 한해 사이 전년에 비해 무려 4.7% 포인트 떨어졌는데 2003년부터 식생활의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중국 등지에서 농산물 수입이 늘어난 것이 주원인이다. 심각한 것은 식량자급률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식량안보를 보장하는 최소한의 식량자급도에 관한 국제적 기준은 없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일본의 경우 1999년 쌀 시장을 개방하면서 자급률 목표치를 법제화했다. 일본은 식량안보와 농촌사회 유지 등에 필요한 자급률 목표치를 칼로리 기준으로는 45%, 곡물소비량(사료용 포함) 기준으로는 30%로 설정했다. 일본 기준을 따를 경우 우리나라는 2002년까지만 해도 식량안보가 그나마 최저선에서 유지됐으나 2003년 이후 위험수위로 떨어진 셈이다. 2002년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칼로리 기준 49.6%, 곡물기준 30.4% 였다. 2003년 현재 식품별 자급률이 100%를 넘는 것은 해조류(141.5%)와 계란류(100%) 두 가지에 불과하다. 콩(7.3%) 등 두류의 자급률은 8.2%에 불과했으며, 쌀(90.3%) 보리(49.8%) 밀(0.3%) 옥수수(0.8%) 등 곡물류 자급률은 27.7%에 그쳤다. 어패류(61.8%) 우유류(81.2%) 육류(81.2%) 과실류(85.0%) 등 주요식품의 자급률도 90%에 미치지 못했으며, 쇠고기와 닭고기의 자급률은 각각 36.3%와 76.7%에 머물렀다. 하지만 늦게나마 농촌경제연구원 등이 식량자급률 목표치 설정을 위한 연구작업을 진행중인 것은 다행이다./임병호 논설위원

한국축구

“선수가 골을 넣어야 할 땐 넣어야 한다. 감독이 볼을 찰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말이다. 본프레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사면초가에 몰렸다. 2005 동아시아연맹축구대회에서 2무1패로 최하위의 나락으로 떨어져 팬들의 분노가 높다. 동아시아 무대쯤은 여유있게 정상 정복을 예견했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난 것은 사실이다. 한국 축구에 ‘본프레레 컬러’가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전략무기가 빈곤하다는 것도 아직은 맞다. 0-1로 패한 일본팀과의 게임에서도 상대의 두터운 수비진을 교란시키거나 유인해내는 비책없이 무조건 정면돌파만 시도하여 번번이 막혔다. 빈 공간을 이용하는 속전도 졸렬했다. 그러나 히딩크 말대로 감독이 볼을 차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의 게임만해도 졸전인 가운데 그래도 득점 찬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두 골은 성공시켰어야 할 기회를 놓쳤다. 선수가 놓친 실기의 책임을 감독에게 덮어 씌우는 건 무리다. 한 구단 감독은 “몇 몇 선수의 과욕으로 손발이 안 맞고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못따른 선수도 있었다”며 선수들을 질책했다. 어떻든 이제 더 이상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어느 강자든 게임마다 이길 수 있는 강자는 없다. 질 때도 있는 게 게임이다. 다만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이 따로 있다. 져서는 안 되는 게임을 위해 지금부터 전열을 정비하는 게 중요하다. 동아시아 축구대회는 연습무대로 가볍게 넘기면 된다. 레귤러 멤버가 출전한 것도 아니다. 이기면 한국 축구가 완전한 것 처럼 호들갑을 떨고, 지면 한국 축구가 다 끝난 것 처럼 매도하는 냄비 여론도 없어져야 한다. 독일 월드컵을 10개월 남겨놓고 있다. 축구 대표팀의 베스트 멤버를 확정해 본격 훈련에 들어가야 한다. 지금부터 전략과 작전을 짜고 비밀 병기도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이러기 위해서는 본프레레 감독의 지도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본프레레 컬러’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히딩크도 초반엔 지지부진했다. 나무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게 능사가 아니다. / 임양은 주필

마릴린 먼로

미국의 전설적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는 20세기의 섹스 심벌이었다. 1953년에 찍은 출세작 ‘나이아가라’에서 선보인 엉덩이 흔들기 등 육감적인 몸짓은 관능의 절정이었다. 한국전쟁 땐 참전 미군의 순회 위문을 가졌다. 윗몸이 확 트인 옷차림새 사이로 터질듯 부푼 거대한 가슴을 흔들어대며 열광하는 미군 장병들을 뇌살시켰다. 메이저리그의 영웅 디모지아와 결혼했으나 9개월만에 파경을 맞이했다. 세상은 그를 한 남자의 아내로 놔두지 않았고, 먼로 또한 한 남자의 아내로 머물 수 없었다. 물리학의 거두 아인슈타인을 흠모했다. 먼로는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찾곤 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된 바가 없다. 분명한 건 ‘그를 유혹하고 싶었다’고 한 것은 그녀가 한 말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정사가 있은 후 케네디가(家)의 염문설에 시달리다가 의문의 죽음을 한 것이 1962년 8월5일이다. 캘리포니아 브렌트우드 자택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숨진 시체로 발견됐다. 벌써 43년이 된다. 먼로의 사후에 태어난 후세인들까지 그녀의 관능을 전설같은 화제에 올리곤 한다. 살아있으면 이제 80대에 들어서는 노파인 데도 먼로는 아직도 숨진 당시의 30대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최근 먼로는 사망 당시 발표된대로 자살하지 않았다는 보도를 수사에 참여했던 전직 검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근거로 먼로의 육성 테이프 녹취록을 제시했다. “나도 이제 중년이 돼 간다. 가슴은 조금 처지기 시작했지만 허리선은 나쁘지 않고 히프는 아직도 최고다”라는 육성 녹음으로 보아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활동했던 시절의 유명 여배우가 그녀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소피아 로렌, 데릴러, BB 등 기라성같은 여배우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관능미의 대표로 꼽히는 덴 또 다른 포인트가 있다. 미소를 지으면 약간 멍청한 듯 해 보이는 얼굴 표정의 백치미가 매력의 압권으로 평가됐다.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심심하면 한 번씩 화제에 오르곤하는 먼로의 전설은 영원한 것일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여배우다./ 임양은 주필

경기일보

기별(寄別)이란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다. ‘기별지’(寄別紙)가 있었다. 신라 신문왕 12년(692년)에 이두문자로 조정에서 발행했다. (삼국사기·설총전) ‘조보’(朝報)가 또 있었다. 조선조 초기에 조정의 결재사항과 견문록 등을 기록하여 관아에 돌렸다. 승정원에서 이를 맡아했다. 승정원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왕의 비서실격이다. ‘기별지’나 ‘조보’는 오늘날의 관보(官報)와 같다. 비록 관보 성격이긴 하지만 학계는 이를 왕조 치하의 고대적 신문으로 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민간 ‘조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 11년(1578년) 한양에서 역시 ‘朝報’라는 이름으로 신문 성격의 일간지를 제작해 팔았다. 기록에 의하면 ‘매이자생’(賣以資生), ‘팔아서 자본을 만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구독층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금속활자의 발달로 시작된 민간 조보는 그러나 몇 달 못 가 선조의 엄명으로 폐간됐다. 관련자들은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되고 대사간과 대사헌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조선조 고종 20년(1883년)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가 발간됐으나 순 한문으로 만들어졌다. 중간에 갑신정변으로 일시 휴간된 적도 있다가 1888년 박문국이 폐쇄되면서 5년만에 폐간됐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간인이 순 한글로 신문을 만든 것이 고종 건양 원년(1896년) 4월7일에 나온 ‘독립신문’이다. 당시 독립협회의 서재필 등이 발간했는 데 ‘신문의 날’을 4월7일로 정한 게 이에 연유한다. 그로부터 92년만인 1988년 오늘 경기일보가 창간되고 17년이 되는 올해는 독립 신문이 나온 지 109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국내 신문은 조선조말 민족 계몽지, 일제 저항지, 광복 직후의 이념지, 자유당 독재 항거지, 경제성장 이후에는 상업지 등으로 변모해 왔다. 이 정권 들어서는 같은 상업지이면서도 색깔을 드러내는 경향이 많다. 경기일보는 온건 개혁을 수용하는 중도 보수지를 지향한다./ 임양은 주필

신라 유적지 가수동

우리나라에서 고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수레가 유물로 확인되는 것은 한사군(漢四郡)인 낙랑(기원전 108 ~313)시대부터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제 굴대투겁과 각종 수레장식, 햇빛을 가리기 위해 마차에 장착되는 목제 일산(日傘)대가리 및 살꼭지 등이 그 증거다. 한반도 남부에선 기원전 1세기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바퀴살이 박힌 바퀴통과 수레채(끌채)에 의해 굴대와 연결되며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가 통과하는 가로걸이대(차형·車衡) 등의 수레 부속구가 출토됐다. 대체로 평양지역에선 기원 전 2세기쯤 1개의 끌채에 2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출현하고 기원전 1세기 이후 좌우 2개의 끌채에 1필의 말이 끄는 형태로 변화하는데 신창동 출토품은 후자에 속한다. 수레의 이용이 활발했던 중국과 달리 우리는 조선후기까지 일반화되질 못했다. 다만 신라와 백제의 왕경인 경주와 부여에서 발견된 도로유구에선 수레 또는 우마차가 빈번히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수레바퀴자국이 확인됐다. 부여 궁남지와 능산리 유적에선 수레바퀴(테)편이 발굴됐으며, 중국 환런(桓仁)시 오녀산성과 구리 아차산 일대 보루(아차산 4보루와 홍련봉 1보루), 양주 대모산성, 이천 설봉산성, 전남 광양 마로산성 등지에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데 사용한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수레에 사용된 차관이 출토됐다. 그런데 최근 오산시 가수동 43번지 일대에서 한성백제와 삼국시대 후기 신라시대의 접시, 국자, 말목, 우물부재, 바가지, 발하목, 쟁기자루, 베짜는 도구 등 350여 점의 목재 유물이 출토됐다. 이 가운데 길이 63㎝, 93㎝의 수레 바퀴테 2점이 들어있다. 이 수레바퀴는 목재로 만든 바퀴를 철판으로 감싼 쇠바퀴와 함께 목재로만 만든 바퀴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번에 출토된 목재(참나무) 수레바퀴는 신라시대의 왕이나 귀족이 타고 다닌 수레로 추정된다. 바퀴테에서 목재가 쪼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사로 동여맨 자국(홈)이 발견된 것도 철판으로 감싸지 않았다는 증거다. 목재바퀴의 사용은 당시 도로가 자갈길이 아니었음을 추정케 해주는 데 그렇다면 오산 지방은 상당히 발달된 지방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번 목재유물은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이 출토했다. 기전문화재연구원의 노고가 실로 크다./임병호 논설위원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에 대한 법령은 1933년 8월 9일 공포된 ‘조선보물, 고적명승 및 천연기념물 보존령’이다. 1934년 2월부터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한 조사를 시작, 5월 1일 제1차보존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19개 항목으로 된 천연기념물보존요목이 결정되고 11점의 식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식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시초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 공포할 때 까지 이 법이 효력을 가졌다. 동물의 종(種)과 서식지, 식물의 개체·종 및 자생지, 지질 및 광물 등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아 그 보호와 보존을 법률로서 정한 천연기념물은 1989년 10월 당시는 식물 184점, 동물 61점, 광물 21점, 그리고 천연보호구역 5개소 등 총 271점 이었다. 북한지역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겠지만 이것을 세분하면 식물 184점 중 노거수 125점, 희귀종 21점, 자생북한지(自生北限地) 11점, 수림지(樹林地) 24점 등이다. 동물분야 61점은 서식지 5점, 번식지 14점, 철새도래지 7점, 조류 21점, 포유류 8점, 어류 4점, 곤충 2점이다. 동굴 및 광물분야는 21점으로 동굴이 12점, 광물이 9점이다. 천연보호구역은 남쪽에서부터 한라산천연보호구역, 홍도천연보호구역, 설악산천연보호구역, 대암산·대우산천연보호구역,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이다. 올해 5월말 현재는 459점이다. 천연기념물은 새로 지정하기도 하지만 해제되기도 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거나 화재, 인재, 낙뢰 등으로 멸실되거나 그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돼 쓸쓸한 최후를 맞는 나무가 적지 않다. 이 가운데 2002년 회생불능 진단에 따라 해제된 화성시 용주사의 회양목(옛 천연기념물 264호·수령 200년)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심은 효심이 깃든 나무다. 이 회양목을 병상의 부모 모시듯 2002년부터 간병해 온 조경전문가 김영태(金永太)씨가 그동안 수술도 하고 영양주사를 놔 작년에 잎이 돋아 났으나 지난 4월부터 다시 기력이 떨어져 임종을 앞뒀다고 한다. 사경을 헤매는 회양목에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서산간척지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1979년 8월 24일 매립면허를 취득한 후 15년 3개월 만인 1995년 8월 14일 준공한 서산간척지 사업명은 ‘서산 A·B지구 간척 농지조성사업’이었다. ‘국토확장 및 간척농지 조성, 식량증산 및 자급률 제고, 농산물 증산에 의한 수입대체, 소득증대로 국민생활 향상 및 안정, 수자원 확보’라는 사업목적이 말해주 듯 농업위주였다. 서산간척사업이 처음으로 구상된 것은 현대건설 해외건설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던 1977년 이었다.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내실정에서 민간기업의 간척사업 참여는 필수적이라는 판단 아래 간척사업의 당위성을 정부에 건의하여 실현된 것이다. A지구 매립공사는 세계 건설사상 최초로 유조선을 이용한 물막이 공법을 사용했다. 4천700만평에 달하는 서산농장에서 벼를 수확하여 식량증산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현대건설과 충남 태안군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기업도시가 서산간척지 B지구 473만평 농지에 세워진다고 한다. 전체 부지의 절반이 넘는 260만평 규모의 골프장을 만들고 나머지에는 생태체험공원과 숙박시설, 스포츠 공원, 첨단복합단지 등을 조성할 모양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2011년까지 2조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민간사업이다. 그러나 반대여론이 거세다. 간척지를 개간한 목적이 식량을 생산하려는 것인데 여기에 골프장을 조성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다. 통일 이후 식량자급목표 계획과 이에 따른 적정목표 수준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간척지를 무분별하게 전용하는 것은 식량안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반대한다. 소규모·분산 농지의 타용도 전용을 억제하면서 대규모 간척지로 조성된 우량농지는 전용을 허용할 경우 향후 농지보전시책에 큰 차질이 빚을 게 자명하다. 문제는 태안지역 주민 중 1만2천여명이 기업도시 유치 찬성에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옛말 ‘상전벽해(桑田碧海)’와 바다를 메워 논밭을 만든 것은 직접 봤지만 이제는 간척지가 골프장으로 변할 것 같다.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가던 정주영 회장이 생존해 계시다면 한 마디로 “안돼!”하고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임병호 논설위원

평당원의 ‘제왕적 칙령’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평당원이다. 당정분리를 내세워 열린우리당 총재직이나 대표직 같은 것을 맡는 것은 옮지않다며 사양해 왔다. 그러나 평당원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당에서 반대하는 것도 대통령이 좋다거나, 당에서 좋다는 것도 대통령이 반대하는 뜻을 비치면 이내 평당원 대통령 의도대로 돌아서는 것이 열린우리당이다. 노 대통령의 이런 리모컨 조정은 직접 및 간접 화법으로도 하고, 때로는 소속 국회의원 등에게 서신을 보내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이른바 대연정(大聯政) 제의도 편지 수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피력해 보였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의 권한은 헌법에 의해 부여된 책임적 권한이다. 이를 떡갈라 주듯이 내각 구성 권한을 한나라당 총리에게 이양하겠다는 대연정론은 새삼 더 말할 것 없이 명백한 위헌적 발상이다. 대통령 권한을 이양받았다 해서 헌정상 유효한 것도 아니다. 헌법에 의해 주어진 권한을 개인의 권리처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체가 가히 제왕(帝王)적이다. 그런데 평당원 대통령의 ‘서신정치’가 제왕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주목을 끈다. “과거 제왕적 총재 이상의 권능으로 당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내려보낸 교서나 칙령처럼 보인다”고 어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대연정론 같은 중대 제의가 있으면서도 당 중앙위원회나 의원총회 소집 한번 없었다며 당 지도부를 나무랐다. 평당원 대통령에게 ‘Yes’만 있을 뿐 ‘No’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열린우리당의 지도부 모습이다. 겉무늬만 당정분리일 뿐, 당정일체보다 더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이 정권의 평당원 대통령이다. ‘서신정치’가 “제왕적 칙령처럼 보인다”는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선다. 역대 대통령과 스타일이 다른 노 대통령의 또 다른 제왕적 모습은 정치학의 새로운 연구 과제가 될 것 같다. /임양은 주필

‘저축의 날’

몇년 전만 해도 초등학교 학생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용돈을 아껴 모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학교 ‘저축의 날’에 선생님에게 자랑스럽게 바쳤다. 선생님은 코 묻은 돈을 받으며 절약 정신을 칭찬해주고 학생들은 저축한 금액이 불어난 통장을 보며 더욱 돈을 아껴 썼다. ‘저축의 날’에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빈병을 모아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이렇게 저축의 중요성을 심어 준 초등학교 ‘저축의 날’이 아이들의 푼돈을 받아 봐야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금융기관들이 학교 저축을 기피하기 때문에 사라진다고 한다. 더구나 학교 측도 교사들이 ‘저축왕’ 선발 등을 위한 잡무에 시달리는 데다 현금 분실의 위험이 있다며 저축의 날이 폐지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고 하니 더욱 씁쓰레하다. 대표적 학교저축인 우체국 장학금의 경우 계좌 수가 전국적으로 2001년 97만여 개에서 올 6월에는 69만여 개로 줄었다. 새마을금고연합회는 2001년 8월 아예 장학적금의 신규 계좌 개설을 중단했다. 학교저축이 연 이자율이 시중 금리보다 높은 5%가 되는 등 수익성이 없어 사업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융권과 학교측이 초등 학생들에게 절약 정신을 키워주는 게 아니라 눈 앞의 작은 이윤과 편리만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학교저축이 모습을 감추면서 어린이 펀드·증권 등 어린이 전용 금융상품이 나오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어린이 전용 금융상품은 10개가 넘는다. 어린이 전용 펀드인 ‘우리 아이 3억 만들기’를 내놓은 M사의 경우 출시 두달만에 판매액이 2배로 뛰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우량주에도 투자해 수익률이 높고 만화 등을 활용한 어린이용 신탁운용 보고서가 매달 발송돼 경제교육에 효과적인 점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 전용 금융상품은 어릴 때부터 돈을 아끼는 것보다 불리는 것에 관심을 더 두게 해 균형 잡힌 경제 감각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눈앞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투자 상품보다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학교저축이 계속 장려돼야 한다. /임병호 위원

‘사이버 포돌이’

‘지겹다’는 소리가 나올만큼 스팸메일(홍보·광고용 전자우편)이 넘쳐난다. 아이들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왕짜증’ 나는 일이다. 지지대子도 출근하여 컴퓨터 메일함을 열어 보면 날마다 300여건의 불법 스팸메일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스팸메일임을 알 수 있도록 ‘광고’ ‘성인광고’ 등을 표기토록 한 정보통신망법상 규정을 지킨 메일은 극히 드물다. 이래서 정작 필요한 메일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비아그라 판매, 발기부전 치료, 성기 확대’ ‘여성 흥분제’ 등 성인광고와 포르노 사이트, 녹화물을 판다는 음란물 광고는 내용을 금방 알 수 있으니까 그래도 나은 편이다. 천연덕스럽게 ‘안녕하세요? ○○○입니다’ ‘답변 보냅니다’ 라는 메일은 혹여 이름을 기억 못하는 발신자인 듯 싶어 확인하면 되레 더 자극적이다. 이른바 사용자를 속이는 ‘낚시성’ 스팸이다. 지워도 지워도 쌓이는 스팸메일은 해도 너무한다. 한국정보보호진흥원 불법스팸대응센터에 지난 6월 한달 동안 신고된 불법 스팸메일은 2만1천820건으로 올 1월 한달의 5천4건보다 156%나 늘었다. 신고 안 한 건 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불법 스팸메일을 전송하다 적발되면 최고 3천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토록 돼 있으나 문제는 느슨한 단속이다. 더구나 수신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발신을 허용하는 옵트인(OPT-IN)제도가 팩스·휴대전화에는 적용하고 있으나 전자우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불법 스팸메일이 오죽 심하면 중학생들이 단속에 나섰겠는가. 용인 포곡중학교 학생 35명으로 구성된 ‘사이버패트롤 동아리’는 그야말로 ‘사이버 경찰’이다. 이 동아리는 지난 6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불법청소년유해정보신고대회에서 13일 간 8천500여건을 신고, 7월 19일 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았다. 포곡중 학생들은 1주일에 2차례 방과 후 학교 컴퓨터실에 모여 스팸메일 사냥에 나선다. 자신들 뿐 아니라 친구들의 메일함까지 꼼꼼히 살펴 음란·불법상업 메일이 발견되면 추방운동을 벌이는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본부’에 즉각 신고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한다. 깨끗한 사이버 세상을 만들려는 학생들의 노력이 실로 가상(嘉尙)하다. 이 학생들이 바로 ‘간교한 여우들(불법 스팸메일업자들)’을 잡는 ‘21세기 호랑이들’이다./임병호 논설위원

피서법

다산 정약용은 1824년, 여름 더위를 이기는 8가지 이야기를 詩로 썼다. 솔밭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서 그네타기, 넓은 정각에서 투호하기, 대자리 깔고 바둑두기, 연꽃 구경하기, 숲속 매미소리 듣기, 비오는 날 한시짓기, 달밤에 탁족하기다. ‘소서팔사(消暑八事)’에 나오는 다산의 피서법에 특별한 묘안은 없지만 더위로 흐트러지는 마음을 조용히 다스리는 선비의 정신이 있다. 옛 선비들은 피서방법으로 아예 책을 싸들고 유산(游山)을 떠나기도 했다. 산으로 놀러 가는 것은 탁족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렇다고 선비들이 산에서도 엄격한 법도만 지키지는 않았을 터이다. 무더위엔 바짓가랑이를 내리고 ‘풍즐거풍(風櫛擧風)을 했다. 풍즐거풍이란 인적 드믄 산을 찾아 상투를 풀어 산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고 아랫도리를 드러내어 볕에 쬐는 것, 바람목욕이다.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시어 가운데 하나가 ‘고열(高熱)’이다. 요즘 말로 ‘무더위’로 옮길 수 있는데, 에어컨 ·선풍기가 없던 그 시절 무더위는 실로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특한 피서법이 생겼다. 숙종 때의 학자 윤증은 책읽기(披書)로 더위를 식혔고, 우복 정경세는 날씨가 무더우면 그때마다 문을 걸어잠그고 깊은 방안에 틀어박혀 앉아 더위를 이겨냈다. 사람들이 이를 비웃자 우복은 “서늘함은 조용한 가운데 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까?”라고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송규렴이라는 학자는 ‘상상 속의 피서’를 즐겼다.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정자 앞으로는 작은 연못을 만든다.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온종일 정자 난간에 기대어 더위를 식힌다. 날씨는 더워도 머리 속만은 상쾌했을 게 분명하다. 민간에서는 목물이 최고다. 무더위가 한창인 6월 보름인 유두(7월20일)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했다.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는 까닭은 해가 뜨는 동쪽이 양기(陽氣)가 왕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두(流頭)란 말도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나왔다. 등목도 빼놓을 수 없는 피서법이다.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두레박 물로 등목을 시켜주면 무더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낮에는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고, 밤에도 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삼복 중에 냉콩국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임병호 논설위원

대한제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 8월12일부터 1910년 10월22일까지 13년동안 존속하였던 조선 왕조의 국호다.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떠나 자주 독립국가를 표방한 것이 이같은 국호 변경이다. 처음 이 운동이 시작된 것은 고종21년(1884년) 급진개혁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에 의해서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을 폐하고 군주를 대군주, 전하를 폐하, 과인을 짐으로 바꿨으나 집권세력인 김옥균 등이 3일천하로 끝나 실패했다. 이로부터 10년 후 갑오경장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홍범14조’를 공포, 군왕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황제 지위로 올려 1896년 1월에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썼으나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반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칭제건원(稱帝建元)이 추진된 것은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1년만에 환궁한 1897년이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연합하여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하고 같은해 10월12일에는 고종이 문무백관을 거느린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세계 만방에 새로운 국호를 선포한 것이 대한제국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의욕뿐, 힘이 없는 제국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 일본은 마침내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두어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뻗쳤다. 경술국치인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라는 것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36년동안 받게 되었다. 이날이 순종(純宗) 융희(隆熙) 4년인 1910년 8월22일이다. 지난 24일 창덕궁 낙선재 빈소를 떠나 남양주시 영원(英園)에 안장된 이구(李玖)씨는 이런 비운의 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이다. 그의 아버지 이은(李垠) 공은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동생으로 황세자였다. 그러므로 황세손에겐 순종이 큰아버지가 된다. 힘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힘없는 나라가 생존할 수 없는 건 아직도 변함이 없는 동서고금의 이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을 보내고 갖는 이런 소회가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임양은 주필

승리투수

야구에서 투수는 수비의 최첨병이다. 전진 내야수이기도 하다. 이래서 승리투수의 명예는 다양하다. 완투승은 9회 끝까지 선발의 자릴 지킨 승리투수의 명예다. 안타는 내주었어도 득점은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완봉승의 명예도 있다. 무안타 무실점의 노히트 노런도 있다. 안타는 고사하고 볼넷 한개도 내주지 않아 진루를 허락하지 않은 퍼펙트 게임도 있다. 승리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볼의 제구력이 좋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구력이 좋아도 게임마다 안타를 내주지 않거나 적게 내주는 투수는 있을 수 없다. 안타성 타구를 내·외야수들이 절묘하게 잡아낼 때 투수는 신이 난다. 반대로 내·외야수들이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를 땐 투수는 맥이 빠진다. 투수가 아무리 공을 잘 던져도 팀의 타선이 터지 지 않으면 승리투수가 될 수 없다. 지난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던진 박찬호선수(32·텍사스)가 이러했다. 8회 1사까지 6안타 볼넷 5개로 1점만 내주는 올 시즌 최고의 피칭을 보였다. 그러나 강판 때까지 팀의 타선 침묵으로 승패없이 물러났다. 반대로 많이 얻어 맞고도 타선이 집중 폭발해 승리투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야구를 개인 위주의 경기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야구 역시 조화가 요구되는 완벽한 팀 플레이다. 수비에선 투수와 내·외야수, 야수끼리의 호흡이 맞아야 공격이 효과적으로 제어된다. 공격에서는 적시타, 집중안타를 내야할 땐 내야 수비를 무너뜨리는 득점이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인간의 사회생활도 야구 게임과 같다. 공격과 수비에서 포지션마다 최선을 다하는 팀 플레이가 얼마나 완벽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난다. 가정도 그렇고, 직장단체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관공서도 그렇고, 정부 경영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잘 안풀리는 이유를 서로가 상대 포지션에 떠넘기는 난조는 꼭 지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승리투수는 견인의 역할 일 뿐,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공수의 조화다./임양은 주필

냉소(Cynical)

개인의 정신 자유를 추구했다. 세속적 번뇌를 피했다. 무욕의 자연생활을 탐닉했다. 이를 위해 사회적 습관을 무시하고 문화적 생활을 경멸했다. 그리스의 퀴닉(Kynik)학파가 이랬다. 견유(犬儒)학파라고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가 아류를 이룬 고대 철학의 한 계파다. 퀴닉학파의 Kynik은 그리스어로 개를 뜻하는 ‘Kyon’이 어원이다. 라틴어로는 Cyon에서 Cynic로 옮겨져 개 같은 사람으로 비유된다. 견유학파의 ‘견유’는 개처럼 최저 생활의 자연에 유유자적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Cynic은 퀴닉학파의 대명사가 되고 냉소적 의미를 지닌 ‘시니컬’(Cynical)이란 말이 나온 유래가 됐다. 알렉산더 대왕이 물통을 집삼은 한 현자(賢者)를 찾아가 “소망이 뭐냐?”고 물었더니 일광욕하는 햇빛을 가리키며 “비켜 달라”고 했다는 유명한 고사를 남긴 디오게네스(BC 400~323)가 대표적인 견유학파다. 디오게네스는 옷 한 벌에 지팡이 한 자루, 괴나리 봇짐 외엔 지닌 것이 없는 생활로 평생을 보냈다. 현대판 퀴닉학파라 할 냉소주의자들이 많다. 이를테면 노숙자들도 냉소주의자들이다. 심각한 것은 지식층의 냉소주의다. 신문도 안보고 텔레비전도 안본다고 한다. 술 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시국담 같은 것에도 외면한다. “그까짓 것 듣고 보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술맛 떨어지는 소리 치우고 술이나 마시자”고 한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고 시국 얘길 입에 침이 마르게 한다고 해서 세상의 광기(狂氣)가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잖냐고 한다. 어떤 중소기업인은 골치 아픈 기업 경영을 정리하고 남은 재산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보낸다. 그 역시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냉소주의 생활이 미덕이었는 지 모르지만 현대 생활에선 그렇지 않다. 냉소적 묵과는 광기를 묵인하는 것이 된다. 무중력 사회가 된다. 사회에 이토록 좌절감을 가져오게 한 것이 이 정권이다. 신바람 나는 것은 정권 계층의 사람들 뿐이다. 가슴 시리도록 밀려드는 냉소감을 극복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은 후대를 위해서다./임양은 주필

‘그린 매거진’

농촌진흥청이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그린 매거진(Green Magazine)’은 기획특집, 소비자시대, 클로즈업, 핫이슈 등 큰 테마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농업이 나갈 길과 크고 작은 농업상식을 안내하는 농업교양지다. 통권 제16호가 최근에 나왔다. 매호마다 읽을거리가 꽤 많다. 그 중 ‘농사속담’은 농업에 관한 상식과 함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일러줘 유익하고 재미있다. 여름 농사철과 관련된 이런 속담들이 있다. 옛날 시골의 초가지붕에는 박 덩굴을 올려 키우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박 덩굴이 지붕 용마루를 넘을 때쯤이면 8월 하순경이 되는데 이 시기에는 보리, 감자 등 식량이 거의 떨어지고 올 벼나 고구마는 아직 수확하지 못하는 시기여서 사촌집이라 해도 가기가 조심스러웠다. ‘박 덩굴이 용마루를 넘으면 사촌집에도 가지마라’는 속담은 그래서 생겼다. 곤충들은 선천적으로 자연조건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다. 곤충 중 몸이 작아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반딧불이가 높이 날면 바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딧불이 높이 날면 바람이 없다’는 속담에 담긴 뜻이다. 또 곤충은 기상 환경에 매우 민감하다. 날씨가 맑을 징조를 느끼면 집을 짓고 먹이를 잡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곤충이 활동을 개시하면 날씨가 곧 개일 징조라는 것을 예감하여 ‘장마 때 거미집 지으면 날 든다’고 하였다. ‘풋벼 자랑과 딸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도 있다. 벼를 키우면서 논에 거름을 많이 주면 벼 잎색이 짙어 벼가 마치 잘 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 가을에 수확을 해 보면 쭉정이가 많아 수량이 떨어진다. 비료에 너무 욕심을 내지 말라고 경계하는 뜻이다. 여름철과 가을철에 벼가 자라는 논은 곤충들의 서식처라 할 수 있다. 논 주변을 날아 다니는 잠자리는 각종 해충을 잡아먹고 산다. 잠자리는 해충의 천적이다. 때문에 잠자리를 잡아버리면 해충의 수가 많아져 결국 농작물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잠자리 잡으면 벼이삭 삭는다’의 유래다. 요즘 들판에 나가보면 논에서 벼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잠자리들이 해충을 잡아 먹는 지 벼포기 위를 날아다닌다. 그 모습이 보기에 좋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나라 농업과학의 심장으로 경기도 수원의 상징인 농촌진흥청과 연구기관들이 수도권 공공기관 이전 계획에 따라 수원을 모두 떠난다니 못내 서운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소년 자폭단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최근 몇년새 늘기는 했지만, 자살폭탄테러는 이슬람 교리와는 상관 없다. 역사상으로는 13세기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을 침공한 유럽 성전기사단의 선박 자폭 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2차 세계대전 때 특수제작된 비행기에 로켓탄 ‘오카’를 싣고 군함에 자폭 공격을 감행한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가 원조로 꼽힌다. 이후 일본 적군파 등에게 사용되다가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하마스와 지하드 등에 이르러 중동분쟁의 고질적인 이슈가 됐다. 스리랑카 반군 ‘타밀 엘람 호랑이’와 러시아 체첸공화국 분리독립운동세력도 자폭테러를 자주 사용해 왔다. 특히 2003년 미군에 점령된 이라크에서는 자폭테러가 대규모화·일상화됐다. 자폭테러가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는 순교자로 미화하는 종교적 동기부여와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되는 선전효과다. 하지만 여성과 어린이들을 동원한 자폭 공격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게릴라 집단의 전투 방식인 자살공격은 정부군과 정면 승부하면 밀릴 수 밖에 없다는 ‘무력 대비칭’과 그로 인한 좌절감, 패배감의 발로이지만 영웅심도 적지 않다. 그렇다해도 자폭테러범의 30~40%가 여성이고, 18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폭테러에 동원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2002년 팔레스타인에서는 12, 13, 14세 소년들로 구성된 자폭테러단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감행, 세계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지난 2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에도 15, 16세 소년들이 이스라엘 나블루스 부근 하와라에서 폭탄을 허리띠에 두르고 자폭테러를 일으켰다. 무장단체들은 투쟁전선의 ‘어린 순교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어린이들이 자폭테러에 동원되는 줄도 모른 채 시한폭탄 운반을 지시받는 경우가 많다는 여론이다. 검문검색을 피하기 쉬운 여성이나 특히 어린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시켜 자폭테러 현장에 보내면서 ‘어린 전사’라고 추켜 세우는 게 테러집단이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자폭 공격을 ‘최대의 헌신’이라 여기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21세기 ‘인류의 적’ 이다. 적은 소탕해야 한다./임병호 논설위원

‘선거고시’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 합격하면 5급 공무원 대우를 받는 이른바 ‘3시(試)’에 더해 ‘선거 고시’란 말이 생겨 났다. 지난 6월 개정된 지방자치법 및 선거법으로 그동안 무급 명예직이었던 광역·기초의회 의원이 유급직으로 바뀌면서부터다. 광역의원은 수준에 따라 2·3급, 기초의원은 4·5급 대우를 받는다는 데서 유래한 신종 유행어다. 연봉 면에서 기초의원은 5천만~6천만원, 광역의원은 7천만~8천만원의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에 국회의원과 별 차이가 없다. ‘선거고시’ 열풍은 좁게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과 인근 각 정당 당사는 물론 넓게는 지방 구석구석까지 휘몰아치고 있다. 국회의원 보좌관, 비서관 등 1천500여명의 참모진이 포진한 국회의원 회관은 더욱 뜨겁다. 국회의원 대신 지역구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지역 담당 보좌관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 ‘선거고시’에서는 세대교체·세력교체·젠더(성)교체라는 3가지 측면에서의 질적 변화가 예상된다. 시대정신의 변화도 한몫하고 있지만 이를 반영한 선거제도의 변화가 직접적인 이유이다. 현역 기초의원 중 45세 미만은 818명, 46세 이상은 2천667명으로 중·노년층이 76.5%를 차지한다. 대체로 재력있는 지역유지 중심이다. 그러나 앞으로 연봉 5천만~8천만원 상당을 받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다른 직업이 없더라도 지방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층이 눈독을 들일만하다. 돈받는 젊은 직업정치인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영남권은 한나라당이, 호남권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독식하는 현재 지방의원들의 세력판도도 변화가 예상된다. 기존의 광역의원 외에 기초의원에도 중·대선거구제도가 도입된 건 바람직한 일이다. 여성의 대거 진출은 특히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기초의원의 경우 전체 정원(현재 3천485명)의 10%를 여성에 할당토록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광역의원은 10% 할당제가 이미 시행중이다. 중대선거구제에 따라 여성 출마자도 당공천만 받으면 ‘고시 합격(당선)’ 가능성이 많다. 1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선거고시 수험생’들의 착실한 민주주의 공부와 올바른 정진을 당부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조종사 파업

억대 연봉을 받는다 해서 노동 쟁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너무 한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간헐적으로 실시하는 음주 및 약물검사를 하지말고, 비행기를 그냥 타고가도 비행시간에 포함시켜 주고, 외국인 조종사 채용시엔 노조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들의 쟁의 내용엔 이런 요구들이 들어있다. 사측이 들어주지 않는다며 전면파업에 나서 사흘을 넘기고 나흘 째 접어든다. 휴가철을 맞아 비행기를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전자제품, 섬유, 의약품 등 수출에 항공편을 이용하는 산업계가 타격을 받고 있어 걱정이다. 특히 휴대전화, 모니터, 컴퓨터 부품, 컬러 텔레비전, 반도체 등 전자업계는 더 한다. LCD모니터, PDP 등 전자제품 180t 분량의 수출이 이미 차질을 빚었다. 이대로 가면 정밀기계 부품, 고급 패션의류, 농수산물도 타격이 미칠 것으로 보고 업계는 부심하고 있다. 수출은 경제의 해외 전선이다. 경쟁이 치열하다. 물론 상품의 품질도 좋아야하지만 신용이 생명이다. 약속된 물건을 약속된 납기에 대지 못하면 해외바이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신뢰가 떨어지면 경쟁국이 끼어들어 거래선이 바뀌면서 거래가 중단된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들의 파업은 법률적 가치나 사회적 도덕성에 비추어 아무래도 일치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잖아도 나라 경제가 어렵다. 민생도 어렵다. 이런 실정에서 수출에 지장을 주고 민생에 비웃음을 사는 장기 파업은 다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얼마전에 30대 보라매 4명이 서해에서 숨졌다. 무려 30년이 된 전투기를 타고 훈련 중이던 두 대가 잇따라 떨어지는 비운을 당했다. 이들이 봉급말고 받은 비행수당은 고작 월 80만원이다. 민항 조종사들의 상당수가 군 출신인 것으로 안다. 선배로서 같은 항공인으로서 느낀 바가 없지않았을 것이다. 좋은 조건에서 아주 좋은 대우를 받는 민항조종사들이 벌이는 파업은 생소하게만 들린다. 아흔아홉 섬을 받으면서 백 섬을 채우기 위해 한 섬을 탐내는 것과 같아 보인다./ 임양은 주필

중국의 공룡화

중국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에 진출한 국내 섬유업체가 최근 줄줄이 퇴출당했다. 중국 섬유업계의 경쟁력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임금이 싸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간다. 중국은 더 이상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 아닌 강력한 경쟁국으로 떠올랐다. 중국의 위안화 환율 정책이 세계 경제의 향배를 가늠하는 변수로 작용될 정도로 경제규모 또한 공룡화 돼 간다. 올 성장률을 8% 선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륙 인구가 13억에 5대양 6대주 등 세계 도처에 있는 화교 인구가 7억으로 60억 인류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국제적 호감도 또한 높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조사한 결과 우방인 영국에서조차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65%로 미국의 55%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보도됐다. 프랑스도 58% 대 43%로 중국이 미국에 앞서고, 이슬람권 친미 나라인 터키·요르단에서도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게 나타났다. 영국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공식 초청했을 정도로 세계적 위상이 높아졌다. 경제 성장에 힘입은 부호계층이 급증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게 중국 사회의 큰 병폐가 되긴 됐다. 공산주의 혁명 이전 수준의 빈부 격차로 돌아갔지만 농경사회에서 같은 구조적 불평등의 불만은 별로 없다. 누구나 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장들이 많은 나라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속은 자본주의 사회가 된지 오래다. 자본주의를 하는 우리 나라가 오히려 중국보다 기업 규제가 더 심한 면이 많다. 중국에서 돈을 벌려고 밀항해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대로 더 가면 언젠간 국내에서 중국으로 돈 벌려고 가는 밀항자들이 있게 될지 모른다. 한 해가 다르게 변하는 중국의 발전상은 10년이면 한 세대 차이와 맞먹는다. 중국은 내심 한국을 만만하게 본다. 우리가 중국을 얕잡아 보는 것은 착각이다. 한국 경제는 어느 사이에 일본과 중국의 가운데 끼이게 됐다./임양은 주필

황 교수와 이의동 주민

지난 15일 가진 경기바이오센터 기공식을 평화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것은 황우석 서울대 교수 덕분이었다.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광교테크노밸리에 조성되는 경기바이오센터 기공식을 주민들은 원래 저지키로 했었다. “충분한 보상없이 일방적으로 개발하려 든다”는 것이 반대 이유다. 그러나 주민들은 황 교수가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공식이 열리는 경기도중소기업지원센터 정문을 120여명이 막고 시위를 벌이기로 했던 계획을 자진 취소했다. 나라의 명성을 드높인 세계적 과학자의 영예에 흠을 낼 수 없다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예전에 대학생 시위가 한창일 때다. 서울대 임종대 교수나 이기백 서강대 교수가 시위를 막으면 감히 스승을 밀어 제치고 교문을 뛰쳐 나가지 못했다. 두 교수는 체구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시위 학생들 앞에 딱 막고 서면 기세 등등했던 학생들도 그만 한 풀 꺾어진다. 가로 막고 서있는 스승의 위엄이 커보이기 때문이다. 그 위엄은 순전히 두 교수가 평소에 쌓아올린 높은 학문적 업적에 대한 외경심이었다. 임 교수는 경제학, 이 교수는 국사학의 태두로 평생 학문밖에 몰랐던 분들이다. 시위가 심했을 때도 학생들은 이토록 존경하는 교수 앞에선 여러말 안해도 꼼짝 못하고 스승으로 대접했던 것이다. 이의동 주민들의 깊은 사려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기공식을 막고 시위를 벌였으면 황 교수가 겪은 변으로 외신에 잘못 보도될 수도 있었던 일이다. 이를 막을 수 있었던 황 교수의 권위도 고맙지만, 그렇게 대접할 줄 알았던 이의동 주민들의 마음씨가 무척 고맙다. 이의동 주민들은 손자병법을 빌려 말하면 싸우지 않고 이긴 셈이다. 시위를 안벌이고도 벌인 것에 비할 바가 없는 큰 수확을 올렸다. 보상 관계가 잘 마무리되면 좋겠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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