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성향’ 따른 판단, ‘사안’ 따른 판단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매일,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선택의 순간마다 어떠한 기준에서 판단하고 선택을 하는지는 개개인 모두 다를 것이고, 선택의 결과 역시 고스란히 자신이 지게 된다. ▶몇 년 전 경기도청을 출입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도청에서 근무하던 A 고위 공무원은 공직사회에서 뛰어난 갈등조정 능력을 인정받은 공무원이었다. A 공무원과 티타임을 하던 중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일을 조정해야 할 때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하느냐”고 물었다. A 공무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누가 더 어려운가”. 어느 쪽이 더 절박하고 어려운 쪽인지, 어느 쪽이 더 사회적 약자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접근하면 답이 보인다고 말했다. 더 어려운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라고. ▶어떠한 분이 내게 물어왔다. “넌 보수냐, 진보냐”. 이어 내게 질책하듯 “네가 쓰는 기사를 보면 어느 날은 굉장히 보수 같고, 어느 날은 진보 같고, 왜 기자가 왔다갔다 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분에게 “난 기자인데, 내가 진보 성향이라고 해서 진보정당이 하는 일이 모두 옳고 보수정당이 하는 일이 모두 나쁘다고 기사를 쓰는 것은, 또 그 반대로 내가 보수 성향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수정당이 옳다라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 한 것 아니냐. 기사를 쓸 때는 자신의 성향을 떠나서 사안에 따라 잘한 것은 잘했다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줏대 없는, 정체성 없는 기자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성향’에 따른 판단을 하기보다는 ‘사안’에 따른 판단을 한 후 기사를 쓰는 것이 더 객관적이지 않은가. ▶6ㆍ13 지방선거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지방선거는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뽑아야 할 후보가 많다. 광역자치단체장, 기초자치단체장, 교육감, 도의원, 시의원… 집으로 오는 공보물도 두껍고, 유권자들이 투표장에서 받게 되는 투표용지도 많다. 이번 선거도 유권자들은 저마다 판단 기준을 갖고 후보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만큼은 유권자들이 자신의 ‘성향’만으로 투표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작은 선거일수록 성향이 아닌 후보를, 정책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정당이라는 지붕 속에 살짝 끼어들어 온 ‘터무니없는 공약을 제시한 후보’ㆍ‘우리 지역에 오히려 해가 되는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ㆍ‘이해하기 어려운 범죄경력을 갖고 있는 후보’ 등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번을 찍으면, 자격없는 후보가 4년간 금배지를 달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호의호식하게 된다. 이호준 사회부 차장

[지지대] 기-승-전-경제 침몰

며칠 전 한 지인과 소주 한잔하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년 전부터 기업 확장을 위해 사업 계획을 세웠는데 모두 포기했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그의 말끝은 “기업하기 어려워. 이젠 회사를 접어야 할 땐가 봐”였다. 경제 관련 관계자나 기업인을 만나 얘기를 해도 결론은 “경제가 힘들어”다.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해결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쳤다. 더욱이 북미회담을 앞두고 험악해진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전격적으로 이뤄진 북측의 통일각 2차 회담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이 같은 문 대통령의 파격과 반전의 롤러코스터 행보에 국민이 놀라움과 함께 환호했다. “북미회담은 예정대로 이뤄진다”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은 문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신뢰를 더욱 깊게 했다. 6ㆍ13지방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의 인기에 맞물려 민주당 선호도는 확고하다. 당내 후보들도 ‘민주당 = 당선’이라는 공식을 확신하고 있다.하지만 경제는 어떤가. 편의점을 운영하는 옆집 아저씨, 식당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 아주머니, 건설현장 근로자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기업들은 친노동정책에 몸을 사리고 자영업자들은 폐점을 고민하고 있다.한국경제가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국민은 불안해한다. 그나마 다행일까. 이 정부가 심각성을 인식했다. 가계소득동향 점검회의를 열고 정책 방향 재점검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이 밝혔듯이 경제정책에 긴 호흡이 필요하고 단기적 성과에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 증가속도가 둔화하고 하위 20%의 가계소득이 줄어 소득 분배가 악화했다.실업률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과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정책 기조를 갖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에 관한 거시 지표와 국민의 체감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 정부출범 1년 동안 경제정책을 어떻게 점검했는지 새삼 궁금하다. 김창학 경제부장

[지지대] 강백호의 말(言)

프로야구 2018시즌 3월은 강백호의 달이었다. 프로데뷔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매 경기 무서운 장타력을 뽐냈다. 개막전 이후 10경기를 모두 출장했다. 그랬던 그가 11번째 경기에 선발에서 제외됐다. 더구나 꼭 이겨야 할 넥센전이었다. 모두 예상 못한 결정이었다. 김진욱 KT 감독은 한 번 쉴 타이밍이라고 설명했다. 기자들이 강백호에게 물었다. ‘선발에서 제외된 소감이 어떤가’. 답변이 담담하면서 간단했다. “벤치에서 응원하다가 교체 출장을 준비하겠습니다.” ▶개막 이후 15경기에서 5홈런을 쳤다. 타율도 3할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28경기에서 홈런이 없었다. 타율은 2할 중반까지 떨어졌다. ‘슈퍼 루키’라던 수식어가 ‘위기의 남자’로 바뀌었다. 맘고생도 어지간했을 법하다. 슬럼프 탈출은 5월20일 경기였다. 6타수 5안타 4타점을 기록했다. 팀도 18대 3으로 대승했다. 그동안 부진에 대한 소감을 기자들이 물었다. 답변이 솔직하면서 투박했다. “생각 없이 스윙하던 애가 생각 있는 척하다가 자멸할 뻔했습니다.” ▶최근 그의 자리는 1번 타자다. 성적이 꽤 좋다. 27일에도 빛났다. LG와의 경기의 1번 타자였다. 1회 말 첫 타석에서 첫 공을 때렸다.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138m짜리 홈런이 됐다. 1번 타자, 첫 타석, 첫 공 홈런은 흔치 않다. 우리 프로 야구사에도 49번밖에 없다. 이 홈런을 신호탄으로 KT는 8대7 대역전극을 만들었다. 기자들이 1번 타자의 의미를 물었다. 답변이 당연하면서 뻔했다. “모르겠습니다. 타석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공격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스포츠 스타들의 인터뷰는 공통점이 있다. 한없이 겸손하고, 적당히 멋지고,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한다. 그러다 보니 묻는 기자도 선수의 답변을 대충 짐작한다. 하지만, 강백호는 다르다. 생각대로 말하고, 꾸밈없이 말하고, 느낌대로 말한다. 이상하면서 재미있게 들리는 게 그래서다. 선배 야구인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신인 선수 같지 않다.” 어쩌면 이게 요사이 19살짜리들의 언어일 수도 있다. 꾸미지 않고, 생각대로 말하는 이 시대 젊음 말이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치맥의 역습

인기리에 방송됐던 TV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는 전지현이 “눈 오는 날엔 치맥인데”라는 대사가 나온다. 드라마의 인기는 한국에서 인기를 끌던 치맥이 한류 열풍을 타고 중국 대륙으로 번지게 된 계기가 됐다.당시 중국엔 한 손에는 닭튀김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인증샷을 찍어 SNS나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치맥을 먹으러 한국으로 관광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2016년 인천 월미도에선 유커(遊客ㆍ중국인 관광객) 4천500여 명이 떠들썩한 ‘치맥 파티’를 벌였다. 하얀 탁자가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치킨 3천마리와 캔맥주 4천500개가 공수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치킨(Chicken)과 맥주(麥酒)를 함께 먹는 ‘치맥’은 이제 고유명사가 됐고, 한국인 음주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치맥 자체가 한류콘텐츠이고, 한국의 관광상품이다. 치맥을 테마로 한 축제, ‘치맥 페스티벌’이 열리는가 하면 그 축제가 해외로 수출돼 중국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치맥 열풍은 국내 치킨업체들의 해외시장 진출 교두보가 되기도 했다. 바야흐로 치맥의 계절이다. 더운 날씨에 더 잘 어울리는 치맥은 야구장에서, 공원에서, 여름밤 노천카페에서 언제 어디서나 즐겁다. 하지만 맛있는 치맥 속에 무서운 질병이 있었으니, ‘치맥의 역습’이다. 주로 중년 남성이 잘 걸린다고 여겼던 ‘통풍(痛風)’이 20~30대에서도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치킨에 맥주를 곁들이는 ‘치맥’ 열풍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기름진 닭튀김에 요산 수치를 높이는 퓨린을 함유한 맥주를 마시는 치맥은 통풍의 대표적인 위험인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통풍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12년 26만565명에서 2017년 39만5천154명으로 49% 증가했다. 환자의 90% 이상은 남성이다. 특히 2012년부터 2017년까지 20대 남성 환자가 크게 증가했다. 같은 기간 20대 남성 환자는 1만882명에서 1만9천842명으로 82% 늘어났다. 30대 남성 환자도 66% 증가했다. 통풍은 요산이라는 단백질 찌꺼기가 몸속에서 과잉 생산되는 등 농도가 높아지면서 관절이나 콩팥, 혈관 등에 달라붙어 생기는 대사성 질환이다. 주로 엄지발가락 부위가 매우 아프면서 뜨겁고 붉게 부어오르는 증상으로 시작한다. 평상시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 술을 마시면 발작처럼 통풍의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고 해서 통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치맥이 맛있다지만 통풍까지 걸려 고통을 겪는 일은 없어야겠다. 맥주도 술인지라 과하면 역시 좋지 않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낙태죄 폐지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가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금지를 규정한 헌법조항을 폐지키로 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낙태 허용을 위한 헌법 개정 여부를 놓고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찬성표가 66.4%, 반대표가 33.6% 나왔다. 유권자들은 낙태금지를 엄격하게 규정한 1983년 수정 헌법 제8조의 폐지 여부를 놓고 투표했다. 이 조항은 임신부와 태아에게 동등한 생존권을 부여하고 있다. 낙태를 할 경우 최대 14년형이 선고된다. 아일랜드는 낙태 완전 금지에서 벗어나 1983년 임신부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낙태를 허용했다. 원치않는 임신을 한 임신부들은 영국 등에서 ‘원정 낙태’를 해왔다. 낙태에 찬성 입장인 레오 바라드카르 총리는 투표결과에 대해,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용한 혁명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이번 국민투표로 아일랜드는 임신 12주 이내의 경우 본인의사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는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동참하게 된다. 아이슬란드는 임신 16주까지, 스웨덴은 18주까지, 네덜란드는 22주까지 낙태를 허용한다. 반면 유럽국가 중 몰타는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금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낙태죄 폐지 논란에 휩싸여있다. 여성가족부가 “여성의 기본권 중 건강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현행 낙태죄 조항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최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여가부는 “헌법과 국제규약에 따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 건강권은 기본권으로서 보장돼야 한다”며 “형법 제269조 제1항 및 제270조 제1항이 규정하는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이러한 기본권을 제약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형법 269조 1항은 ‘부녀가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70조는 ‘의사ㆍ한의사ㆍ조산사 등이 부녀의 촉탁을 받아 낙태한 때에는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고 돼있다. 때문에 원치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음성적으로 시술을 받고 있다. 2010년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한 해 16만8천738건의 낙태가 이뤄졌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연간 109만 5천건으로 추정했다. 낙태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정확한 집계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 형법과 달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 선진국은 임신중절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강간, 근친상간, 임산부의 생명·건강에 위협, 심각한 태아 손상의 경우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한 여성에 대한 처벌 조치를 없애도록 요청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죄가 폐지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KT 위즈 단장의 서약서

프로야구 KT 위즈 임종택 단장의 사무실에 가면 서약서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2018시즌 탈꼴찌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통감하고 야구단장 직에서 물러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이다. 이 서약서는 취임 2년 차인 임 단장이 시즌을 맞이하는 각오를 지난 1월 작성했단다. KT 위즈는 경기도민과 수원시민의 열망 속에 2013년 10구단으로 창단돼 2군리그를 거쳐 2015년 1군 무대에 데뷔했다.▶기대와 달리 KT는 세 차례 시즌에서 모두 꼴찌를 했다. 신생구단으로서의 엷은 선수층과 모기업 투자의 한계,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기존 구단들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즌엔 시범경기 1위와 정규시즌 초반 및 종반 호성적으로 올해를 기대케 했다. 구단 역시 올 시즌 ‘탈꼴찌’와 ‘5할 승률’을 목표로 세웠다. 88억원을 들여 거포 내야수 황재균을 영입했고, 신인 최대어 강백호와 겨울 이적시장서 금민철, 니퍼트 등 선발투수들을 보강했다. ▶시즌 초반 ‘홈런공장’ SK와 팀 홈런부문 1, 2위를 다퉜을 만큼 타선은 막강 화력을 자랑했다. 4월 중순까지 5할 승률을 유지하며 올 시즌 목표 도달 가능성을 기대케 했다. 하지만 마운드가 붕괴되고, 덩달아 타선도 침묵하면서 승률이 4할대로 떨어졌다. 순위 역시 꼴찌는 면하고 있지만 8위로 불안하다.▶팬들로서는 성적부진 이유 가운데 무엇보다 작전부재가 답답하기만 하다. 감독의 능력은 선수를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작전을 짜는 지략이 생명인데 KT에서는 그런 ‘묘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난 22일 KIA전에서는 4회나 남겨두고 추격 상황에서 간판 타자 2명을 빼는 납득하기 어려운 선수 교체로 ‘감독이 너무 일찍 경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자초하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다음날엔 여론의 뭇매를 맞은 탓인지 9회 대역전 드라마를 썼다. ▶절박하면 통한다. 프런트에서는 단장이 직을 걸고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도 더욱 절박함을 느껴야 한다. KT 프런트는 어느 해보다도 테이블에 좋은 재료들을 갖춰 놓았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탈꼴찌와 5할 승률 목표의 상을 차리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과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의 몫이다. 황선학 체육부장

[지지대] 이재명은 알고, 이재정은 모르고

6ㆍ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봤다. 이재정 아냐고. 예상보다 많은 엄마들이 안다고 했다. 의외였다. “동상이몽에 나왔잖아”, “이번에 도지사 후보됐는데”, “무상교복이랑 청년수당, 성남시장 아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엄마들, 이재명은 알고 이재정은 모르고 있었다. ▶유권자들 잘못이 크다. 경기 등 6개 지역을 대상으로 교육감에 적합한 후보를 물은 결과 유권자 절반 정도가 ‘모르겠다’고 답했다. 교육감 선거에 대한 무관심이 처음은 아닌 상황에서 이번에도 깜깜이 선거가 되풀이될 거라는 전망은 피하기 어렵다.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당선자의 평균 득표율은 유권자 대비 20%대 수준에 불과했다. 선거가 20일밖에 안 남았는데 “교육감 선거도 해요? 언제요? 누가 뽑아요?”라는 소리가 유권자 입에서 나온다. 유권자의 무관심이 올해 교육감 선거를 ‘역대급 깜깜이 선거’로 만들고 있다. ▶교육감 후보들도 잘못은 있다. 후보자들은 유권자의 무관심을 핑계 삼으며 진보냐 보수냐 진영논리 뒤에 꽁꽁 숨어 있다. 전문성을 입증할 정책과 공약을 내놓는 후보자들은 없다. 그나마 경기도교육감 예비후보들이 발표한 등하교 전용 스쿨버스 운행, 아침 간편 조식 전면제공, 초등 돌봄교실 야간 운영, 8대 테마별 현장체험교육 등에는 포퓰리즘적, 급진적 냄새만 있고 그 어디에도 학생과 교사의 목소리는 담겨 있지 않다. 예산도 빠졌다. ▶도내 한 유치원에서 원생들을 대상으로 인기투표를 했다. 교사들은 표심을 얻기 위해 장난감과 아이스크림을 쏘겠다고 했고 아이들도 환호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비행기를 태워 주겠다는 A 선생님이 1등을 했다. 다음 날부터 A 선생님은 교실, 화장실, 계단 등에서 5~7세 원생 300여 명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안아주면서 비행기를 태워주었다고 한다. 한동안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셔 고생한 A 선생님은 이후 아이들에게 ‘비행기 선생님’으로 불렸다. 아이들도 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말이다. 경기도 엄마들이여! 이재정은 몰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비행기를 태워줄 교육감 후보가 누구인지는 꼭 알아야 한다. 강현숙 사회부 차장

[지지대] 파전 괴담

‘파전 괴담’이란 게 있다. 거의 모든 대학에 전해온다. 얘기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축제 때 주점을 했다. 손님이 많아 대박이었다. 준비해 놓은 파가 동났다. 누군가 기막힌 수를 냈다. 캠퍼스에 널린 풀을 뜯었다. 이 풀을 파 대신 넣고 전을 부쳤다. 술 취한 학생들은 모르고 먹더라.’ 설마 그 억센 풀을 모르고 먹었을까. 그래도 화자(話者)마다 ‘내 얘긴 진짜’라고 우긴다. 그게 ‘캠퍼스 파전’의 위상이다. 축제를 상징하는 주점(酒店) 문화다. ▶‘홍어 괴담’도 있다. 홍어 무침에 얽힌 얘기다. 파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안주다. 언뜻 대학 축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있었다. ‘호남향우회’ ‘목포동문회’가 주로 취급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이었다. 이 얘기도 대게 비슷하다. ‘주점에서 홍어 무침을 팔았다. 축제에서 가장 비싼 안주였다. 그런데 홍어는 없었다. 가오리였다. 가오리로 만든 ‘홍탁(홍어 탁주)’이었다.’ 이 괴담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홍어라 속인 가오리였다. 축제라서 용서됐다. ▶‘써클’이라 불리던 시절. 대학축제는 회원들의 대목이었다. 몇 달치 써클 운영비를 벌 수 있었다. 주점 부스를 선정할 때부터 치열했다. 엄정한 선발 절차를 거쳤다. 자리를 지키려는 ‘목’ 경쟁도 치열했다. 며칠 전부터 금줄을 쳐 놓고 지키기도 했다. 요즘의 ‘동아리’ 세대도 같은 모양이다. 30년 후배쯤 되는 아들이 자랑했다. 주점으로 돈을 많이 벌었단다. 그러면서 ‘파전 괴담’을 말했다.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줬다. ▶그랬던 주점이 축제에서 사라졌다. 정부 차원에서 내려진 ‘금주령’이다. 엄격히 보면 ‘영업 금지령’이다. 학생에게 주류 판매 허가가 없다는 이유다. 8년 전 해석된 규정이다. 올 들어 엄하게 적용되고 있다. 지난 1일 국세청과 교육부가 ‘주류 판매업 면허 없이 주점을 운영할 시 조세법 위반’이라는 공문을 보내면서다. 캠퍼스에서 축제 주점이 일시에 사라졌다. 자연스레 술도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도 사라졌다. 축제 캠퍼스가 텅 비었다. ▶대신 주변 상가들은 신났다. 본보 기자들이 둘러봤다. 수원 성균관대 옆 먹자골목이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자리를 잡기 어렵다. 상인들도 인정한다. “전년보다 매출이 30% 정도 느는 등 예기치 않게 상권 활성화로 이어졌다.” 장사가 잘된다니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씁쓸하다. 왠지 학생들에게서 낭만을 빼앗은 대가로 보인다. 취직도 어렵고, 등록금도 비싸고…. 고민에 찌든 대학생들이다. 굳이 영업 허가권을 따졌어야 했을까. ‘파전 괴담’과 ‘홍어 괴담’의 추억이라도 내버려둘 걸 그랬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폐 끼치지 마라”

21일자 중앙 일간지에 크지 않게 부음 광고가 실렸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20일 별세했다는 소식이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차분하고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습니다. 가족 외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합니다. 생전 자신으로 인해 번거로움을 끼치고 싶지 않아했던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라는 내용이다. 구 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도 유가족은 이 같은 안내문을 내붙였다. 구 회장의 장례식장엔 조화가 6개뿐이었다고 한다. 대기업 회장 등이 보낸 조화가 여럿 배달됐지만 유족이 정중히 돌려보낸 것이다. 장례는 3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재계 인사 장례가 회사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러지는 것은 이례적이다. 구 회장은 생전에 시간과 돈 낭비가 많은 장례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 강했다. 이에 가족들은 “남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하고 간소하게 지내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른 것이다. 향년 73세로 타계한 구 회장은 대기업 오너였지만 격식을 차리지 않는 소탈한 성품의 경영자였다. 권위주의와 담을 쌓고, 검소한 이웃 아저씨같은 모습으로 주변을 배려했다. 그는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휴일에 지인의 경조사 등 개인적인 일에 비서없이 혼자 다녔고, 공식 행사나 출장 때도 수행원 한 명만을 대동했다. 자녀의 혼례는 작은 결혼식으로 치렀다. 1년간 투병하면서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택했다. 또 간소하고 조용한 장례에 화려한 봉분 대신 화장을 원했다. 구 회장의 유골은 그가 생전에 공들여 가꾼 경기도 광주의 화담숲에 묻힐 예정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수목장이다. ‘편법ㆍ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 하겠다’ ‘국민이나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면 (기업은) 영속할 수 없다’ ‘세상이 각박해졌어도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義人)에게 기업은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실천에 옮긴 구 회장은 ‘흔치 않게’ 존경받는 대기업 오너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제대로 실천한 기업인이다. 재계의 탈법과 갑질 등 비정상적인 행위에 반기업 정서가 팽배해 있는 한국사회, 구 회장의 삶이 다른 대기업 오너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면 좋겠지만, 최소한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는 메시지만이라도 가슴에 새기고 실천했음 좋겠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선거범죄의 진화

대한민국이 민주선거 제도를 도입한 지 지난 10일로 70년을 맞았다. 1948년 5월10일 유엔 감독 아래 ‘제헌(制憲)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초대 의원 200명을 선출했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그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했다.제헌 의회 구성 이후 지금까지 19번의 대통령 선거와 20번의 총선, 6번의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를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고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것이다. 제헌의원 선거가 치러진 5월10일은 ‘유권자의 날’로 정해졌다. 선거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초창기 부정선거와 관권(官權)선거가 판을 쳤다.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이 자행된 1960년 3·15 대통령 선거가 대표적이다.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이 일로 공정한 선거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돼 1963년 중앙선관위가 출범했다. 부정선거라는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이다. 하지만 과열·혼탁 선거는 여전하다. 선관위의 불법 선거운동 단속ㆍ조사에 맞서 선거 범죄의 양상도 진화하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막걸리·고무신 선거’로 불린 금품·향응 제공이 선거 범죄의 주를 이뤘다. 이후 유권자가 향응·선물을 받으면 그 액수의 최대 50배까지 과태료를 물도록 해 처벌을 강화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오프라인상의 불법 선거는 줄었지만, 온라인상의 불법과 편법이 새로운 문제로 부상했다. 2012년 국정원 댓글 파문을 거쳐 최근엔 ‘드루킹 댓글 조작’까지 벌어졌다. 허위사실 공표, 가짜뉴스 등 사이버상의 여론 조작 방지가 새로운 과제가 된 것이다. 검찰은 ‘가짜뉴스 전담팀’까지 만들었다. 6ㆍ13 지방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선거사범이 늘었다. 검찰에 따르면 지난 9일 기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된 선거사범이 1천134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2010년 제5회 지방선거(727명)와 2014년 제6회 지방선거(865명) 같은 시기(D-35일)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지방선거의 경우 대선이나 총선에 비해 출마자가 많고 정치신인도 많아 선거사범이 많은 편이다. 입건 사례별로 살펴보면 금품선거 235건(20.7%), 거짓말선거 384건(33.9%), 공무원 선거개입 53건(4.7%), 여론조사 조작 89건(7.8%), 부정 경선운동 21건(1.9%), 기타 352건(31.0%) 등이다. 선거가 존재하는 한 선거 범죄는 더 교묘하게 진화할 것이다. 시대 상황따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수원 떠나는 효자기업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위치한 수원산업단지는 수원의 유일한 산업단지다. 지난 2006년 1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3단지 조성까지 완료됐다.1~3단지에 반도체를 비롯해 전기ㆍ전자, 기계, 금속 등 다양한 업종의 650여 기업이 입주, 1만 5천여 명이 몸담고 있는 명실상부 대규모 산업단지다. 단지가 잘 꾸려지다 보니 다른 지역 기업들이 이곳으로 터전을 옮기기도 했다. 수원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런 수원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의 움직임이 요즘 심상치 않다. 수원을 떠나 화성과 용인, 오산 등 인근 지역으로 본사나 공장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더는 공장 신ㆍ증설이 어려워지면서다. 반도체 업체인 A업체는 본사를 비롯해 2공장과 3공장을 산단 내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업체는 추가 공장 증설이 필요하지만, 포화상태인 산단 내에서 증설이 어렵자 오산에 부지를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체는 추가 공장만 오산에 세울지, 아예 모든 사업장을 이전할지 검토 중이라고 한다. 상장기업이 수원을 떠나면 산단은 물론 수원시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게 산단 관계자들의 우려 섞인 말이다. 또 다른 제조업체인 B업체도 최근 화성 동탄에 추가로 부지를 사들였다. 증설하는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다. 이뿐 아니라 여러 기업이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 기업이 수원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산단이 포화를 이룬데다 주변에 배후단지가 없다는 게 크다. 주변 농지를 알아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토지매입비는 기업인들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껑충 뛰었다. 사정이 이렇지만, 수원시의 산업단지 4단지에 대한 계획은 아직 없다. 도시관리계획상 산업단지는 일반공업지역으로 분류되는데, 공장총량제로 묶인 탓에 추가로 개발가용지를 찾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를 비롯한 많은 지자체들이 고용창출과 지방세수 확보를 위해 공격적으로 기업 유치전에 뛰어들고 있다. 이제는 수원시와 산업단지 입주 기업, 지역 경제계 모두가 정확한 진단을 해보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하루빨리 대안을 찾지 않으면 줄줄이 수원을 빠져나가는 기업을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혁준 경제부 차장

[지지대] 약속과 협의 이행

인천경기기자협회와 경기언론인클럽은 지난 3월29일 회의를 통해 4월30일까지 회원사 여론조사 결과 5% 이상의 지지율을 얻은 후보자를 대상으로 초청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다.지난 3월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예비후보를 비롯해 전해철 의원, 양기대 전 광명시장, 남경필 자유한국당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t-broad 수원방송과 전화 통화를 통해 일정을 조율했다.각 후보 측 대변인 또는 일정 비서관은 모두 5월15일 오후 2시 일정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각 후보에게 최종 통보된 이날이 3월29일이다. 지난 4월30일 이재명 예비후보와 남경필 예비후보가 최종 참석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이재명 예비후보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날짜를 변경하거나 시간을 4시로 늦춰 달라는 것이다.회원사와 논의해 보겠다고 했다. 일부 언론사는 4시면 강판 시간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또 일부는 한 달 이상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일정을 바꿔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9개 회원사 지회장들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 차후 일정을 조율하기 어려우니 토론회를 취소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이재명 예비후보 측에 토론회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통보했다. 그날이 5월2일이다. 다음날 이재명 예비후보 측은 일정을 오후 3시로 조정할 테니 토론회를 개최하자고 부탁했다. t-broad 수원방송과 경기언론인클럽에 가능하냐고 물었다. 최소 오후 2시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방송 주관사는 카메라ㆍ오디오 테스트, 방송 화장 등 최소 30분은 필요하다고 했다. 이재명 예비후보 측은 아슬아슬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이재명 예비후보 측에 간단한 사과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약속 파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회원사와 남경필 예비후보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10일 대본이 완성되고 각 예비후보자 측에 메일을 발송했다. 지난 11일 이재명 예비후보 측으로부터 편향된 질문 탓에 토론회에 불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협회 사무국장과 협회장은 캠프 공보국장에게 수정 가능하니 토론회 참석해 달라고 했다. 방송대본의 구체적 수정 내용을 문서로 보내면 검토해 수정하겠다고 했다. 공보국장은 무슨 말인지 안다고 했다.협회는 이재명 예비후보 측과 협의를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12일 여론조사 50% 이상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경기도지사 당선 유력 후보자로부터 수정 문서는 안 오고 불참 공문이 왔다. 이재명 예비후보의 약속과 협의 이행 부분이 많이 아쉽다.최원재 문화부장

[지지대] 이승우 걱정

질주는 하프 라인에서 시작됐다. 노란 운동복 일본 선수들이 뒤를 따랐다. 붉은 운동복 한국 선수는 따라잡히지 않았다. 달려드는 골키퍼까지 제쳤다. 텅 빈 골문으로 공은 빨려 들어갔다. 뒤쫓아온 일본 선수 3명이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축구장 절반이 넘는 60m를 몰고 들어간 드리블이었다. 일본 축구에는 최악의 모욕적인 영상으로 남았을 게 틀림없다. 한국 축구에는 한일전 역사에 남을 최고의 영상이다. 다들 ‘한국의 메시’라고 불렀다. ▶이승우(헬라스 베로나 FC)였다. 2014년 ‘사건’이었으니 16살 때다. 그가 월드컵 국가대표에 뽑혔다. 당시 감독이던 신태용 현 감독이 그를 선택했다. 1998년생이니까 올해로 만 19세다. 신예 선수로는 황희찬(22)도 있다. 잘츠부르크에서 활약 중인 공격수다. 하지만, 언론은 이승우를 주목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최연소’ ‘막내’라는 형용사 때문이다. 이번이 최종 선발은 아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이승우의 러시아행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언론 생리가 그렇다. ‘최연소’는 구미 당기는 소재다. 과거에도 월드컵 출전을 앞둘 때면 그랬었다. 가장 흥분했던 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다. 차범근 당시 감독이 이동국과 고종수를 선발했다. 둘 다 축구 천재 소리를 듣던 19세였다. 언론은 둘 중에도 막내를 구별했다. 6개월 빠른 이동국(만 19세 2개월)에게 조명을 맞췄다. 공교롭게 그 대회 결과는 참담했다. 멕시코(1대 3), 네덜란드(0대5)에 졌고, 대회 중에 차 감독이 교체됐다. ▶스포츠에서 현재와 미래는 공존하기 어렵다. 팬들이 그러지 않는다. 현재에 만족하면 현재에 환호한다. 그게 안 될 때 미래를 기대한다. 이승우에 대한 기대도 그런 측면이 있다.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를 듣는 대표팀이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실망이 컸다. 여기에 본선 대진운까지 나쁘다. 독일, 멕시코, 스웨덴과 같은 조다. 그래서 많은 팬이 우려하면서도 전망하는 게 예선 탈락이다. ‘19세 5개월’ 이승우는 그래서 더 주목되는 것이다. ▶이승우가 아주 특별한 선수임은 틀림없다. 한일전 ‘60m 폭풍 드리블’은 다시 못 볼 명장면이다. 하지만 ‘19세 5개월’이란 형용사가 결과를 만드는 건 아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국가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여야 한다. ‘미래 기대’도, ‘과거 명성’도 아니다. 오로지 ‘현재 실력’이어야 한다. 2018년 6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러시아 월드컵 국가대표다. 이승우가 그런 선수로 입증되길 많은 국민이 고대한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가면 집회

매년 11월5일이면 영국 전역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린다. ‘가이 포크스 데이(Guy Fawkes Day)’라고 불리는 이 날은 가이 포크스가 1605년 11월5일 의회 의사당을 폭파시켜 잉글랜드의 왕과 대신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화약음모사건(gun powder plot)’이 실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당시 왕실에선 왕의 무사함을 기뻐하며 불꽃놀이를 벌이도록 했으나, 훗날 많은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의미로 불꽃놀이를 벌였다. 이날 어른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무리 지어 행진한다. 혹자는 가이 포크스를 조롱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혹자는 또 다른 가이 포크스가 되기 위해 가면을 쓴다. 그렇게 11월5일은 신ㆍ구교도 모두가 즐기는 축제일이 됐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유명해진 것은 2006년 동명만화를 각색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덕분이다. 제3차 세계대전 후인 2040년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주인공 브이(V)는 사회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정권에 대항해 혁명을 꿈꾼다. 이후 하얀 얼굴에 올라간 입꼬리, 역 팔자 콧수염이 그려진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의 아이콘이 됐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인터넷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가 자신들의 로고이자 상징처럼 사용하면서 ‘익명’을 의미하는 도구로도 쓰이고 있다. 국내에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 처음 등장했고, 2011년 뉴욕의 월가 점령 시위 때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돼 눈길을 끌었다. 이제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과 익명의 상징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시위와 집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이 포크스 가면이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다시 등장했다. 4일과 12일 두 차례 열린 촛불집회에 대한항공 직원들이 사측의 참여자 색출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가면을 쓰고 참석한 것이다. 재벌에 대한 직원들의 저항 집회에서 신분 노출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가이 포크스 가면이 사용된 사례는 처음일 것이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벤데타 가면’으로도 불린다. 벤데타는 스페인어로 ‘피의 복수’라는 뜻이지만 대한항공 직원들은, 지금은 희생자(Victim)지만 우리의 목소리(Voice)로 승리(Victory)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사주 일가의 갑질과 횡포에 상처를 입은 이들이 얼굴을 내놓고 당당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회사, 사회 분위기가 직원들에게 가면을 씌웠다. 이들이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건지, 가면이 필요없는 날은 언제쯤 올까.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축하받지 못하는 ‘스승의 날’

지난해 5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인 A교사는 수업시간에 떠드는 남학생에게 주의를 줬다가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윗니에 금이 갔다. 당황한 A교사가 도움을 청하려고 내선 전화기를 들자 학생은 전화기 코드를 뽑아 내팽개쳤다. 하지만 학생 어머니는 A교사 때문에 아들이 계속 스트레스를 받다 벌어진 일이라며 아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최근 A교사와 같은 교권 침해 사례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해 교권 침해 상담 건수는 508건으로 10년 전인 2007년(204건)과 비교해 2.5배 증가했다. 지난해 교권 침해 중 학부모에 의한 사례가 267건으로 절반을 넘었다. 학생이 교권 침해한 경우는 60건이었다. 주로 교사에게 폭언·욕설을 하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형태였다. 교사를 때리거나 성희롱한 사례도 있었다. 학생이 교사에게 폭언·폭행·성희롱 등을 해 교육 활동을 침해하면 심리치료 이수, 봉사, 출석 정지, 퇴학 처분 등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무 교육 대상인 초등학생·중학생은 퇴학시킬 수 없고, 교권 침해를 한 학생을 전학시키거나 학급을 바꾸도록 하는 법령은 없다. 피해 교원이 자발적으로 다른 학교로 옮겨 가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그나마 학생이 교권 침해를 하면 징계라도 할 수 있지만 학부모에 의한 피해는 적극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임금과 스승, 아버지는 같은 반열이라는 뜻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나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은 옛말이 됐다. 스승을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다.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이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이기도 하다. 정부가 스승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되새기기 위해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것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야말로 영원한 스승이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한 송이도 드릴 수가 없다. 2016년 9월부터 시행된 청탁금지법(김영란법)에 걸리기 때문이다. 대학가에선 카네이션 대신 ‘감사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초중고교에선 논란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재량 휴업’을 하는 곳도 있다. 꽃 한송이, 음료수 한병도 문제가 되니 교사와 학생이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축하받지 못하는 스승의 날’은 스승의 날을 아예 폐지하자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엔 1만명 넘는 이가 동의했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부담과 자괴감이 드는 스승의 날. 무엇이 잘못된 걸까, 누구의 잘못일까.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실종(失踪)

4년 만에 또다시 선거의 계절이 찾아왔다. ‘내 고향, 내가 살아온 곳’의 발전을 이뤄내겠다는 후보들이 넘쳐난다.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맞게 정당을 선택한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단 형형색색의 점퍼를 입고, 예비후보라는 명함을 들고 시민들에게 다가가며 자신을 알리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참 이상하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냉면 한 그릇 먹기 위해 찾아간 냉면집 물냉면에 삶은 계란이 빠진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실종(失踪ㆍ종적을 잃어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됨)’은 우리들의 뇌리에 좋지 않은 단어라는 인식을 주는 명사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 실종, 어르신 실종, 반려견 실종 등등.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도 ‘실종’된 것이 있다. 큰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넘쳐 나는데, 그 큰 일을 해내기 위해 ‘초석’이 되는 ‘정책’과 ‘공약’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예비후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아직 시작도 안한 선거인데, 판세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대세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거진 시장ㆍ거진 도의원ㆍ거진 기초의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너무 앞선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 기울어진 추 속에서 시민을 위한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기 보다는 같은 당 소속 상대 후보를 흠집 내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이다보니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금세 밑천 드러난다’는 관용구가 있다. 준비가 미처 안된 당선인은 금방 재능이 탄로나는 법이다.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는 국민들이 아니다. 한 번은 속을 수 있으나 두 번은 절대 속지 않을 만큼 주권의식이 강한 우리 국민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다음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했다. 남발해도 좋으니 지금이라도 국민들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여줄 ‘정책’과 ‘공약’을 던져 보자.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말이다. 투표용지도 국민들의 혈세로 만들어진다. 그 투표용지가 아깝지 않은 선거가 될 수 있도록 후보님들의 멋진 ‘정책’과 ‘공약’을 기대해 본다. 김규태 정치부 차장

[지지대] 길가메시 프로젝트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지난 2011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출간된 이래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후기에 나오는 얘기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중세 역사와 전쟁의 역사로, 역사와 생물학의 관계, 역사에 정의는 존재하는지,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더 행복해졌는지 등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3일 인구보건복지협회 경기지회 홍보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2018년 주요 협회 사업과 저출산 극복을 위한 인식 개선 등 홍보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신임 위원이기에 먼저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신임 위원이 어처구니없게도 현재 또는 미래 사회의 인구 문제는 저출산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더 이상 인위적인 출산 대책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저출산 대책 불가론’을 주장한 것이다. 고령화에 따른 생산 인구의 감소, 과연 이것이 미래 사회에 문제가 되는 것인가. 웃음만 나온다. 사피엔스가 신이 되는 세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피엔스가 불멸의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인간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세상이 된다.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사피엔스의 신체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 또는 기계의 개발이 현실화되고 있다. 19세기 초 전 세계 인구는 10억 명에 불과(?)했다. 현재 인구는 70억 명이 넘는다. 미래 사회 인류의 문제는 이미 인구의 문제가 아니다. 종의 번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혁명의 후속편인 생명공학 혁명이 결국 다다르는 곳을 ‘길가메시 프로젝트’(길가메시는 죽음을 없애버리려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영웅)라고 주장한다. 저출산 극복이 미래 사회의 인구 문제의 해법이 될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절실히 필요하다. 최원재 문화부장

[지지대] 노인을 보는 시선

국가인권위원회가 올해 처음 ‘노인인권 종합보고서’를 만들었다. 전국의 노인(65세 이상) 1천명과 청·장년(19~64세) 500명을 대상으로 노인 인권 침해와 그에 대한 국민 인식을 전반적으로 조사한 결과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층이 노인의 상황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청년(19~39세) 중 80.9%가 ‘우리 사회가 노인에 부정적 편견이 있고, 이 때문에 노인 인권이 침해된다’고 답했다. 노인에 대한 청년들의 부정적 인식은 일자리·복지비용 등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청년 56.6%가 ‘노인 일자리 증가 때문에 청년 일자리 감소가 우려된다’고 답했다. ‘노인 복지 확대로 청년층 부담 증가가 우려된다’고 답한 청년은 77.1%에 달했다. 세대 갈등에 대해서도 청년층이 훨씬 심각하게 느꼈다. ‘노인·청년 간 갈등이 심하다’는 문항에 20·30세대 81.9%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년층(44.3%)의 거의 2배 수준이다. ‘노인이 학대·방임을 당한다’는 문항엔 노인들은 10%만 ‘그렇다’고 했지만, 청년들은 85.2%가 동의했다. 노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어둡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세대 간 경제·정치·사회적 이해관계가 날이 갈수록 크게 충돌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선 20·30세대를 중심으로 노인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유행하고 있다.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는 노인)’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노인 차별 문제도 심각하다. 어떤 카페에선 ‘노인이 많으면 젊은 사람이 안 온다’며 출입을 거부한다. 빈 택시인데도 노인은 태우지 않는 경우도 있다. 노인세대는 자녀세대로부터 ‘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나이 드는 것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경로(敬老)’는 옛말이고 ‘혐로(嫌老)’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것은 노년층만이 아니다. 언젠가 노인이 될 미래를 상상하며 20·30세대가 우리 사회의 ‘혐로 현상’을 더 걱정하고 있다. 이는 노인이 되는 것 자체를 불안해하는 ‘노화공포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청년층 사이에서 노인 혐오는 빠른 속도의 고령화 만큼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노인에 대한 반감이 차별을 낳고, 결국 노인 인권 악화와 노년 혐오로 이어지는 분위기를 쇄신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더 삭막하고 불안해지게 된다. 노년을 준비하고 노인을 이해하는 교육, 노인의 지혜·경험을 전수하는 교육에 모든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세대공동체 교육이 필요하다. 노인과 젊은 층이 함께 만나고 교류하고 통합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아버지의 자서전

검은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어깨걸이가 앙증맞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칼국수가 나올 때쯤 그가 얘기했다. ‘요즘 이걸로 취재하고 있어’. 그 가방이 그런 거였다. 아버지를 취재하는 용도라 했다. “아버님이 100세가 가까워 오시는데. 찾아 뵈면서 느꼈어. 아버지는 아버지 일생을 얘기하실 때 가장 활력이 있으시더라고. 당신의 과거 얘기가 가장 신명나는 소재인 거야. 그래서 계속 들어 드리려고 들고 다녀. 요즘엔 나도 기자야.”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진짜 이유가 따로 보였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찾아뵙기가 귀찮아지더라고. 꾀도 나고. 그런데 이걸 결심하고부터는 책임감이 생겼어. 아버지도, 나도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는 거지.” 진짜 이유는 그거였다. 아버지 찾아뵙기를 스스로 강제하기 위한 규칙이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를 꼬박 찾아뵙기로 한 아들의 약속이었다. “될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책을 내드리려고.” 얘기를 들었던 게 2년여 전이다. ▶얼추 다 돼가는 모양이다. 언론인의 시각으로 봐달라며 초안을 보내왔다. 원고 곳곳에 열성이 배어 있다. 직접 들어야 나올 수 있는 ‘팩트’들로 꽉 찼다. 자료 꽤나 뒤졌을법한 연대별 정리도 눈에 띈다. 그만하면 됐다 싶은데, 본인 생각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제목이 유치하지 않은지, 사진을 어떻게 배열할지, 표현 문구는 서툴지 않은지…. 묻고 또 묻는다. 팔지도, 팔리지도 않을 책이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 못지않은 열성을 쏟아붓고 있다. ▶정창섭식 일 처리는 늘 그랬다. 경기도 부지사 때도 완벽했다. 바늘구멍 틈새도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서슬 퍼런 지시에는 이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덕에 오래 했다. 민선 3기부터 민선 4기까지 내리 행정 부지사를 했다. 민선 도지사보다 길었던 ‘5년 부지사’였다. 직업 공무원의 꿈이라는 행안부 1차관도 역임했다. 그런 정창섭이 손수 만드는 책이다. 아버지를 위해 난생처음 하는 일이다. 만족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니다. ▶그 역시 퇴역했다. 이순을 넘긴 지 오래다. 남들은 자기 자서전 쓰느라 바쁘다. 그런데 아버지 자서전을 쓴다. ‘정재근. 1922년 5월 27일 황해도 연백 출생. 용산 세무서에 9급 공무원 합격. 동대문에 세무사 개업. 현역 최고령 세무사.’ 아들 ‘정창섭’이 정리한 아버지 ‘정재근’의 일생이다. 이 기록을 위해 두 부자(父子)는 2년여를 만나고, 대화하고, 눈 마주쳤을 게다. 눈을 보며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 이보다 더한 효(孝)가 있을까. 통계 중에 이런 게 있다. -하루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시간 13분, 대화하는 시간 35초-. 김종구 주필

[지지대] 오월(五月)

계절의 순환이 너무 빠르다. 어제와 오늘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저 멀리 출근길에 보았던 청계산 봄꽃들은 너무나 화사했다. 울긋불긋 시야를 사로잡은 꽃은 향연은 “이제 봄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나게 했다. 봄의 역동과 희망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사이 어느새 그 꽃들이 사라졌다. 그도 순식간이다. 그 꽃들이 그리웠을까? 오늘 출근길 청계산을 지나면서 그때 보았던 산 중턱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꽃들은 간데없고 대신, 녹음만 가득했다. 아쉬움의 자리는 어느덧 푸름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다. 바야흐로 오월이다. 신록의 계절이 찾아왔다. 많은 시인들이 소재를 찾고 예찬론을 펼치는 오월이다. 완연한 봄의 기운을 품어대는 오월은 희망과 설렘의 결정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언가 도전하고 싸워보고도 싶은 욕구가 앞선다. 그래서 그럴까? 오월의 역사는 만만치가 않다. 오월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바로 5ㆍ16과 5ㆍ18이다. 5ㆍ16은 군사쿠데타가, 또 5ㆍ18은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날들이다. 과거 혁명과 사태에서 지금은 쿠데타와 운동으로 바뀐 아이러니한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2일), 초대형 어음 사기사건 이철희·장영자 부부 구속(4일), 프로골퍼 최경주 한국인 처음 PGA 제패(6일), 대동법 시행일(7일)도 오월에 일어난 일이다. 이뿐 아니다. 10일에는 근로기준법이 공포됐고 14일은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한 날이다. 또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출간된 날이 20일이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된 날이 29일로 기록된다.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 크고 작은 역사적 사실을 담아왔던 오월, 우리의 고중세사는 물론 근현대사를 장식했던 오월의 일들은 지금도 역사로 전해진다. 한 번쯤 그 시간 속으로 가고픈 충동도 앞선다. 필자는 학생운동이 봇물을 이루던 80년대 학번이다. 그래서 5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있다. 오월의 노래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김동수 지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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