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의 체력, 열정

‘인생은 연극이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그는 처음엔 배우로 출발했다. 배우로 드러내지 못한 두각을 극작가로 드러내어 그가 남긴 ‘햄릿’ 등 37편의 희곡과 서정시 형식의 시집은 불후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한정된 무대와 개방된 무대의 차이만 있는 점에서 음미할만 하다. 배우는 또 어떤 역할이든 열연할 때 빛을 뿜는다. 연극 무대나 인생 무대나 열심히 해야하는 공통점은 같다. 쇼(Show)는 크게 본 연극, 즉 희극의 한 장르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것이 쇼다. ‘정치인의 쇼는 필요악인가?’하는 의문은 항상 제기되는 의문이나 해답은 긍정, 부정적이든 간에 여러가지가 나올 수 있다.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진실되고, 얼마나 가식인가를 객관적인 잣대로 보는 것은 여러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해답 가운데 하나다.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가 2차 민심대장정길에서 채탄작업을 하는 장면의 연합뉴스 근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1차 민심대장정에서는 강원도 탄광 막장에 들어가더니 이번엔 전남 화순군 대한석공화순광업소 지하갱에서 굴착기를 돌렸다. 그는 범여권 대선 주자의 한 사람이다. 열 명도 넘는 범여권 주자들이 저마다 흥행을 벌이고 있다. 이합집산의 눈치놀음이 한창이다. 손학규도 포함된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두 주자들 간에 서로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가 한창이다. 이런 쇼, 저런 쇼가 가관으로 벌어지고 있는 곳이 이른바 대선 주자들 길목이다. 평가는 보는 이의 임의에 속하는 자유다. 손학규에 대한 정치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놀라운 것은 그의 체력이다. 1947년 도내 시흥산으로 돼지띠가 올해 황금돼지 띠를 맞은 환갑 나이다. 키 174㎝에 몸무게 75㎏의 체격이 비지땀의 계절, 한 여름철에 갖는 열정은 나이를 넘어선다. 오는 15일이 초복이다. 30℃를 웃돈다. 올 여름이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은 군웅이 할거하는 대선 군상의 난장판 때문인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에 바쁜 민중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말 한마디, 동작 하나, 얼굴 표정, 입성까지 신경써가며 갖가지로 보여주려고 애쓰는 그들의 뻔한 쇼, 엉터리쇼, 이색쇼 등을 민심은 말없이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다’/ 임양은 주필

한국문학 해외소개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및 출간을 주로 맡아 온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의 통계(2006년 9월 현재)에 따르면 우리 문학 작품은 세계 45개국, 29개 언어로 1천220종이 출간됐다. 미국이 190종으로 가장 많고 일본(193종) 프랑스(165종) 중국(137종) 독일(135종) 순이다. 초기에는 연구자들이 인맥을 통해 번역 소개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야 체계적인 해외 번역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한국문학의 ‘존재’를 알리는 차원에서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선집 형태로 번역됐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 개별 작가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나오게 됐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이 해외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도 10여년 정도밖에 안됐다. 대산문화재단 등의 통계에 따르면 고은 시인의 작품집은 8개국에서 16종이 소개됐다. 시집보다 번역이 활발한 소설의 경우 황석영씨는 7개국 23종, 이문열씨는 12개국 31종, 이청준씨는 10개국 28종이 번역됐다. 번역자가 개별 소개한 것이 전부 다 포함된 수치는 아니라 해도 작가별로 10여 개국에서 20~30종이 출간된 셈이다. 세계적인 작가들과 비교하면 책 발행 국가나 종수가 뒤지고 재판을 찍는 경우는 10권 중 한권 정도에 불과하다. 200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무크씨의 경우 ‘내 이름은 빨강’ 한 종만 32개국에서 번역됐다. 한국문학이 2000년대 이후 빠르게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의 갈리마르와 쇠유, 독일의 주어캄프, 미국의 하이페리온과 세븐스토리스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출판사에서 고은 황석영 이문열 서정인씨 등이 잇달아 책을 냈다. 그동안 외국에서 단행본이 출판된 문인은 황석영 조정래 이문열 최인훈 김지하 이청준 오정희 이승우 서정주 최인훈 박경리 김광규 윤흥길 신경숙 최인호 이호철 박완서 피천득 김소월 방현석 조세희 김주영씨 등으로 한국문단 인구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다. 한국문인들이 노벨문학상을 비롯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작가들이 세계무대에 내놓을 만한 수준 높은 작품을 써야 하고, 좋은 번역자를 많이 발굴해야 하며, 작품을 많이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작품 번역 출판을 문인 개개인이 직접 하기란 여러가지로 난관이 많다. 선진 외국처럼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노벨문학상의 계절이 또 찾아오고 있다. /임병호 논설위원

자칭 ‘제갈량’들

1950년 9월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북한군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여러 수단을 썼다. 미군은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동해에 있는 삼척과 서해의 진남포, 달양도를 일제히 폭격했다. 동해에서 상륙작전을 펼 수도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맥아더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10월 이후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펼 것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미군이 실제로 동해에서 움직이면서 인천에 상륙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결코 인천 바다론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군도 마찬가지로 판단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결국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이를 기반으로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 붙였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허허실실(虛虛實實· 비어있는 것이 꽉 차 있는 것이고, 꽉 차 보이는 것이 비어있는 것) 전략’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일명 삼국지)에서 최고 지략가인 제갈량이 조조를 밀어 붙인 전략도 ‘허허실실’이다.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도망가리라 예측하고 화용도로 통하는 길에 군사를 매복시키면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도록 하였다. “조조가 이를 알고 피하지 않겠느냐”고 관우가 묻자, 제갈량은 “조조는 우리가 매복한 것처럼 꾸미느라 일부러 연기를 피웠다고 생각하고 그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답했다. 과연 조조는 제갈량의 전략에 말려들었다. ‘삼분천하(三分天下)’는 제갈량이 천하를 얻고 싶어하는 유비에게 “조조와 손권이 세를 키우도록 놔두면서 백성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하라”고 권고를 한 데서 비롯된 전략이다. 다른 세력들끼리 서로 견제케 함으로써 균형 구도를 만들어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 전략은 칭기즈칸과 나폴레옹이 공동으로 썼다. ‘소리장도(笑裏藏刀·웃음 속의 칼)’는 제갈량이 형주를 차지하려던 주유를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이다. 주유가 서천을 치겠다며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 결국 형주를 약화하려는 계략임을 간파하고, 지원군을 보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형주를 단단히 지킴으로써 주유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대선을 앞두고 각 예비후보들의 캠프에 ‘자칭 제갈량’들이 모여들면서 ‘허허실실’ ‘삼분천하’ ‘소리장도’를 흉내내는 모습들이 보인다. 심지어 모 후보에겐 ‘각하’라는 존칭까지 썼다. 소들이 모여 웃을 일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F학점 대통령들’

‘대통령학’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역대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최악의 대통령’을 통해 다음에는 ‘이런 대통령을 뽑지 말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가 선정한 바 있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의 대통령 10명’의 공통점은 ‘독선과 시대정신 부재, 실패한 인사’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암살된 뒤 대통령에 오른 앤드루 존슨(재임, 1865~69)은 상생의 정치를 무시하고 고집불통으로 타협을 거부했다. 결국 의회와의 불화로 탄핵 위기에 몰렸지만 가까스로 상원에서 부결됐다. 존 타일러(1841~45)는 임기 내내 적대적인 의회와 맞붙어 싸웠다. 취임 5개월 후에는 한 명을 제외하고 내각도 모두 대통령의 곁을 떠났다. 소속 정당인 휘그당으로부터도 제명을 당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리처드 닉슨(1969~74)은 중국과의 수교 등 외교정책에선 수완을 발휘했으나 음모와 오만, 거짓으로 불명예에 올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불신을 낳았다. 이들은 독선과 아집으로 일관한 ‘나 홀로 대통령’이다. 한국의 전·현직 대통령들이 미국 역사를 읽으면서 아무래도 이런 못된 점을 익힌 모양이다. 제임스 뷰캐년은 남북 분열의 위기에서 미숙한 대처로 미국을 남북전쟁으로 내몰았다. 프랭클린 피어스(1853~57)는 노예제 존속을 주장하는 노련한 정치가들에게 시종일관 끌려 다녔다. 밀러드 필모아(1850~53)도 1850년 ‘달아난 노예 소환법’을 적극 지지하는 등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하버트 후버((1929~33)는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의 위기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경제적 낙관론만 주장하다가 결국 미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 넣었다. 정치적 담합으로 대통령에 오른 워런 하딩(1921~23)은 오하이오 주 친척과 포커 친구들을 장관직 등 요직에 앉혀 부정부패를 초래했다. 율리시스 그랜트(1869~77)도 자신의 군 시절 동료들, 고향 친구, 친인척들을 불러 들여 보좌관이나 정부 공직에 들어 앉혔다. 한국의 전·현직 대통령들이 미국의 정치사를 읽으면서 아마 이런 점을 배웠나 보다. / 임병호 논설위원

노예와 위안부

쿠바 여자배구가 최성기를 누릴 무렵, 일본의 배구 전문지 ‘발레이 볼’은 ‘그 가공할 점프력은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 후손의 체격 조건 때문이다’라고 했다. 미국의 흑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노예의 후손들이다. 대를 이어 사는 텃밭 흑인들은 선조가 노예인 것이다.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 있은지 144년이 된다. 인종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흑백 결혼이 늘고, 문화적으로는 인기인들이 많고, 경제적으로는 부유층이 두터워지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라이스 같은 여성 국무장관을 배출할 정도가 됐다. 흑인 대통령도 나올 전망이다. 남북전쟁 직전의 노예 한 명당 평균 몸값은 그때 돈으로 788달러(현재 1만4천400달러) 였다. 우리 돈으로 1천300만원 가량 된다. 흑인 노예 후손들의 보상 요구가 있었다. 미 정가의 흑인의원 및 인권단체들이 ‘정의 실현에는 시효가 없다’며 선조들이 겪은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을 들고 나섰다. 존 코니어스 민주당 하원 의원은 1999년 11월 이를 연방정부에 공식으로 제기한 장본인이다. 2002년 8월엔 ‘흑인보상협회’가 구성됐다.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예 문제를 두고 각국 지도자들이 사죄 성명을 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노예 노동을 시킨 기독교인들의 용서를 빈다”고 했다.(1985년) “우리는 선조들의 부끄러운 죄를 나눠 가져야 한다”고 한 것은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이다.(2006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노예 무역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잘못됐다”고 했다.(1998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남미의 노예 수입국이던 브라질 룰라 다실바 대통령은 같은해 2월에 사죄했다. 노예선 아미스타드호 사건은 1839년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흑인 53명이 아미스타드호 배를 타고 가다가 채찍질과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선상 반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아미스타드호를 재현, 영국과 아프리카 등 2만2천500㎞ 항로를 잇는 ‘사죄 항해’가 지난달 21일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항을 출항했다. 사죄를 모르는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얼마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통과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미국 의회에 항의하고 나선 것은 후안무치하다. 식민지 여성을 전선에 끌어가 ‘성의 노예’로 삼았던 일본은 전사상 유례없는 범죄에 진솔한 사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임양은 주필

법과 공권력

흔히 세간에서 하는 말 중에 ‘법대로 하라’라는 표현이 있다. 그 정확한 뜻은 알 길이 없지만 상식이나 도덕 등에 의해 적당히 해결하지 말고 공권력(경찰·검찰·기타 수사기관 등)에 호소하거나 법원의 유권적 판단에 의하라는 뜻일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러한 방법이 애당초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질서 있게 해나가려면 법이 필요하다. 옛 로마인들은 법학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상 법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법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며 준법은 존경을 받을만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는 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갖고 있다. 사실 예로부터 법학을 가리켜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법학과 타산적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비웃기도 하며 하이네(H.Heine)는 법학을 ‘가장 압제적 학문’이라고 하면서 로마법대전을 ‘악마의 성경’이라고 저주했다. 영국 격언에는 ‘착한 법률가는 악한 이웃이다(Good lawyer is bad neighbour)’라고 했고, 독일 격언은 ‘법률가는 악한 그리스도 교도(Juristen bose Christen)’라고 비난했다. 베를린의 검사 키르히만(Kirchmann)은 “법학은 학문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왜 법과 법률가 등에 대해 이러한 혐오감이 있을까? 법만능의 현실은 법이 사회현실에서 유리되고 특권층에 유리하게 작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법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기이르케(Gierke)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과의 결합에 있다”고 했다.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말은 바로 법과 사회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링(Jhering)이 “법은 사회생활의 조건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인간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에는 법 이외에도 도덕 및 관습 등 다른 사회규범들도 있다. 그러나 법과 이외의 규범과의 차이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특히 도덕과의 관계가 더욱 그렇다. 법은 경험적인데 대해 도덕은 선험적(Apriori)이라거나, 법은 인간의 외면적 행위를 규율하는데 반해, 도덕은 인간의 내면적 이상을 규율한다거나, 법은 타율성을 갖는데 반해, 도덕은 자율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권력의 유무에 따라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 블랙스톤(Blackstone)의 “법이란 지배자가 명령하고 피지배자가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거나, 오스틴(Austin)의 “군주가 인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거나, 켈젠(Kelsen)의 “법은 가언적 판단(Hypothetisches Urteil)으로서 강제규범(Zwangsnorm)”이라거나 다 그러한 사정들을 말해 주고 있다. 오죽하면 예링(Jhering)은 “강제없는 법은 타지 않는 불이요, 비치지 않는 등불이다”라고 했던가? 무릇 ‘법대로 하라’라는 게 공권력에 호소하거나 법원의 유권적 판단에 의하라는 뜻이라면, 법 이외의 사회통제나 심리적 강제는 제외될 것이지만 사회학자들은 그러한 것도 법의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회학자 파운드(R. Pound)는 “법은 강제력의 적용에 의한 사회통제”라고 하며, 법사회학자 에를리히(E. Ehrlich)는 “법은 재판규범은 물론 그 이전에 행위규범이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제1차적 규범이다”라고 했다. 베버(M. Weber)는 “국가의 강제는 물론 심리적 강제에 의한 규범도 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법에는 공권력과 같은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남성 위기시대

여성의 사회참여 비율이 높아간다. 전엔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이 으레 취업을 우선으로 꼽는다. 남성 대졸자들의 취직이 이래서 더 어려워졌다는 말까지 나온다. 각종 국가고시에서도 여성들이 단연 강세다. 올 외무고시 최종 합격자 31명 중 여성이 21명으로 67.7%를 차지한 가운데 수석합격 또한 여성이 차지했다. 외무고시만도 아니다. 사시나 행시 등도 으레 여성 합격자가 더 늘고 있는 추세다. 미국의 1천400여 대학 입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많은 대학에서 성적이 우수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에 비해 차별받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학생의 입학허가 비율이 남학생보다 5%에서 20%까지 낮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즉 공부 잘한 여학생은 불합격시키고 그보다 못한 남학생을 합격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여학생들의 진학률이 저조하여 여성을 우대했던 것이 이젠 반대가 됐다는 것이다. 윌리엄앤드메리대학 당국은 “성적순으로 선발하면 여학생들의 실력이 남학생들보다 출중해 거의 여학생 일색이 될 지경”이라며 남녀 비율의 고민을 밝혔다. 그러면서 “한쪽 성별이 압도적으로 지나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남학생도 여학생이 갖지못한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학의 남녀 신입생 성 비율은 55%대 45%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남학생들이 인터넷과 스포츠에 열광할 때 여학생들은 공부만 하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성적이 더 우수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예일대 의대는 흥미있는 발표를 한 바가 있다. 언어 등 뇌를 사용하는 순간의 핵자기공명단층 촬영을 해 봤더니 남자는 주로 오른쪽 뇌만 작용하는데 비해 여자는 좌우 양쪽 모두 작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일이 닥치면 순간의 두려움은 여자가 더 많지만, 순발력과 침착성은 여자가 더 강하다는 게 심리학계의 통설이다. 체력이 우선시된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는 선천적으로 힘이 센 남성들이 우월하였다. 그러나 정보화사회는 지식산업시대다. 실력이 좋고 컴퓨터만 잘하면 되고, 이엔 남성보다 섬세한 여성의 적응력이 더 강하다. 남성 위기시대다. 이러다간 우리 대학도 성 비율로 뽑고, 취직시험도, 각종 국가고시도 성비율로 합격자를 내야 한다는 말이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젊은 남성들의 분발이 있어야 할 때다./ 임양은 주필

오프라 원프리

텔레비전 방송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이라크 귀환 장병들의 극적인 가족 재회에 방청객들의 뜨거운 기립 박수가 터졌다. 국내 방송이 아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한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이다. 윈프리는 흑인 여성으로는 드물게 미국 사회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토크쇼의 명사회자다. 스튜디오에 나온 미군은 해병2사단 경기갑부대 장병 100여명이다. 이들은 이라크 전선에서 7개월동안 복무하고 교체된 병력으로 귀국 직전 출연 섭외를 받아 집에 가는 것도 미룬 채 스튜디오에 나온 것이다. 장병들 저마다 방송제작팀이 미리 연락해서 온 부모·형제자매·아내 아들 딸·약혼자 애인 등 가족들과 포옹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정경이 여간 드라마틱한 게 아니다. 그런가 하면 중상을 입어 본국으로 후송됐던 전우들이 거의 치료된 모습으로 반갑게 나타나 못다한 전우애를 나누기도 하고, 전사한 전우들을 추념하기도 했다. 이들 부대에서 함께 떠나 돌아오지 못한 장병은 33명이다. 오프라 윈프리의 이 생방송은 토크쇼의 새로운 장르로 눈길을 끌었다. 국내 텔레비전 방송에도 많은 토크쇼가 있다. 그 많은 토크쇼 중엔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신변잡담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런 오락 프로그램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미국 텔레비전 방송도 시시콜콜한 토크쇼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참신성을 향해 도전한다. 윈프리의 이라크 장병들 깜짝 출연은 특별한 경우다. 원래는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얘기를 주로 다룬다. 국내 텔레비전 방송의 토크쇼에도 괜찮은게 더러 있다. 그런데 진행에 탄력성이 떨어져 분위기가 엿가락처럼 처지는 흠이 있다. 윈프리의 특기는 탄력성있는 진행이다. 시청자가 흥미를 상실할 틈을 주지않을 정도로 프로그램을 밀도 높게 끌고 나간다. 시청자가 중간에 채널을 돌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진행자의 능력이다. 방송 진행상의 약속, 즉 콘티도 좋아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사회 능력이다.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국민이 우리 미국 장병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라크 장병출연 개막 직전에 가진 윈프리의 멘트다. /임양은 주필

장수비결

조선 왕의 평균수명은 47살 이었다. 구중궁궐에서 어의(御醫)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임금의 목숨으론 너무 짧다. 조선시대 최장수 임금은 82살까지 산 21대 영조다. 적게 먹고 식사시간을 잘 지켰다. 쌀밥 대신 잡곡을 즐겼으며 밤참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모두 335명의 황제가 보위에 올랐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41살에 그쳤다. 60살 넘게 산 황제는 36명 뿐이었다. 이 중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은 89살까지 누렸다. 건륭은 할아버지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 일찌감치 황위 계승자로 결정됐고,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25살에 등극했다. 건륭제는 우선 4만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반성적 인간임을 보여준다. 하루 두 끼를 고집했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수 많은 후궁을 거느렸지만 중용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관을 가지고 풍류를 즐기며, 절제된 생활과 식습관을 통해 당대의 참살이(웰빙)를 추구한 인물이었다. 고대 중국의 합리적 음식 구성은 오곡이 섞이고 육류와 채소가 배합됐다고 한다. 건륭제가 주로 든 음식은 주식 47종, 부식 47종, 더운 요리 59종, 탕류 7종 등이라 한다. 오리와 제비집을 즐겼고, 아침저녁으로 열탕면과 죽을 함께 먹었다. 끼니 마다 콩류와 산나물을 거르지 않았다. 수오리를 큰 솥에 끓여낸 뒤 24종의 조미료를 넣어 도자기 약탕관에 달인다. 과일나무 등 땔감으로 사흘간 계속 찐다. 오리는 부드러워져 입에 살살 녹는다. 권두채(拳頭菜)라고도 하는 고사리도 자주 먹었다. 하지만 조선 왕이나 중국 왕이나 단명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걸 보면 산해진미가 장수비결은 아닌 것 같다. 여염의 장삼이사(張三李四)처럼 대부분의 왕들에게도 ‘부귀영화는 뜬 구름’이었다. 신선을 꿈꾸던 진시황이나 불멸을 꿈꾼 한무제가 아무리 간절히 원했어도 젊음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불로장생 약을 찾아 떠난 술사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절제된 생활, 소박한 식습관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은 걸 보면 안빈낙도 또한 건강한 삶의 길인 듯 싶다. 연세 80이 넘으신 여러분들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대한노인회경기도연합회, 한국유네스코경기도협회, 경기도교육삼락회 회원들을 가끔 뵈면 황제 부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유엔군의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에티오피아군은 화천, 금화, 양구, 철원 등 강원도의 최전방지역에서 공산침략군과 싸웠다. 참전 16개국 중 유일하게 포로가 없을 정도로 에티오피아군은 용맹스러웠다.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로맨스로 유명한 에티오피아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6·25 전쟁 당시 한국전에 황실 근위병 6천37명이 참전해 122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참전용사들은 셀라시에 황제가 아디스아바바의 북쪽 웨레다 지역에 마련한 ‘코리안 빌리지’란 이름의 정착촌을 하사받아 그런대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1974년 멩기스투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 참전용사들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시련에 부딪혔다. 북한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연금도 끊겼다. 참전용사들이 코리안 빌리지를 떠나는가 하면 참전용사들이 심지어 정부에서 악마취급까지 했다고 한다. 오늘날 에티오피아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현재 한국전 참전용사 중 생존자는 2천여 명으로 신문과 방송에 보도됐는데 이들은 한 달에 나오는 연금 120비르(약 1만3천원)로 후손 100여 가구가 코리안 빌리지에서 매우 어렵게 생활한다. 하지만 “우린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위해 싸웠다. 우리가 피로 지켜낸 한국이 이제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했다니,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커다란 긍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참전용사들에게 희소식들이 전해졌다. 춘천시가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아픈쵸베르 공원에 참전용사회관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6·25 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부상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기리고 그들에게 보은의 쉼터를 마련해주기 위함에서였다. 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도움으로 ‘히브레트 피르’ 초등학교 건물이 세워지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고 있다. 한국에서 지원한 컴퓨터와 과학실습 기자재 등을 갖춘 명문 학교로 이름이 나 원근에서 많은 학생들이 찾는다. 한국복지재단(후원 문의전화 1588-1940) 등 NGO 단체들도 참전용사 및 후손들을 위한 각종 지원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지금이라도 한국이 부르면 달려가겠다”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게 이젠 한국이 정부차원의 은혜를 두고 두고 갚아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바닷속

바다는 지구 표면의 72%를 차지한다. 육지보다 두 배나 넓은 바닷속엔 어패류만이 아니고 각종 광물자원이 무한정으로 묻혀있다. 앞으로 50년~70년 사이에 바닥이 거의 드러날 것으로 보는 석유도 해저엔 여전히 풍부하다. 대륙붕 탐사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되지 않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인류의 기원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발생한 침몰선 중엔 귀중품이 가득하다. 1981년 9월 영국의 다이버 제노프는 북극해 240m 해저에서 영국 에딘버러호가 1942년 소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한 배에 실었던 금괴 5t을 인양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런 모험가들은 아직도 많지만 성공률은 희박하다. 미국은 1983년 소련 상공에서 피격된 KAL기의 비행장치기록을 회수키위해 3개월동안 작업을 벌였지만 400억원 상당만 쓰고는 중단했다. 해저 수심이 700여m나 됐기 때문이다. 심해저는 압력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캄캄한 게 조명등을 켜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해류의 변화 또한 잦아 환경 변화가 무상하다. 심해저 탐사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일본이다. 지구에서 제일 깊은 괌섬 남쪽 마리아나 해구의 1만911m 해저를 무인 탐사기로 촬영하는 데 성공한 게 10년 전이다. 무인 탐사만이 아니고 유인 탐사도 6천500m 해저까지 잠수한 기록을 갖고 있다. 바닷속도 조용하진 않다. 해류 변화에 의한 모래더미 이동 같은 것도 심하지만 해저가 지진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해저의 활성단층 이동이 1만m 깊이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됐다. 얼마전 동해 8광구 심해 해저에서 가스 하이드레이트, 일명 ‘불타는 얼음’을 채취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는 심해저의 저온, 고압 상태에서 천연가스와 물이 결합된 고체 가스로 불을 붙이면 타는 미래의 대체 에너지 자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부근에 가스 소비량의 30년 분에 해당하는 6억t 가량이 묻힌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심해저 개발에 따른 경제성이다. 심해저 개발의 경제성이 의심되지만 많은 나라가 매력을 못버리고 있는 것은 바닷속을 지구 최후의 보물창고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속 땅이 ‘21세기의 신대륙’으로 각광받을 시기가 언젠가는 오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학도병

1950년 6월25일 일요일, 그 날은 날씨도 화창했다. 육군본부 지프에서 내린 헌병들이 한강변을 바삐 돌며 소리쳤다. “38선 일원에서 전투 상황이 발발했다. 휴가 장병, 외출 장병들은 속히 원대복귀 하라, 원대복귀 하라!!” 한강은 보트놀이 등을 즐기는 시민들로 꽉 찼었다. 평화로웠다. 시민들은 그같이 소리치는 헌병들을 그러는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토록 평화로웠던 한강이 불과 사흘뒤 수백명의 피난민 행렬이 빠져죽는 참사로 생지옥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직전, 하나 뿐이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는데도 끊긴 줄 모르고 쏟아져 나온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밀려든 바람에 앞서가던 사람들은 인파에 떠밀려 수장됐던 것이다. 나라가 이토록 망할 지경인 누란의 위기에 분연히 총을 들고 나선 것이 학도병들이다. 이 땐 고등학교가 없이 5년제 중학교 학제였다. 주로 4·5학년 학생들이 많았고, 더러는 3학년 학생도 학도병으로 출정했다. 가라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도 자진해서 갔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의 270여개 학교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자원 입대했다. 훈련받을 시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총쏘는 요령만 익힌 채 전선에 투입됐다. 학생복, 학생모자 차림으로 싸우기도 했다. 삼대 같이 무더기로 쓰러져 전사하는 학생이 많았다. 학도병의 반수 이상은 돌아오지 못했다. 김석원 준장은 포항전투를 지휘했던 3사단장으로 학도병 170명을 잃은 그는 뒷날 이렇게 술회했다. “젊음은 애석하나 참됨은 가상토다. 내 나이 여든 셋, 머지않아 그대들을 만나게 되리라. 내 그대들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 것인가!”라고 했다. 그도 지금은 고인이 됐다. 6·25 한국전쟁 57주년을 맞아 학도병으로 출정했던 노병이 사재를 털어 ‘인천 학생 6·25전쟁 참전사’를 펴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지금은 노병이 된 이경종씨(74·인천시 중구 신포동), 그도 학도병으로 전선에 갈 당시엔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인천 학생들의 참전 개요, 참전자 및 전사자 명단, 참전수기 등이 담긴 내용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학도병 책자로는 대구의 남상선, 김만규씨가 1974년에 펴낸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학도병’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한강, 한강은 고요했던 평화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한 57년 전의 악몽을 묻어둔 채, 지금은 다시 평화롭게 흘러가고는 있다./ 임양은 주필

평화변전소

북녘 개성공단에 남쪽 전기가 처음 들어간 것은 2005년 3월11일 가졌던 시험 송전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본격 송전이 시작됐다. 1948년 5월 북이 일방적으로 대남 송전을 단전한 지 57년만에 그때와는 반대로 대북 송전으로 남북 간에 전기가 연결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산변전소의 전력을 북측이 세운 전신주를 통해 1만5천㎾ 범위에서만 공급하는 배전방식이었다. 그런데 송전계통으로부터 고전압으로 받은 전력을 저전압으로 떨어뜨려 재배전하는 종전의 배전계통에서, 발전소로부터 높은 전압으로 수요지 부근의 변전소로 직접 전류를 보내는 송전방식으로 전환한 것이 지난 21일 군사분계선 넘어 북녘에서 준공을 본 평화변전소다. 지난해 4월 350억원을 들여 공사를 시작한 평화변전소는 문산변전소에서 개성공단까지 16㎞ 구간에 48기의 철탑과 154㎸급 송전선로 등으로 구성됐다. 이를 두고 59년만의 남북 송전선로 연결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니까 59년전, 북이 일방적으로 남쪽에 보내온 전기를 끊었을 당시 한반도 전체 발전량의 95.6%를 차지한 북의 전기에 의존했던 남쪽은 한마디로 암흑이었다. 4.4%의 발전량밖에 갖지 못했던 남쪽의 모든 산업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가정 전등은 고급관리 집에만 전기를 보내어 ‘특선’이라고 했는데 이도 시간이 제한 됐었다. 이로부터 반세기도 더한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남북 간 발전량은 남쪽은 3천324억㎾h 인데 비해 북녘은 고작 196억㎾h에 머물고 있다. 북의 발전량은 남의 6%에 불과하여 북으로부터 전기를 끊겼을 당시의 남쪽 사정과 비슷한 실정이다. 북의 만성적 에너지난은 심각하다. 일제시대 지은 수력발전소, 옛 소련 등의 지원으로 건설한 화력발전소가 낡아 가동률이 30%대로 떨어진 것으로 전한다. 공장기업소 가동률이 25%인 것 역시 전력난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양을 다녀왔다. “밤 거리가 어둡다”는 게 평양을 다녀온 이들의 한결 같은 얘기다. 오늘은 온 국토를 시산혈하(屍山血河)로 물들인 6·25 한국전쟁 발발 57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족상잔의 이런 비극은 이제 없어야 한다. 평화변전소가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임양은 주필

신용 경계인

1990년대 중반 3천여 곳에 불과했던 대부업체가 지난해 말 현재 등록한 업체만 전국적으로 1만7천539 곳이다. 미등록 업체까지 합치면 5만 곳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전체 대부업체의 57.2%인 1만38 곳이 몰려 있다. 평균 연 197%라는 살인적인 고금리로 대부업체에서 대출받은 서민들은 이자를 갚지 못해 가족 해체 위기에 몰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폭리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대부업체는 TV 광고까지 할 정도로 규모가 비대해 졌다. 한국이 대부업 천지가 된 셈이다. 한국의 대부업이 ‘돈’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최근엔 메릴린치·스탠다드차타드 등 세계 굴지의 금융회사까지 속속 뛰어드는 중이다. 대부업체는 이렇게 세탁소만큼 많아졌지만 이에 대한 관리· 감독은 ‘구멍’ 투성이다. 현재 총 1만3천여 개(미등록업체 포함)로 추정되는 대부업체를 관리하는 서울시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다른 지자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반면 대부업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고객이 몰리면서 대부업체에는 상담 없이 고객이 스스로 신용상태를 입력하고 각종 대출 서류를 제출하는 ‘무인 대출기’가 있는가 하면 인터넷 대부업체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말 현재 3천467만 명의 금융서비스 이용자 가운데 ‘신용 경계인’의 수가 484만 명이다. 신용 경계인은 생활보호대상자 바로 위인 차상위계층과 비슷한 개념이다. 신용정보관리대상자(옛 신용불량자)는 아니지만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지 못하는 금융 소외계층을 말한다. 보통 연체는 없지만 은행에서 대출해 주기 어려운 경계선상의 신용등급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2002년 신용위기를 불러왔던 ‘카드 돌려막기’와 닮은 꼴인 현 상황에서 신용 경계인이 한번 대부업체를 이용하면 신용점수가 나빠지면서 사실상 제도권 금융회사를 다시 이용하기 어렵게 된다. ‘제도권 금융 대출 거절→대부업체 이용→신용점수 하락→제도권 금융 진입 불가’라는 악순환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용 경계인 상당수가 연 이자율 66%에 달하는 대부업체 빚을 갚지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신용 경계인에겐 언제든 한계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대출상환 의지가 분명한 신용 경계인에 대해 집중 지원책을 마련하는 등 선제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임병호 논설위원

약수터

약수(藥水)는 화학성분이 함유된 기준으로 보통 물과 구분된다. 수온(水溫)의 고저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온천(溫泉)이 포함될 수도 있으나 보통 약수라 하면 냉천(冷泉)을 말한다. 약수에 녹아 있는 광물로는 칼슘·칼륨·라듐·황산염·규산·나트륨·마그네슘·철분 등이 있다. 약수터의 약물은 대부분 그대로 마시지만 곳에 따라서는 닭·오리· 꿩이나 멧돼지·노루 또는 약초·산초등을 넣어 탕으로 만들어 먹는다. 올갱이(다슬기)·새우· 뱀 등을 약용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의 달기약수는 닭을 삶아서 국물을 마시면 효험이 크다는 데에서 ‘달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설악산의 오색약수는 조선시대 중엽, 오색선사가 발견했다는데 샘물이 불교와 관계되는 오색을 나타내는 약수라 하여 ‘오색’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이처럼 약수터엔 약수의 영험을 높이기 위한 선전으로 신선·선녀·용·거북·두꺼비 등의 동물, 꿈에 연유하는 암시, 불교 등에 관련지어 약수터의 개설·효험·약효· 인과 등을 미화 과장한 경향이 있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환자가 모이는 걸 막기 위하여 약수터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한 사람이 약수터에 접근하면 큰 구렁이가 나타나서 해를 입게 된다”는 따위의 전설적인 설화를 유포시키는 예도 많았다. 약수는 보통 소화불량·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설(說)이 가장 많으며, 피부병·신경통·안질·빈혈증·만성부인병 등에 약효가 있다고 전해 왔다. 심지어 약수를 많이 마시면 두뇌가 명석해진다는 얘기도 있다. 우리나라엔 전국적으로 약수터가 많기로 유명하다. 서울엔 약수동이라고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장충단약수터가 있고 경기도엔 무려 500 곳에 이른다. 그 중 수원 광교산의 천년수약수터 백년수약수터 등은 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강원도의 개인·남천·방동·갈천·낙가·삼내·삼봉·오색·추곡약수터, 충청북도의 명암·초정·부강약수터, 경상북도의 달기·오전·도동약수터, 경상남도의 영산·화개약수터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생명수, 만병통치약처럼 인식되던 약수의 수질이 나빠지는 곳이 있다고 한다. 산심(山心)에서 솟아나오는 약수마저 오염되다니,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들의 잘못이 많다. / 임병호 논설위원

‘굴욕감수형’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어떤 어법을 구사했는지 분석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귀혜씨의 박사논문을 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스로 신뢰받기 위한 말투를 주로 썼다. ‘사심없는 대통령’등 개인 인품을 강조했다. 특히 위기상황시 추상적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하는 ‘초월’ 전략이 두드러졌다. ‘인품호소형’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민과 일체감을 표시하기 위해 감정표현을 자주 반복한 유형으로 분류됐다. “절망감을 생각하며 제 자신을 매질하고 있습니다”처럼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강조하는 표현도 많이 사용했다. ‘죄송, 사죄, 불찰, 고개를 들 수 없음, 부덕의 결과’ 등 매우 다양하게 사과 표현을 한 대통령으로 꼽혔다. ‘감정호소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국 사례를 제시하거나 해외 인사의 발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 여왕, 앨빈 토플러 박사’ 등 권위있는 해외 언론 및 학자 등의 발언을 인용해 설득하는 형식이 주를 이뤘다. ‘해외사례 제시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불안 등 대통령 개인과 관련된 위기상황시 사과를 거듭하는 ‘굴욕감수’ 전략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기 1년을 남긴 시점인 지난해 2월까지의 발언을 대상으로 분석했다는데 18개 메시지 중 16개(88.9%)가 모두 사과나, 책임을 용인하는 내용이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지위를 강조하지 않으며, 대통령 1인칭 주어를 생략해서 주로 발표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 논거를 들 때 국민과 자신에 대한 일화 등 실제 이야기로 다가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공격에 맞서 직접 ‘부인’하고 ‘공격’하는 전략이 두드러졌다. 노 대통령 이전 한국 대통령의 정치적 방어 메시지엔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전략이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 고은 시인이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는 일단 대통령의 언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노 대통령의 ‘직설적 화법’을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의 언어에는 위선적 품위나 품격이 필요하다. 이런 명분을 벗고 적나라한 언어를 하는 것은 …”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청와대나 노 대통령의 응답이 아직 없다. ‘굴욕감수형’이 맞나 보다. / 임병호 논설위원

너도나도 대통령?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원희룡 고진화 손학규 이해찬 한명숙 정동영 천정배 김두관 김영환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등.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사람들이다. 고건 정운찬 김근태 등이 출마를 포기한 뒤에도 정치권 인사들의 후보 예정자가 이토록 많다. 누구 말처럼 자고나면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지경이다. 이도 민주화 탓인지, 너도나도 나서는 게 존귀한 대통령직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까지 한다. 중앙선관위에 등록된 예비후보자가 50명이 넘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이들은 거의가 정치와 무관한 일반인들이다. 일반인도 아닌 정치인이 언감생심, 자격이 의심되는 주제에 대통령 후보를 넘보는 것은 이도 코미디다. “우리가 될 게 됐느냐!”며 기뻐했던 것은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킨 직후, 그 당시 정대철 선대본부장이 밝혔던 감회다. 그리고 4년 여가 지났다. 그래서 그런지 대선정국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하는 난세다. 전엔 대통령 자릴 이토록 우습게 보고 덤비지 않던 현상이 이 정권 말에 나타나는 게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하긴 그랬다. 나라 살림을 방만하게 살아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진시황 이후 중원 천지는 군웅이 할거했다. 영웅심리에 들뜬 소인배들이 작당을 하여 힘깨나 쓰면 너도나도 제후나 왕을 자칭하는 무리들이 난무했다. 작금에 난무하는 자칭 대선 후보 군상이 그같은 난세를 연상케 한다. 물론 후보로 나서는 정치인들이 다 본선에 나설 요량이 아닌 것을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합집산의 수순에 의해 거르는 과정에서 그래도 후보로 나선 이력을 내세워 보다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계략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착각도 유분수지 누가 봐도 대통령 감이 될 수 없는 위인들이 나서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한 집안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기초자치단체나 광역자치단체나 공공단체도 그렇다. 흥망성쇠가 지도자에 달렸다. 나라의 지도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 정권들어 더는 경험해선 안되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대통령다운 대통령이 누구인가를 가려내야 할 책임이 국민에게 있다. 민중은 말이 없지만 생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임양은 주필

‘슬픔도 인생의 중요부분…’

지난 주말 2호선 전철 안에서다. 20대 여성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지 혼자 생글거리고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문자 메시지 발신 신호가 있었던 모양이다. 메시지를 읽던 그 여성은 그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다. 이윽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소릴 참느라고 애쓰는 것이 공중장소가 아니면 통곡이라도 할 큰 슬픈 일을 당한 것 같았다. 교대역에서 목격한 이같은 장면은 지지대子가 사당역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아마 부모나 가족 중에 죽음 같은 불행을 당한 메시지가 급히 떴던 것 같다. 외신은 얼마전 영국 BBC방송의 흥미스런 보도내용을 전했다. 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암이 아닌 오진으로 밝혀지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데 당사자로서는 다행스럽지만도 아닌 어처구니 없는 사연이 화제가 된 것이다. 60대의 이 화제의 주인공은 시한부 인생의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직장도 그만두고 재산정리까지 마친뒤 장례식 준비도 해놨다. 처분한 재산 가운데 상당액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호화판 여행으로 시한부 인생을 즐겼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몸에 이상이 나타나지 않아 다시 병원을 찾은 결과 오진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거지가 된 그는 기뻐만 할 수 없어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 영국 사람은 재산을 다 없애버려 희망이 없다고 보아 절망했다지만, 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죽음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 20대 여성의 기쁨을 순식간에 슬픔으로 바꾼 누군가의 죽음, 그것은 남만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기쁨으로만 추구하려 들지만 살다보면 겪는 슬픔도 인생의 중요 부분이다.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혼자만의 존재인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산다는 게 슬픈 것만은 아닌 건, 살아있는 자체가 어떤 입장에 있던 간에 최대의 행복이란 사실 때문이다. 고민되는 일이 참 많은 게 삶이지만 그래도 살만한 것이 인생이다. 이런 가운데 더욱 좋은 삶은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삶이다. 인간에겐 슬픔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 희망을 가꿀 수 있는 신비스런 능력이 다 있다. / 임양은 주필

데릴사위

데릴사위에서 ‘솔서’는 시한이 정해진 데릴사위 노릇을 하는 것이다. 처가에서 첫 아이를 낳기까지나 따로 햇수를 정해 처가에 머물며 본가처럼 받든다. ‘예서’는 혼인 전에 미리 처가 될 집에 들어가 얼마동안 살다 혼인하는 것이다. ‘솔서’나 ‘예서’나 처가에서 그냥 사는 것은 아니다. 농사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의무를 갖는다. 즉 ‘솔서’, ‘예서’의 데릴사위는 노동력을 확보키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집에서도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이 있곤 했다. 그러나 사위를 양자로 삼는 ‘서양자’ 데릴사위는 아들 없이 딸만 있는 집에서 들이는 데릴사위로 보통 말하는 데릴사위는 ‘서양자’를 의미한다. 현행 민법상으로도 이 경우, 남편은 아내의 가(家)에 입적하고, 자녀는 모(母)의 성과 본을 따라 모의 가에 입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826조 4항) 다만 ‘솔서’ ‘예서’, ‘서양자’나 다 공통된 한 가지는 있다. 데릴사위를 들이는 집안은 부유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사람의 집은 거의 가난한 점이다. 그러니까 부모가 들이는 데릴사위 남편을 맞는 아내는 혼인을 해도 시집 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남편이 처가로 장가오는 데, 이는 경제적 의존관계의 성립인 것이다. 천억원 대의 재산이면 얼마만한 것일까, 이런 재산을 가진 어느 부자가 공부하느라고 혼기를 놓쳤다는 설흔여덟살난 딸의 데릴사위를 구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한 단 며칠 간의 공개모집에 270명이나 몰린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270대1의 경쟁자들 중엔 교수, 의사, 변호사 등 다양한 전문직이 많다는 것도 보도됐다. 문제는 금만가의 데릴사위가 되어서 과연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데릴사위 부부간에도 인간적 애정관계는 물론 성립된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돈만 풍족하다고 해서 평탄한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순간적으로 들 수가 있는 ‘돈보고 장가온 주제에…!’ ‘돈 내걸고 남편을 구한 주제…’등 이같은 생각이 드는 모멸감을 서로 얼마나 잘 극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데릴사위를 들이고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도 사람이 사는 여러가지 방법중의 하나다. 이래서 법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도 아내 성씨를 따라야 하지만 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라는 속담은 있다./ 임양은 주필

조선왕조 의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의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말·경과· 소요 재용·언원·의식절차· 행사 후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서적이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종 때 ‘국조오례의’의 편찬에 착수, 오례에 관한 의식·절차의 정형화를 시도한 것을 의궤의 작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의궤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1600년(선조 33)에 작성된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반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최초다. 의궤를 작성하는 행사는 왕이나 왕자의 혼례, 왕·세자·왕비 등의 책봉·책례·국장 및 빈전·혼전· 부묘(?廟) 등의 의절(儀節), 산릉·묘소의 축조, 선대왕·왕비 등에 대한 존호의 가상(加上) 또는 추상(追上), 궁전이나 능원의 축조·개수, 축성, 실록이나 ‘국조보감(國朝寶鑑)’ 또는 법전의 찬수, 선원보(璿源譜)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영정의 도사(圖寫), 친경(親耕)·진연(進宴) 의식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정조(正祖) 때 축성한 수원 화성의 공역 전말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특히 유명하다. 의궤는 어람용(御覽用)으로 1부, 의정부·예조·춘추관·강화부(江華府)·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에 보관하는 각 1부 등으로 9부 내외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의궤 성격에 따라 부수가 일정하지 않다. 2부 만 작성할 경우엔 어람용과 예조에만 배부된다. 의궤는 반차도 등 각종 도식을 통하여 당시의 복제·장구·의물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두(吏讀)·차자(借字)·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한자어(韓國漢字語)를 많이 사용해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인류 역사상 조선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인 ‘조선왕조 의궤’가 ‘팔만대장경 경판(經板)’과 함께 14일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 ‘승정원일기’를 포함해 모두 6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의궤는 3천430점에 이른다. 한국의 옛 문화가 재삼 자랑스럽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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