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일요일, 그 날은 날씨도 화창했다. 육군본부 지프에서 내린 헌병들이 한강변을 바삐 돌며 소리쳤다. “38선 일원에서 전투 상황이 발발했다. 휴가 장병, 외출 장병들은 속히 원대복귀 하라, 원대복귀 하라!!” 한강은 보트놀이 등을 즐기는 시민들로 꽉 찼었다. 평화로웠다. 시민들은 그같이 소리치는 헌병들을 그러는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토록 평화로웠던 한강이 불과 사흘뒤 수백명의 피난민 행렬이 빠져죽는 참사로 생지옥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직전, 하나 뿐이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는데도 끊긴 줄 모르고 쏟아져 나온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밀려든 바람에 앞서가던 사람들은 인파에 떠밀려 수장됐던 것이다. 나라가 이토록 망할 지경인 누란의 위기에 분연히 총을 들고 나선 것이 학도병들이다. 이 땐 고등학교가 없이 5년제 중학교 학제였다. 주로 4·5학년 학생들이 많았고, 더러는 3학년 학생도 학도병으로 출정했다. 가라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도 자진해서 갔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의 270여개 학교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자원 입대했다. 훈련받을 시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총쏘는 요령만 익힌 채 전선에 투입됐다. 학생복, 학생모자 차림으로 싸우기도 했다. 삼대 같이 무더기로 쓰러져 전사하는 학생이 많았다. 학도병의 반수 이상은 돌아오지 못했다. 김석원 준장은 포항전투를 지휘했던 3사단장으로 학도병 170명을 잃은 그는 뒷날 이렇게 술회했다. “젊음은 애석하나 참됨은 가상토다. 내 나이 여든 셋, 머지않아 그대들을 만나게 되리라. 내 그대들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 것인가!”라고 했다. 그도 지금은 고인이 됐다. 6·25 한국전쟁 57주년을 맞아 학도병으로 출정했던 노병이 사재를 털어 ‘인천 학생 6·25전쟁 참전사’를 펴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지금은 노병이 된 이경종씨(74·인천시 중구 신포동), 그도 학도병으로 전선에 갈 당시엔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인천 학생들의 참전 개요, 참전자 및 전사자 명단, 참전수기 등이 담긴 내용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학도병 책자로는 대구의 남상선, 김만규씨가 1974년에 펴낸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학도병’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한강, 한강은 고요했던 평화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한 57년 전의 악몽을 묻어둔 채, 지금은 다시 평화롭게 흘러가고는 있다./ 임양은 주필
오피니언
임양은 주필
2007-06-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