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사건 관계인과 개인적으로 골프를 치거나 식사 여행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대검이 새로 마련한 ‘검사윤리강령’의 한 대목이다. ‘검사는 변호인을 사적으로 접촉하지 못한다’고 한 기존의 윤리강령을 피의자 및 피고인 등과 가족에까지 확대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다.(검찰청법) 사회공익을 대표하는 국가 기관인 것이다. 기소독점주의의 막중한 권한을 행사한다. 검사도 사람이고 보면 사람이 그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물론 탁월한 전문 식견도 있어야겠지만 사람다운 품성이 직무행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법도 사람이 집행한다’는 법언은 그같은 깊은 뜻이 담겼다. 검사가 주로 다루는 것은 범죄자 또는 혐의자들이다. ‘검사는 사건 관계인과 접촉해선 안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검사는 범죄자나 혐의자 그리고 변호사나 가족 등을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검사는 예컨대 ‘도둑놈과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말과 같다.이같은 윤리강령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당연히 지켜야할 검사의 인간적 품성을 굳이 강령으로 정한 건 어쩐지 강령 같지가 않다. 인천공항에서 발생한 용인의 어느 골프장 경영권 다툼으로 벌어진 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에 전직 부장검사가 가담됐다는 소식은 슬픈 뉴스다. 물론 전직이 부장검사일 뿐 현직은 어디까지나 변호사다. 그러나 이런 품성의 인간이 부장검사를 했을 때를 생각하면 좀 이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지켜야할 검사의 인간적 품성을 이래서 굳이 강령으로 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윤리강령을 더 말해야겠다. 어제 경기도의회가 개회한 제220회 임시회 회기동안에 민간단체 등에서 후원하는 해외연수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의원윤리강령’ 개정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도의원이 소속된 상임위 관련의 민간업체가 경비를 대주는 해외여행은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포괄적 뇌물로는 여행을 안간다는 말이 된다. 역시 당연한 데도 강령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사회가 상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이 상식대로 통하지 않으므로 상식을 규정화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의 명문화가 없어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 임양은 주필
어제 ‘활어와 쇠고기’ 제하의 주인공인 대학생 얘길 또 한다. 그 대학생은 재학 중 입대했다가 만기제대를 하고나서 복학했다. “군대 갈 땐 휴전선에 배치되어 총을 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렇게 말한 그는 전경으로 배속되어 의외였다는 것이다. 전경이 되고 나서는 총 대신 방패와 경찰봉으로 갖가지 시위 진압에 동원돼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명령에 움직이는 것이 전경 부대다. 그런데 마치 ‘전경 타도’가 시위의 목표물인 것처럼, 그것도 젊은이도 아닌 부모 뻘이나 큰형님 또래의 분들이 죽일듯이 대들 땐 섭섭한 맘이 들더라는 것이다. 음주운전 단속 체험담은 들을만 하다. 음주운전에 걸리면 공갈형과 애소형이 있는데 공갈형은 오히려 맘이 편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개하고 무슨 일로 한 잔하고 가는 중인데 그렇게 알고 봐주지!”하고 명령투로 말하면 “선생님! 대통령님하고 한 잔 하셨어도 안 됩니다”하고 딱지를 끊고는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소형은 난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면허가 취소되면 장사를 못해 처자식이 굶게 되는데 자네도 부모가 있잖느냐”, “안 걸릴 줄 알았는데 걸렸다”면서 “차를 여기 세워놓고 갈테니 봐달라”, “곧 결혼하게 되는데 제발 체면 좀 세워달라”, “나도 전경 출신이니 선배를 한 번쯤 봐주라”는 등 애소형도 가지가지라는 것이다. 심지어 메모지를 건네며 “입금 시킬테니 계좌번화를 대라”는 매수형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공갈형이나 매수형은 딱지를 끊고나면 오히려 후련한데, 딱지를 끊고나서 영 개운찮은 것은 애소형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릴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가 나는 것은 공갈형 사람의 딱지가 그만 삭제돼버릴 때”라는 게 그 대학생의 말이다. 한 번 끊기면 안 되는 줄 안다니까 ‘빠질 구멍 하나쯤은 다 있다’면서 경찰서장을 움직일만한 사람의 부탁이다 보니 그러는 것 같더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얘기를 마친 대학생의 말이 걸작이다. 군대도 사회라면 사회인데 입대해서 안 좋은 것만 보다가 제대하고 나서 복학하여 아르바이트한다는 것이 가짜 활어횟집, 가짜 한우 쇠고기집에서 했다며, “사회 출발이 어쩐지 안 좋은 것 같아요”라면서 씩 웃는 것이다. 기성사회가 부끄럽단 생각이 든다. / 임양은 주필
“자연산이 어디 있습니까?” 한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말이다. 어느 좌중에서다. 누가 횟감 애기를 하며 시중의 자연산 활어를 말하니까 곁에서 듣고 있던 안면있는 대학생이 끼어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 대학생은 시중 활어 횟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본 경험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자연산은 고사하고 양식한 활어라도 죽은 것 안먹으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수족관에 든 활어는 일종의 견본용이고 죽은 고기를 회로 떠 냉장고에 보관해 둔 것을 손님에게 내놓기가 예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회가 쫄깃하다며 드시는 것을 보면 우스워요…” 대학생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손님이 수족관에 든 고기를 지목하면 보는데 앞에서는 그물망으로 떠가도 주방에 들어가선 손님이 없을 때 다시 수족관으로 뺑뺑이 돌려진다는 것이다. 이래서 확실히 할려면 회 뜨는 것을 손님이 지켜봐야 하는데, 지켜보는 손님도 드물고 또 지켜본들 회를 썰면서 몇점씩 도마 밑으로 떨어뜨려도 손님은 모른다는 것이다. 떨어뜨린 고기는 나중에 모둠회로 섞어 따로 판다고 한다. 이만이 아니다. 그 대학생은 백화점 정육점에서도 아르바이트 했다면서 한우고기는 아예 기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듣기에 아주 고약한 게 이렇다. 한우고기가 있긴 한데, 엷게 썰어서 포장 상품의 수입고기나 다른 쇠고기에 붙여서 포장해 놓으면 깜쪽같이 값비싼 한우고기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우고기를 엷게 썰어 붙이는데 쓰이는 접착제가 무슨 본도인진 몰라도 본드로 붙인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 대학생의 말대로라면 웰빙 시대에 정말 입맛 떨어지는 소린데, 그렇다고 믿을수도 없고 안믿을 수도 없는 게 문제다. 듣기가 하도 고약하다 보니 좌중의 한 사람이 대학생 보고 “자넨 어찌 그런 데서만 아르바이트 했느냐”고 말해 한바탕 어이없어 하는 웃음이 터졌지만, 모든 업소가 다 그럴거라고는 믿고싶지 않다. 그나저나 먹는 것 가지고 농간 부리는 것처럼 나쁜 것도 드문데, 어쩌다 사회가 이토록 ‘짜가’(가짜) 투성인 불신사회로 치닫는 지 정말 안타깝다. / 임양은 주필
냉이는 겨울에도 보리밭 두렁이나 냇가 양지쪽에 가면 옹기종기 모여서 어린애들처럼 웃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귀여운 냉이를 반찬으로 먹는다는 게 좀 뭣하지만 냉이는 비타민 B1과 C, 단백질이 가장 풍부하다. 춘곤증을 없애고 입맛을 돋운다. 소화와 간의 해독을 돕는 작용도 있어 나른한 몸을 개운하게 해준다. 황사와 건조한 날씨로 눈이 피로할 때 냉이가 묘약이다. 날로 먹기보다 끓는 물에 뿌리와 줄기를 무르게 삶은 다음 찬물에 담가 먹거나, 국을 끓이면 내음이 향긋하다. 씀바귀는 쌉쌀한 맛 때문에 쓴 나물, 고채(苦菜)로도 불렸다. 하지만 쓴맛이 오히려 입맛을 자극한다. ‘신농본초경’엔 “쓴맛이 심장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돌게 한다”고 했다. 잎, 뿌리를 데쳐 갖은 양념을 곁들여 무쳐 먹으면 미각을 돋운다. 달래는 생김새와 매운 맛 때문에 산에서 나는 마늘로 불린다. 비타민C가 많아 미용에 좋으며 보혈 작용이 있다. 또 신경 안정 효과도 있어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나 불면증을 줄여준다. 단 성질이 따뜻하므로 평소 열이 많은 사람이 과다 섭취하는 건 피해야 한다. 생채로 먹는 게 좋다. 두릅은 독특한 향기가 있어 봄철 식욕을 돋워준다. 특히 혈당을 내려줘 당뇨병 환자도 먹을 수 있다. 생즙을 내 마시면 초기감기나 두통, 신경통 등이 낫는다. 움파는 ‘총아’라고 불리는데, 1~2월 움 속에서 키운 대파의 싹을 말한다. 양귀비의 양아들이자 정부였던 안록산은 이 총아가 배합된 것으로 항상 젊음을 유지했다고 할 정도로 신진대사 촉진 작용이 크다. 쑥은 초봄에 어린 잎을 뜯어 국을 끓여 먹거나 떡을 만들어 먹으면 맛이 유별나다. 쑥떡은 비위를 튼튼하게 하고 소화를 돕는다. 쑥은 5월 단오에 채취한 것이 약성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혈 작용이 뛰어나 겨우내 육류 위주의 식사로 산성화된 피를 맑게 해준다. 요즘은 식탁에 봄나물이 상큼하다. 봄나물을 먹자니 나물 캐는 어머니를 따라 소쿠리를 들고 다니던 유년시절이 그리워진다./ 임병호 논설위원
정부가 식목일로 제정한 4월 5일은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677년(문무왕 17) 음력 2월 25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또 조선 성종이 세자·문무백관과 함께 동대문밖의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친제(親祭)한 뒤 적전(籍田)을 친경(親耕)한 날인 1343년(성종 24) 3월 10일에 해당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은 통일성업을 완수하고 임금이 친경의 성전(聖典)을 거행한, 민족사와 농림사상에 매우 뜻 있는 날일 뿐 아니라, 계절적으로 청명(淸明)을 전후하여 나무 심기에 좋은 시기다. 일제 강점기 때 4월 3일을 나무 심는 날로 정했다가 광복 후 미 군정 당시 1946년 4월 5일 행사를 한 적이 있었지만 1949년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 공식적인 식목일이 됐다. 그뒤 1960년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폐지하고 3월 15일을 ‘사방(砂防)의 날’로 대체 지정하였다. 그러나 1961년 식목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돼 공휴일로 부활되었고, 1982년 기념일로 지정됐다. 2005년 다시 공휴일에서 제외됐지만 식목일은 공공기관은 물론 전국의 각 직장·학교·군부대 마을 단위별로 토양에 적합한 나무를 심고 애림사상을 높였다. 북한에선 김일성 주석이 1946년 3월 2일 문수봉에서 해방을 기념하는 나무를 심었다하여 3월 2일을 ‘식수절(植樹節)’로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식목일 날짜를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건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지구 기운이 게속 상승하면서 얼었던 대지가 일찍 녹아 내려 나무 심기의 적기도 앞당겨 졌다는 게 이유다. 심은 나무가 뿌리를 가장 잘 내릴 수 있는 기간 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남부 지방은 3월 초순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중부 지방 역시 3월 중순경부터 심고 있다. 꽃샘추위에도 아랑 곳 없이 올해 벚꽃이 피는 시기는 지난해보다 평균 8일 정도, 평년에 비해선 11일 정도 빠르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유서 깊은 식목일 날짜를 바꾼다는 건 단견이다. 정부가 식목일을 전후하여 1개월 동안을 ‘국민식수기간’으로 설정한 덴 다 이유가 있다. 4월 5일에만 나무를 심는 건 아니다. 식목일은 지금처럼 4월 5일이 좋다. / 임병호 논설위원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CO)’는 1945년 11월 런던에서 제정된 유네스코 헌장에 입각하여 1946년에 설립됐다. 교육·과학 및 문화의 보급과 교류를 통해 각 국민간의 이해와 인식을 깊이하고 국제협력 관계를 촉진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달성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3월 1일 현재 가맹국은 192개국이며 본부는 파리에 있다. 한국은 1950년 6월에 가입하였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1954년에 창립됐다. 유네스코 경기도협회는 1974년 6월 22일 창립됐다. 초대회장은 당시 조병규 지사, 2대는 손재식 지사였다. 3대는 신능순 교육감, 4대는 이준경 교육감이었다. 1983년 부터 민간인이 회장을 맡도록 돼 수필가이며 삼익운수공사 대표인 故 안익승 선생이 5대부터 9대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김순태 회장이 1997년 4월 10대 회장으로 추대된 이후 현재 3대를 연임하고 있는데, 그동안 많은 활동을 전개, 유네스코 이념 구현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그렇지만 부족한 사업비였다. 1963년 4월 27일 법률 제1335호로 제정된 이후 3차에 걸쳐 개정된 ‘유네스코 활동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민에 의한 유네스코 활동에 대하여 재정적 원조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거의 사문화된 상태다. 도지사와 교육감이 회장이었을 땐 당연직 단체회원인 시장·군수·교육장들이 앞다퉈 회비를 납부하고 행사를 지원했지만 민간으로 이관된 후론 발길이 뚝 끊어졌다. 담당 공무원이 “유네스코가 뭐 하는 곳인데 시장이 회비를 내느냐”고 묻는 촌극도 빚어졌다. 유네스코경기도협회 2006년도 세입·세출 결산서에도 자치단체장 31명, 시·군교육장 24명으로 55명이나 되는데 회비를 낸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법률로 정한 엄연한 국제기구인데 회장단 및 회원들이 갹출하는 회비 후원금으로 민족문화창달과 국제교류사업을 전개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1년에 한번씩 납부하는 회비가 큰돈도 아니다. 올해부턴 시장·군수·교육장들이 회비는 물론 유네스코의 각종 사업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말았으면 좋겠다. / 임병호 논설위원
일본이 평양에 납치된 자국민들을 버리지 않는 집념은 알아줄만 하다. 납치된 13명의 자국민 신원을 2002년 9월에 확인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그해 10월 방북해 5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1977년 피랍될 당시 13세이던 요코다 메구미와 남한의 선유도에서 역시 1978년 납북된 고교생 김영남이 성장하여 결혼해서 낳은 딸이 김혜경이란 사실은 일본 정부가 4년간에 걸친 유전자(DNA) 검사 등 추적조사 끝에 밝혀져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 정부가 김영남의 피랍 사실을 확인하고도 손 놓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북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자국민 피랍자 말고도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다. 피랍자를 모두 데려가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방침이다. 일본이 이를 위해 북에 취하는 조치는 그들의 주권에 관한 일이다. 그러나 외교 문제란 게 있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에 단 1엔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오늘 하노이에서 갖는 북·일 국교 정상화 워킹그룹 회의를 앞두고 그같이 말했다. 워킹그룹 회의는 6자회담 2·13 합의에 의한 것이다. 핵 불능화 조치에 따른 에너지 지원도 이 합의사항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단 1엔도 지원할 수 없다’는 대북지원에 관한 일은 일본인 납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핵 무기 불능화 조치를 둔 일을 갖고 자국민 피랍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은 2·13 합의의 외교 관례를 어기는 처사인 것이다. 북·일 국교 정상화도 좋고, 일본인 피랍자 해결을 위한 노력도 물론 좋다. 그러나 일은 가닥을 잡아 추진해야 된다. 국교 정상화나 피랍자 일을 두고 다른 대북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2·13 합의의 대북 지원을 연계시키는 것은 그들의 임의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긴, 일본 정부는 꿩 먹고 알 먹자는 속셈으로 6자회담에 임했다. 북의 핵 무기도 핵 무기이지만 피랍자 문제 해결의 수단화를 노렸다. 남의 밥상 머리에 같은 사람이 숟갈을 두 개 들고 밥 그릇 하나를 더 챙기는 형상인 것이다. 원래가 일본은 이런 사람들이다. 간교하기가 이를데 없다. 북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어떻게 나올 것인지 궁금하다. / 임양은 주필
1944년 6월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도조(東條·동조) 군벌내각은 태평양 제해권을 미국 태평양함대에 빼앗기자 자살특공대를 창설했다. 이른바 ‘가미가제 도코다이’(神風特攻隊·신풍특공대)다. 자살특공대는 열 대 여섯살 난 소년병들로 구성됐다. 얼굴에 복숭아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병들은 그러나 오로지 덴노헤이카(天皇陛下·천황폐하)를 위해 죽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충성심으로 가득차게 훈련됐다. 경비행기에 폭탄을 만재하고 출격하면서는 일왕이 하사했다는 국화주(국화는 일본 왕실의 상징이다)인 어사주를 한 잔씩 마시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 듣기로는 미국 군함의 굴뚝속으로 날아든다고 했는데, 굴뚝으로 용케 들어가 군함을 폭파시키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대부분이 갑판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더러 미국 군함의 대공포화로 바다에 격추되기도 했을 것이다. 자살테러 역시 자살공격과 맥을 같이 한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이 자살특공대를 구사하더니 이라크전쟁에서 자살테러가 보편화 됐다. 자살테러 뉴스가 거의 날마다 끊이지않다 시피한다. 자살테러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번졌다. ‘한국의 아들’ 윤장호 하사가 지난달 27일 바그람 공군기지에 감행한 탈레반의 자살테러로 순국, 어제 비통한 가운데 영결식이 엄수됐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하야툴라 한은 미군과 NATO군에 맞서 1천명에 이르는 자살테러 대원을 아프간에 파견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과의 위성전화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한국군 다산부대의 안전대책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자살테러는 비인도적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분쟁이고 전쟁이긴 해도 ‘인간폭탄’으로 살상을 감행하는 것은 잔혹하다. 소모품인 자살테러 대원은 세뇌공작으로 충성심을 키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살테러 대원의 가족 등에 후한 사후 보장을 담보로 내세웠다. 자살테러는 소득이나 문명이 낮은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공격 방법이다. 문명사회에서는 자살테러가 존재하기 어렵다. 자살테러 대원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테러는 자살공격이다. 오늘날 성행하는 자살테러는 2차대전의 자살특공대가 시발로 일본이 원조인 것이다. 이들은 철모른 자살특공대 소년병들을 영웅시하도록 미화시켰다. 일본은 교활하기가 그만큼 악랄했고,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 임양은 주필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아베 일본 총리의 망언은 정말 몰염치하다. 미국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려는 음모의 일환이지만, 3·1절을 즈음해서 나온 점에서 더욱 분노를 자아낸다. 위안부를 저네들 말대로 겉으론 일본의 민간업자가 동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위장일 뿐이다. 내부적으로는 일본 관권의 사주와 비호속에 식민지 미혼 여성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사냥의 강제 동원에 나섰던 게 진실이다. 지지대子는 1944년 초등학교 3학년 때 똑똑히 보았다. 강제로 징병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가는 것은 당시의 애국국민반(지금의 통반) 주민과 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환송했다. ‘祝 入營’(축 입영) ‘武運長久’(무운장구)라고 쓴 깃발이 역구내에 펄럭였다. 어린 나도 역까지 동원되어 일본 군가를 부르며 환송했다. 이에 비해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은 은밀하게 했다. 특히 위안부는 야반에 ‘도라꾸’(트럭의 일본 발음)에 짐짝처럼 태워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큰누님 또래의 동네 처녀들이 ‘도라꾸’에서 공포에 떨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바람에 조혼의 풍습이 생기기도 했다. 부모들은 딸이 위안부로 안 끌려가게 하기 위해 아무나 하고 혼인을 시켰던 것이다. 위안부는 식민지 백성의 희생이었다. 모진 목숨을 부지한 분들 중 몇명이 미국 하원에서 강제 동원된 만행을 증언했다. 그런데 아베 일본 총리는 ‘증거가 없다’고 우긴다. 2차대전 당시 남양군도 전선에서 위안부를 맞이한 일본인 군인들 가운데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위안부가 과연 강제동원 당한 게 맞는지 안 맞는 지를 알 것이다. 위안부는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 취급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줄 지어선 일본군 병사들의 성 노리개에 불과했다. 세상에 이런 몹쓸 짓을 당하는데 강제 동원 안 했으면 제발로 자진해 고향산천을 떠날 사람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일본 총리라는 사람의 억지는 이치에 맞지않아도 한참 맞지 않는 헛소리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민다’지만 이건 숫제 오리발은 커녕 소도 웃을 증거 타령이니 정말 인간 같지 않게 보인다.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임양은 주필
2006년 성탄절 다음날 영면한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이 부인 베티 여사와 함께 베푼 선행이 뒤늦게 알려져 미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포드 부부는 캘리포니아주 사막지대 랜초미라지의 자택 인근에 알코올 중독 및 마약 재활센터인 베티 포드를 차렸다. 이곳에서 재활 치료를 받은 사람이 5만명이 넘는다. 포드 부부가 재활센터를 건립한 것은 1982년으로 베티 여사가 한동안 앓았던 알코올과 마약 중독 치료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한때 뉴욕 유명 댄스그룹의 댄서이자 모델로 활동했던 베티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내조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백악관에 들어간 뒤 여성권익운동에도 앞장섰고 당시엔 금기사항으로 인식된 유방암 수술 사실을 미국민들에게 공표해 조기 유방암 치료 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지미 카터는 재임기간 국정수행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백악관을 나온 뒤 카터센터를 설립, 중남미·중동 등지의 부정선거 감시 활동 등을 통해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 문제 개선에 헌신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부인 로슬린 여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운동을 펴고 있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엔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의 담판을 통해 제네바 합의의 물꼬를 텄다. 그는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2004년 동남아 지역을 강타한 쓰나미와 지난해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 당시 후임자인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난민 구제 모금 운동을 벌였다. 두 사람이 카트리나 성금으로 걷은 돈은 1억2천800만달러다. 클린턴은 클린턴 재단을 통해 에이즈 환자 41만5천명에게 치료의 손길도 뻗치고 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백신 가격인하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비만 아동 축소를 위해 학교에서 탄산음료와 정크푸드 추방운동을 펴고 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이렇게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세계 곳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시절 국민들에게 찬사를 받은 것도 아닌데 정치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 있는 지 이따금 정치권을 향해 ‘훈수’랍시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한다. 현직 대통령도 골치 아픈 터에 전직 대통령들까지 거들어 더욱 혼란스럽다. / 임병호 논설위원
“1992년 대선 때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돈을 많이 썼는데, 돈 문제에선 귀신이다. 은행 부정대출 같은 의혹이 있으면 전국에 있는 호남사람들이 정보를 모두 갖다줬다.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DJ한테 걸리면 죽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시판중인 ‘월간조선’ 3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전 총재는 또 1995년 DJ의 정계복귀와 관련, “당시 (동교동계가) DJ의 복귀를 반대하던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나에게 매달렸다. 동교동쪽에서 ‘DJ를 도우면 너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1992년 대선을 대비하기 위해 DJ와 함께 통합민주당의 공동대표 자리에 올랐었다. 이기택 전 총재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인연이 깊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YS 밑에 들어가 부총재를 역임했지만, 1990년 3당 통합으로 여당으로 발길을 돌린 YS와 결국 갈라섰다. 이 전 총재는 YS에 대해 “폭이 넓고 용기 있어 좋은 점이 많은 지도자인데, 속이 허한 사람이다. 군사정권이 만든 정당과 통합해 여당을 만들었던(민정·민주·공화당) YS의 정치행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회창 씨에 대한 비평은 더욱 신랄하다. 그는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한 뒤 이씨를 대선 주자로 내세우며 공동선대위 의장을 맡았는데 “(이회창씨가) 사고나 행동이 모두 귀족적이지만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는 원래부터 안 맞는 사람이다.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처음엔 나와 손잡고 청와대까지 간다는 생각을 심어줘서 믿었었는데,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 정말 졸렬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비판했다. “꼬마 민주당 시절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회의에서 동의를 받지 못하면 획 떠나는 불안정한 성격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어 조직이나 시스템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 그런 장점을 활용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 내가 알았던 ‘노무현’보다 더 도가 지나치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대꾸할만한 가치가 없어서인가, 아픈 곳을 찔려서인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기택 전 총재는 어떤 인물인가. 자평(自評)을 듣고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사행성도박 ‘바다이야기’는 조 단위 몇 개를 헤아릴만큼 큰 사회적 폐해를 가져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이 그토록 될 때까지) 개도 안 짖었다”고 개탄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6개월동안 검사 18명 등 100명 규모의 특별수사팀을 가동시켰다. 영상물등급위원회 등 218곳을 수사했다. 압수된 관련자료가 타이탄 트럭으로 30대 분량에 이른다. 그러나 검찰은 의혹의 실체는 밝히지 못한 채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동안 153명을 사법처리했다고 하나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법처리된 사람들도 대부분이 가지조차 못되는 곁가지 정도다. 수사 대상에 올랐던 청와대 인사나, 감사원이 수사 의뢰를 한 전직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면죄부를 확인받은 셈이다. 상품권 업체, 게임기 제조업체, 영상물등급위원회 등의 정·관계 로비는 결국 없었던 걸로 수사는 끝났다. 게임기 업자로부터 법령 개정을 잘 보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3천만원을 받았다는 열린우리당 김재홍 의원이 특가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것이 가장 높은 로비 배후의 고위직이다. “정책 판단의 잘못은 있었으나 고의는 없었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 발표 내용이지만, 예컨대 게임기 업자만 해도 법령 개정 로비가 김재홍 의원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사회통념이다. 패가망신한 사행성 도박자, 점포주 역시 막차 개업으로 송두리 째 망한 숱한 ‘바다이야기’ 폐해가 뒷배없이 단순히 정책 판단의 잘못으로 생겼다는 것을 곧이 들을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다. ‘태산 명동에 서일필’이라더니, ‘바다이야기’ 수사가 이 모양인 것은 괜찮은 것으로 믿었던 검찰의 수사 능력을 새삼 의심케 한다. 김성호 법무부 장관도 검찰 수사가 집중력보다 나열식이라며 “나도 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다. ‘바다이야기’의 몸통은 결국 미궁의 유령이 됐다. 유령이다 보니 개도 안 짖었던가 싶다. 언젠가는 정체가 드러날지 모른다./ 임양은 주필
경기도의 정조대왕능행차 확대가 불발로 끝난 해프닝은 그 원인이 순전히 도의 독선에 기인한다. 독선은 또 협의 미숙, 재원 미흡, 상급단체 전횡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서울시와 원론적 합의만 가졌을 뿐 세부계획의 협의가 결여된 것은 추진력 결함이다. 아마 협의가 세부계획으로 들어가면 이견에 부딪힐 것으로 보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협의는 이견을 전제한다. 서로 다른 견해를 조정하는 것이 협의의 본질이다. 결국 추진력 결함은 협의 미숙으로 귀납된다. 재원을 기업체의 협찬에 기대한 것은 이도 일종의 준공식부패다. 경비가 자그마치 60억원이 소요되는 걸로 안다. 이를 기업체에 협찬 형식으로 분담시키는 것은 준조세의 가중이다. 구시대가 아닌 이 시대의 정서로는 용인될 수 없는 처사다. 그럼 재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범도민적 합의가 전제된다. 물론 정조대왕 능행차 확대는 긍정적 과제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방법이 아니다. 수단이 나쁘면 좋은 목적도 가치를 떨어뜨린다. 경기도가 이미 13년동안이나 정조대왕능행차 재현을 화성문화제의 주요 행사로 가져온 수원시와 구체적 협의없이 추진한 것은 지방자치에 위배되는 상급단체의 전횡이다. 과천·군포·의왕·화성시와도 연계된다. 이들 자치단체들과도 참여도 제고를 위한 협의가 필수인데도 외면한 것 역시 전횡이다. 서울 창덕궁에서 융릉까지의 능행차 확대는 63.2㎞ 거리고 6박7일 간에 걸쳐 실시된다. 이 기간내, 이 구간의 교통소통 문제가 큰 문제다. 이의 충분한 대책을 위한 사전 협의를 위해서는 경기지방경찰청과 미리 가져야할 논의를 생략한것 또한 도의 실책이다. 경기도가 이처럼 숱한 계획 결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계획수립이 다 된 것 처럼 발표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란 비난을 들어 마땅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정치적 보폭의 외연 확대를 노린 전시성이 아니냐는 의문의 시각이 이래서 나온다. 정조대왕능행차 확대는 결국 내년 과제로 넘겨졌다. 그러나 위에 밝힌 문제점을 시정하지 않으면 내년에도 안 된다. 능행차의 주제는 효행과 민생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아울러 민정을 살피는 것이 행차의 목적이었다. / 임양은 주필
여성의 각계 전문직 진출이 눈부시다. 금녀의 사회적 장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공군 제8전투비행단 여성 전투기 편대장 박지연 대위(28·공사 49기), 떡대같은 편대 남성 조종사 네 명을 지휘한 전투 훈련비행을 마치고 미소지으며 활주로에 선 보도사진 속 모습이 당당하다. 사법·행정·외무고시 등 국가고시의 여성합격 비율 또한 남성못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수석합격은 으레 여성이다. 법조계의 여성진출 역시 두드러져 간다. 지난 21일 대법원에서 가진 신임판사, 예비판사 등 판사 임명식에서는 모두 187명 가운데 104명(56%)이 여성이었다. 현재 사법부 여성판사 비율 20%가 과반수에 이를 날이 과히 멀지않다. 법무부가 23일 임관한 올 신임 검사 92명 가운덴 여성이 42명(46%)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현재 14%인 여성검사 비율 또한 해마다 늘어갈 것이다. 법조계에는 재조의 여성 판·검사만이 아니고 재야의 여성변호사들도 많고 이 역시 증가 추세에 있다. 국내 최초의 여성 법조인 탄생은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갖는 1950년대 초로 돌아간다. 1952년 당시 네 자녀의 어머니인 이태영씨가 설흔여덟의 나이로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 자유당 정권에서 부군되는 정일형 박사가 정치인으로 야당 활동을 하는 바람에 판사나 검사 임관을 받지못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정대철 열린우리당 고문이 바로 이태영 변호사, 정일형 박사의 아들이다. 여성판사 1호는 1953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판사 시보를 거쳐 이듬해 서울지법에 발령된 황윤석 판사다. 황 판사는 1960년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여성법률가회의에 참석, 여성문제연구회 실행위원에 피선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아까운 설흔두살 나이로 요절했다. 이태영 변호사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국제법률가위원회(ICJ) 부회장 등으로 여권 신장을 위한 사회활동을 하며 많은 기여를 남기고 천수를 다했다. 그러니까 한국 여성 법조인의 원조는 재야의 이태영 변호사가 꼽히고, 재조로는 황윤석 판사가 꼽힌다. 여성 판·검사가 보편화된 오늘날 법정에서의 이들 모습 또한 전투기 여성 편대장과 마찬가지로 당당하다. 남성을 능가하는 심오한 활동을 기대한다./ 임양은 주필
과천 서울대공원에 살던 천연기념물 202호 두루미는 2004년 2월 조류인플루엔자 방역작업에 놀라 날아오르다 철망에 부딪혀 간이 파열돼 목숨을 잃었다. 평균 수명 50년인 이 두루미의 나이 겨우 두 살 때였다. 2005년 11월 국제 보호종인 바라싱가 사슴의 4개월 된 새끼는 비둘기 포획망이 넘어지자 놀라 날뛰다 철망을 들이 받고 죽었다. ‘히말라야의 진객’이라며 2005년 봄 들여온 포유동물 렛서팬더 한 쌍 중 네 살짜리 수컷은 작년 8월 간염으로 불귀의 객이 됐고 몸값 1천322만원도 허망하게 날아갔다. 349종 3천여 마리에 달하는 서울대공원 동물 대부분이 이렇게 제 수명을 못 누리고 질병이나 사고로 삶을 마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공원이 작성한 ‘폐사동물 사인(死因) 분석’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06년 10월까지 죽은 516마리의 동물 중 ‘늙어서 죽은’ 동물은 전체의 6%에 불과한 31마리였다. 나머지 동물 중엔 폐와 장 관련 질환을 앓다가 죽어간 동물이 유독 많았다. 장염으로 죽은 동물은 3년간 119마리(23%)에 달했다. 한창 소풍철이던 작년 5월23~28일 엿새 동안 한데 어울려 사는 큰고니·검은고니·캐나다기러기 등 물새 20마리가 집단 장염 발발로 떼죽음 당했다. 먹이를 잘못 먹은 한 마리가 장염을 퍼뜨린 것이다. 폐렴으로 죽은 동물도 42마리나 됐다. 넘어지거나 부딪치는 바람에 뼈가 부러지거나 피를 흘려 죽은 ‘사고사(事故死)’는 15%에 달하는 79마리였다. 1984년 문을 연 서울대공원 동물원은 국내 최고라지만 좁고 낡은 우리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002년에는 콘크리트·철창 속 동물의 비참한 삶을 다룬 ‘슬픈 동물원’이란 보고서가 외부에서 발간돼 충격을 줬고 대공원에선 “2012년까지 우리를 다 개선하고 동물도 20% 줄여 친환경적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과천에 디즈니랜드를 유치하겠다’고 공언한 뒤 대공원 이전설이 나돌자 서울시가 지원을 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동물원이 자체적으로 다시 ‘서바이벌 플랜’을 수립, 기존 우리를 ‘준(準)사파리공원’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갇혀 있는 것도 서러운데 동물들이 병으로, 사고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사람들이 돌봐주어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연(鳶)날리기는 대표적인 겨울철 민속놀이다. 보통 가을 농사일이 끝나면 농촌 소년들은 연을 날리기 시작했다. 북쪽 지방에선 늦가을부터 연을 날리지만 중남부 지역에선 섣달 하순부터 날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연을 날리는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다. 연을 날릴 때 소년들은 자기가 태어난 연월일을 연에 써서 하늘 높이 날린 뒤 연줄을 끊어 연이 멀리 날아가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그해 자기에게 올 액운을 날려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연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47년 신라 진덕여왕이 즉위하던 당시 대신이었던 비담과 영종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게 됐다. 어느 날 밤중에 큰 별이 관군이 있는 성 쪽으로 떨어져 반군은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라며 승기를 잡으려 했다. 이때 김유신이 관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에 날려 보냈다. 떨어졌던 별이 다시 날아 올라가는 듯이 보이게 한 김유신의 전략은 관군의 사기를 추슬렀고 난을 진압했다. 충무공 이순신도 임진왜란 때 섬과 섬, 섬과 육지로 떨어져 있는 군사들이 서로 연락하는 통신수단으로 연을 활용했다. 바로 ‘이 충무공 전술비연’이다. 일반인들이 연날리기를 하게된 때는 조선 후기 영조 무렵이다. 그 시절에 연날리기는 궁에서만 하는 놀이였는데 정승 판서들이 모여 연날리기를 하는 도중 한 정승이 올린 연이 밭에 떨어졌다. 농부가 연을 발견해 정승에게 바쳤으나 정승은 흙 묻은 연을 농부에게 주었다. 마을에 돌아온 농부가 연을 날려보니 매우 즐거웠다. 그때부터 일반인들도 연날리기를 즐기게 됐다고 한다. 바람을 이용하여 푸른 창공에 꿈을 올리는 연날리기는 단순한 놀이라기보단 호쾌하고 낭만적이다. 지금도 각 지역마다 연날리기대회가 축제처럼 열리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예전에는 주로 청소년들이 마을 뒷동산이나 벌판에서 연을 날렸지만 요즘은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도시의 공원 같은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 딸과 함께 연날리기를 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다. / 임병호 논설위원
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은 꽃피게 마련인가 보다. 일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1930년대엔 김기림 김영랑 백석 서정주 윤동주 유치환 이육사 등 유난히 큰 시인이 많이 등장했다. 이들 중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8세 되던 1930년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신문사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 백석은 1934년 귀국 이후 출판부 기자, 영어교사로 각각 2년씩 일하다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자유(自由)’를 위해 생계를 버린 백석은 뛰어난 기억력과 영어 실력을 가졌지만 온갖 밑바닥 일을 전전하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선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모호했던 백석의 행적은 2, 3년 전에야 1995년 83세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대학 강사를 했다는 소문도 한때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타계했다고 한다. ‘모던 보이’로 통하는 백석은 식민지 시민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모국어와 토속어에 집착했다. 소설로 문단에 알려졌지만 백석은 토속적이면서도 친근한 언어로 적지 않은 詩를 썼는데 최근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엮은 ‘정본 백석 시집’이 출간됐다. 백석의 시는 뛰어난 문학 텍스트 이전에 그 자체로 민족문화의 보고로 칭송된다. 먹을거리, 민속놀이, 사투리, 의상 등 민족문화와 관련된 주옥같은 내용이 작품마다 넘쳐나기 때문이다. 백석 작품에 대한 찬사는 “가장 한국적인 시”(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김현), “우리 문학의 북극성”(김윤식) 등 가히 최상급이다. 백석의 시들은 평안북도 토속어와 특이한 민속적 소재가 많은데 무엇보다도 먹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특히 음식에 관한 묘사는 세밀하면서도 감칠맛 난다. 백석에게 음식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양식이기 전에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정신의 양식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시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모르는” 지경인 터에 시대적 배경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백석의 시에선 고향 사람들의 말소리, 음식 내음새가 풍겨 나와서 맛 있다. 이런 시는 계속 나와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외국 나들이는 으레 관직, 그도 높은 벼슬아치들이나 공무로 가능했다. 일반 국민은 돈 많은 대기업주나 외국을 드나들고, 그러니까 서민들은 아예 꿈도 못 꾸었다. 어쩌다가 서민층이 외국을 나가려면 까다롭기가 한량 없었다. 신원조회다 뭐다하여 걸리는 게 많았다. 신원조회도 보통이 아니고 거미줄망 조회였다. 나가서 안들어올 사람인가 싶어 그랬다. 외국 나가서 간첩질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도 따졌다. 뭣보다 그땐 서민층 대부분은 돈이 없어 외국 나들이는 꿈도 못 꾸었다. 1960년대까지 이랬다. 아마 지금의 북녘 땅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1970년대 산업화시대 들어 사는 형편이 펴지면서 외국 나들이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젠 웬만한 사람치고는 여권을 안지닌 사람이 없다. 그런데 지지대子는 여권이 없다. “왜 여권이 없냐”고 이상하게 묻는 이도 있지만 아무튼 없다. 해외여행의 자유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그도 한 두번도 아닐만큼 많이 다녀왔다. 아무리 많이 다녀와도 지구는 넓다. 더 나가보고 싶겠지만 넓은 지구를 다 다녀 보려면 한량이 없다. 이런데도 외국 여행은 줄을 잇는다. 지난 설무렵에는 비행기표가 동이나 표를 못구해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여행수지 적자 폭이 해마다 늘어간다.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외국 여행으로 날리는 판이다. 그래도 자기돈 가지고 외국 나가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명분없는 나들이로 욕먹을 위인들이 적잖다. 남의 돈으로 외국 나간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 자치단체장들도 이에 속한다. 다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지만 제돈 안드니까 나가는 외국여행이 꽤나 많다. 노무현 대통령도 외국 나들이를 즐긴다. 대통령 취임후 24차례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다 해외순방 횟수 기록을 보유한다. 순방 비용은 약 600억원이 쓰였다. 남의 돈으로 외국 나가도 아주 못된 유형이 또 있다. 주민지원기금을 외국여행 경비로 가로챈 경우다. 폐기물 소각장 주민에 지원되는 지원기금 4억2천여만원을 빼내어 공무원, 시의원, 교수, 주민지원협의체위원 등이 해외 여행 경비로 유용한 것이다. 인천지검 부천지청은 이와 관련된 부천시청 직원 등 24명을 불구속기소하거나 약식기소했다. 이젠 웬만하면 외국 나들이쯤 시들할만도한데, 아직도 기를 쓰고 주민지원금까지 끌어다 써가며 나가는 판이다. 국내 여행도 가볼만한 곳이 많다. 낯 설고 물 설은 외국 땅보다 고생않고 편히 감상할만한 유적지며 산천경개가 얼마든지 있다./ 임양은 주필
중국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장군 이광(李廣)이 있었다. 사람됨이 입신출세의 욕망없이 그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우직했다. 이러다 보니 변방으로만 돌려졌으나 조정에 연줄을 대어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도 않고 불평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인덕과 용맹을 갖춰 휘하의 장졸들은 그를 진심으로 따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변방의 흉노족은 그 무렵 조정의 골칫거리였지만 이광을 두려워 했다. 이광은 언제나 싸움에 앞장서 몸소 장졸의 사기를 북돋웠을 뿐만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사지(死地)에서도 승리로 기사회생(起死回生)하곤 하였다. 후일 역사가 사마천은 이광을 복숭아와 자두로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능변가는 아니었으나 성실함과 능력은 천하에 알려졌다. 복숭아와 자두는 그가 가만히 있어도 풍기는 향기에 따라 사람들이 절로 모여드니, 그 나무 밑에는 스스로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광은 바로 그런 사람, 즉 도리불언(桃李不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라고 평했다.(사기열전·이장군전·史記列傳·李將軍傳) 쥐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핀다는 뜻의 ‘수서양단’(首鼠兩端)은 같은 ‘사기열전’의 위기무안전(魏其武安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역시 한나라 무제(武帝) 때다. 그 당시 조정의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특히 두영과 전분의 세는 막상막하를 이루어 영일이 없었다. 어느날 두영의 친구이며 용장이었던 관부가 사고를 내어 어전회의에서 논쟁이 됐다. 사고는 별것이 아니었으나 권신들 간의 일이라 다툼이 치열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중신들에게 어느쪽 말이 옳은가하고 시비를 물었다. 하문을 받은 내사(內史)직의 한 신하가 처음엔 두영쪽의 주장을 두둔하는가 싶더니 형세가 불리한듯 해지자 어물어물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전회의에서 물러나오면서 화가 난 두영이 내사직에 있는 그 사람에게 “수서양단이라니, 장부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하고 일갈했다. 사람이 사는 이치나 세상사는 예나 지금이나 그 원리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서 ‘도리불언’, ‘수서양단’의 고사가 생각난다. 정치판 특히 대선정국의 모양새에서 더욱 그렇다. / 임양은 주필
고려대가 논문 표절 논란을 빚어 온 이필상 총장에 대한 교수들의 투표 결과 재신임을 받았다고 14일 밝혔다. 재적 교수 1천219명 가운데 478명이 참여(투표율 39.2%)해 424명이 재신임에 찬성(88.7%)했다고 한다. 신임투표 결과가 이렇게 나옴에 따라 당초에 이 총장은 총장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적지 않은 교수들이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투표율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 점이다. “신임 의사를 밝힌 교수는 전체 3분의 1에 불과하다”며 “겨우 이 정도로 자신이 교수들로부터 신임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조만간 뜻있는 처장과 학장들의 사퇴가 이어질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 “학문적인 문제를 투표로 결정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은 거의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대학측과 일부 교수들은 “방학중이라 해외에 나가 있는 교수들이 많았고 일부 단과대에서 조직적으로 투표 거부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투표율이 낮았다”면서 “대통령 선거도 투표율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만큼 결과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총장파’와 ’반총장파’의 입장이 팽팽함에 따라 재단이 투표결과를 수용해 총장 유임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투표로 이 총장의 논문 표절의혹이 해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총장측도 여러 차례 “일종의 여론 조사”라며 “표절 여부와 상관 없이 지지도가 낮으면 물러나가겠다는 뜻”이라고 밝혀왔었다. 재단은 사태 조기 수습을 위해 표절 여부를 가리는 데 집중할 것으로 전해졌다. 재단 사무국장이 “외부 인사들로 자체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실 관계를 규명하겠다”며 “ 이 총장에 제안한 신임 투표와 재단의 조사는 별개”라는 입장을 취했었다. 사실 이필상 총장 입장에서 생각하면 억울한 건 당연하다. 타교 출신으로서 어려운 입지를 딛고 총장에 지명됐으나 반대세력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힌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임투표에서 이겼다. 불신임을 받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이필상 총장은 어제 15일 사퇴를 발표했다. 재신임을 받았을 때 당당히 물러났다. 논문 표절 의혹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는 갖가지 음모론까지 양산해 내며 고대측에 심각한 대외이미지 손상과 내부 갈등이라는 두가지 상처를 남겼지만 곧 치유될 것이다. 이 총장의 용단에 경의를 표한다./ 임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