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무민(無Mean)세대

요즘 20대 젊은이들 사이에 ‘쓸모없는 선물 교환’이 유행이다. 상대가 좋아하거나 필요한 것을 고르는 대신 최대한 ‘쓸데없는 것’을 찾는다고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주차금지 표시판, 구멍난 고무장갑, 보도블럭 등 자신이 받은 ‘쓸모없는 선물’ 사진들이 줄줄이 올라와있다.지난달 1일 유튜브엔 ‘남자 셋이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기’라는 영상이 올려져 50만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영상에는 고급 신발 브랜드 상자 안에 짚신을 넣어 선물하거나, 건강을 챙기라며 점토로 만든 과일을 주는 모습이 담겼다.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기’는 몇 년 전부터 일부 모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지난 연말 연시 누리꾼들이 SNS에 적극적으로 사진을 공유하면서 확산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쓸모없는 선물로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 글만 400여 건 넘게 게시됐고, 누리꾼들은 인공잔디, 목탁, 마네킹 발 등 갖가지 기발한 물건들을 추천했다.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처도 공유됐다. 이런 청년세대를 스스로 ‘무민세대’라고 부른다. ‘무민’은 없다는 뜻의 무(無)와 영어로 의미를 일컫는 민(Mean)을 합친 말이다. 바쁘게 경쟁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던 20대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무의미한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자는 강박을 내려놓고, 의미 없어도 되니 홀가분한 일상을 살겠다며 ‘무자극, 무맥락, 무위(無爲) 휴식’을 꿈꾼다. 무민세대는 상대가 좋아할 선물을 고르는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해 상대에게 의미 없는 선물을 한다. 쉴 때도 의미를 찾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도 치는 장면, 어항 속 물고기가 노는 장면, 모닥불이 타오르는 모습 등 의미 없는 지루한 유튜브 채널을 보는 식이다. 무자극 영상을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긴장이 풀린다고 한다. 이들은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여행을 하지도 않는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압박이 자조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분석하지만, 이는 팍팍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든 여유를 가지려는 젊은이들만의 삶의 방식이다. 무민세대는 의미 없음이 아니라 무의미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 세대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 뿐이지”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무의미를 추구하는 무민세대와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자유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 흥행몰이

자유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군으로 남경필 지사가 독주하고 있는 가운데 박종희 자유한국당 수원갑 당협위원장이 사실상 출사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한국당도 경기도지사 후보 선정을 위한 경선을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의원이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 흥행몰이가 될지 관심이 쏠린다. 박종희 전 의원은 1일 오후 경기도청 기자실을 방문해 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 박 의원은 “남경필 지사가 탈당한 부분에 대해 당내 어른들의 감정이 좋지 않고 가족 문제 등 공격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분명히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고 출마 이유를 설명했다.박 전 의원은 “유력 경기지사 후보자들과 접촉했지만 마땅한 분들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판단했다”면서 “재선 의원이고 16대부터 제대로 계속했으면 5선 의원급이다. 상대 후보들과 견주어도 빠질 게 없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이어 “한 명 정도 더 영입해 3파전을 치르면 경쟁력 후보를 선정하는 데 도움이 되고 선거 흥행몰이도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남경필 지사는 사실상 당내 마땅한 상대 후보자가 없어 이재명 성남시장과 각종 언론 매체 등에서 토론회를 진행하며 양자구도 형성에 집중하고 있다. 남 지사는 사실상 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 당내 경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박 전 의원의 가세가 판세 변화에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군들의 경쟁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전해철 의원(안산상록갑)은 김진표 의원(수원무)을 비롯한 당내 20여 명의 의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조직을 응집하고 있고 이재명 시장은 지역 언론과 호감도 상승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다. 양기대 광명시장도 정계와 종교계, 체육계를 아우르는 광폭행보로 당내 경선 구도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한국당도 남경필 지사 단독 구도에서 박 전 의원의 경선 출마의사 발표로 경선이 이뤄질 수도 있지만 흥행몰이 수준은 아니다. 한국당에서도 참신하고 능력 있는 후보자가 경선에 나서 유권자 선택의 폭이 확대되길 기대해 본다. 최원재 정치부차장

[지지대] 서인부대

인천 발(發) 서인부대(서울-인천-부산-대구)가 인천과 부산에서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인천이 1인당 지역내총생산과 경제성장률 등 통계청 기준(2016년)의 각종 경제지표가 부산을 넘어서면서, 서울에 이어 대한민국 2대 도시로 도약한다는 의미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오는 10월 시민의 날에 올해를 ‘서인부대 원년의 해’로 선포할 계획을 세우고 서인부대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017년 11월 인천의 경제활동참가율과 고용률이 서울, 부산을 제치고 특·광역시 1위를 차지하고, 인천 실업률도 최근 6개월 연속 서울, 부산, 대구보다 낮다는 지표 등이 서인부대론의 근거들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서인부대라니, 인천시가 무슨 군대 조직이냐? 차라리 특수부대라고 해라”는 정치적 견제도 나오고, 지역 언론에서는 서인부대의 허와 실을 지적하면서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부산지역은 서인부대로 비상이 걸렸다. 부동의 2위 도시 자리를 인천에 빼앗길 판이라니 신경이 쓰일 터이다. 부산지역의 유력 일간지는 서인부대에 대한 기획기사와 칼럼 등을 통해 서인부대 실체를 분석하는 한편, 성찰과 앞으로의 대안 등을 집중 요구하고 있다. 한 칼럼에서는 ‘부산의 경제가 예전만 못하면서 부동의 2위 도시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칼럼에서는 2014년 이후 경제성장률 저하와 인구 감소, 청년 실업률 증가 등을 지적하면서 지금은 부산이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성찰이 있어야 할 때라고 밝히고 있다. ‘인천의 호들갑에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라면서도 ‘부산의 자리를 호시탐탐 엿보는 인천시가 시세 역전을 호언장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인정한다. 맺음말에서는 ‘서울 다음이 부산이라는 틀이 깨진 뒤 그 시절이 좋았네라는 회한은 쓸데없는 푸념일 뿐’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인천 입장에서는 도시의 서열이 달라진다니 노려볼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서울 다음이 부산에서 인천으로 바뀌었다’ 라는 말이 언제쯤 나올까. 유제홍 인천본사 부국장

[지지대] 대통령과 예술인

홀 로타 러브(Whole Lotta Love)는 시끄러운 노래다. 무대 위 보컬의 샤우팅이 괴성에 가깝다. 원조 보컬, 로버트 플랜트가 대견스럽게 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Stairway to heaven)은 웅장한 노래다. 4명이 함께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감미롭다. 원조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미소지며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케네디 센터에서 진행된 헌정 공연-Kennedy Center Honour-이다. 2012년 주인공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었다. ▶‘케네디 센터 아너’는 미국의 행사다. 미국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술인에게 주는 명예상이다. 밴드 이글스(Eagles), 영화배우 알파치노(Al Pacino),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등 많은 예술인이 수상했다. 국적(國籍), 인종(人種), 이념(理念)을 따지지 않는다. 레드 제플린은 영국 출신이다. 그래도 선정됐고 워싱턴 DC 한복판에서 헌정 공연을 받았다. 이런 미국의 포용력이 ‘케네디 센터 아너’를 최고로 만들었다. ▶이 상에 명예를 더해주는 관례가 있다. 헌정 공연장에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다. 오바마는 특히 그랬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예술가들도 그런 모습에 익숙했다. 2016년 마지막 참석 때 사회자 스티븐 콜트가 감사를 표했다. 관중석의 박수에 오바마가 일어서자 “미셸을 지칭한 건데 당신이 왜 일어나느냐”고 해 모두를 웃겼다. 오바마는 “예술은 미국인의 삶의 중심에 항상 있었고, 백악관의 삶 일부분이기도 했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특정 문화ㆍ예술계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데 대한 처벌이다. 법원이 관련자 모두에게 유죄를 내렸다. 판시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문화의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 정부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차별대우하는 순간 전체주의로 흐른다.” 박 전 대통령의 잘못도 지적했다. “좌 편향된 문예계를 바로잡겠다는 인식이 (대통령에게) 있었고 이로 인해 정책기조가 형성됐다.” ▶미국 예술계는 국적도 안 묻는데, 우리 예술계는 사상까지 따져 묻는다. 우리 예술계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면서 이렇게 됐고, 우리 대통령 선거가 예술계를 끌어들이면서 이렇게 됐다. 전직 비서실장과 장관이 감옥에 가면서 그게 ‘나쁜 짓’이라고 결론났다. 그랬으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지금은 나아졌을까. 위대한 그룹 이글스의 ‘Life In The Fast Lane’을 따라 부르던 객석의 대통령 부부. 미국엔 있고 우리엔 없는 모습이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

한국에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오명이 몇 가지 있다. 자살률도 그중 하나다. 2002년 이후 13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벗지 못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016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년에 1만3천92명이었다. 하루 평균 36명, 40분마다 1명이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셈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자살률)는 25.6명에 달한다. 2011년 31.7명으로 정점을 찍고 2014년 27.3명, 2015년 26.5명, 2016년 25.6명 등으로 감소세를 보이지만, 2위인 헝가리(19.4명), 3위권인 일본(17.6명)과 비교해 월등히 많다. OECD 국가 평균 자살률(12.1명)과 비교하면 2.4배다. 특히 10대와 20대, 30대 청소년, 청년층 사망원인의 1위가 자살이다. 자살 시도자는 자살 사망자의 10∼40배(청소년은 50∼150배)로 약 52만4천명이나 될 정도로 많다. 자살률은 연령에 비례해서 증가해 노인 자살률은 53.3명이나 된다. 전체 자살률의 2배 이상이다. 자살 원인으로는 개인의 정신질환이나 질병이 주로 꼽히지만,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소득 불평등 등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요인도 큰 영향을 끼친다. 경찰청의 2016년 자살 주요동기 자료를 보면, 36.2%는 정신적 문제였지만 경제생활 문제도 23.4%를 차지했다. 신체질병은 21.3%로 세번째였고, 이어 가정문제(8.9%), 업무상의 문제(3.9%) 등으로 자살을 했다. 자살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손실은 막대하다.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자살한 당사자의 미래소득 감소분만 고려할 경우에도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6조5천억원이나 된다(2014년).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은 자살시도로 인한 외상·후유증 치료비, 자살유가족의 신체·정신질환 치료비 등을 반영하면 자살의 사회적 비용은 추계규모보다 훨씬 많다. 사회구성의 기본단위인 개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가정과 국가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정부가 생명존중 문화확산을 통해 2022년까지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을 현재의 3분의 2 수준인 17명으로, 연간 자살자 수를 1만명 이하로 내리겠다고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을 세웠다.이 프로젝트는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해결 가능한 사회문제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계획이다. 국가가 자살 고위험군을 발굴ㆍ관리해 국민생명을 지켜나가는데 힘써야 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걸맞은 삶의 질을 누리기 위한 선결과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평창, 평화올림픽 vs 평양올림픽

지난 24일 네이버 등 주요 포털에서는 ‘평화올림픽’과 ‘평양올림픽’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 1, 2위를 다투는 ‘실검전쟁’이 벌어졌다. 이날은 문재인 대통령의 66번째 생일이자 취임 후 첫 생일이었다. 스스로 ‘문파(文派)’ 또는 ‘문팬’으로 칭하는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만들자’고 힘을 모아 이날 오전 ‘평화올림픽’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렸다. 그러자 문파와 문팬을 이른바 ‘문빠’라고 부르는 반대진영에서 ‘평화올림픽에 1위를 내줄 수 없다. 평양올림픽을 1위로 만들자’며 손가락 전쟁을 벌여 ‘평양올림픽’을 다시 검색 순위 1위에 올렸다. 정부가 북한에 너무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이날 오전 내내 양측 지지가가 모인 웹사이트와 카페 등에선 “화력이 부족하다. 2위로 밀렸다”는 글이 넘쳐났고, ‘평화올림픽’과 ‘평양올림픽’의 실검 순위는 엎치락뒤치락했다. 실시간 검색어 경쟁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20·30대였다. 때아닌 ‘평화 대 평양’ 검색어 전쟁을 문 대통령 열성 지지자와 반대 세력의 유치한 싸움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우리사회의 극단적인 편가르기와 국론분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이처럼 남남 갈등이 온라인 공간에서 확산된 배경에는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과 한반도기 사용 결정,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방남 의전 등을 둘러싼 정치권 충돌이 자리하고 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북한 참가가 평창올림픽 성공과 한반도 긴장완화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이라며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치르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평창올림픽이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 북핵을 기정사실로 하려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평양올림픽’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평창올림픽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삼수 끝에 어렵게 따낸 올림픽이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대한민국 땅에서 열리는 지구촌 축제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민적 역량을 모아도 모자랄 때 집안싸움에 빠져 있는 상황이라니 심히 우려스럽다. 북한은 평창올림픽을 체제 결속과 핵보유국 지위를 얻는 데 활용하려는 속셈을 드러내며 남남갈등을 유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말려드는 모습이다. ‘평화ㆍ평양’ 검색어 전쟁에 평창은 사라졌다. 관심 뒷전이다. 이런 사태가 오기까지 정치인들의 책임이 큰 만큼 올림픽의 정치적 이용을 자제해야 한다. 지금은 2월9일 개막하는 평창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왜 정현에 열광할까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인 호주오픈 준결승에 진출한 정현이 흘린 땀방울에 대한민국이 열광하고 있다.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남북 단일팀으로 구성되면서 야기된 올림픽 논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 각종 어지러운 뉴스들로 도배되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 정현의 활약은 국민들에게 사이다 같은 선물이다. 이를 반영하듯 정현이 지난 24일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8강전에서 승리해 4강에 진출하며 주요 포털사이트의 검색순위 1~10위를 휩쓸었다. ‘정현 4강’ ‘페더러’ ‘정현 인터뷰’ ‘테니스’ 등의 키워드다. 그 결과 나란히 실검 1·2위를 차지했던 ‘평화올림픽’과 ‘평양올림픽’을 순위권 밖으로 몰아냈다.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인 24일 평창동계올림픽을 놓고 남북 대화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을 대변하는 키워드도 밀려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현에 열광할까. 유럽인의 전유물이자, 한국에선 비인기 종목인 테니스 선수인데…. 한국인으로서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영역에 대한 도전정신, 당당하고 적극적인 모습, 솔직함과 재치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정한 룰 안에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는 노력으로 인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일 듯하다.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하며 땀을 흘렸지만 정치적 판단이 개입(?)돼 그 의미가 퇴색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의 문제와는 상반되기에 더욱 반응이 뜨거운지도 모르겠다.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가즈아’라는 신조어를 외치며 24시간 가상화폐 시세만을 쳐다보고 있는 ‘한탕주의’ 투자자들에게 땀방울이 밑바탕이 된 정현의 성과가 경종을 울리길 바래본다. 한국 선수로는 전인미답의 길을 가고 있는 정현은 오늘 준결승에서 살아있는 테니스의 전설 로저 페더러와 운명의 일전을 갖는다. 또다시 신기원을 이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국민들은 그 게임의 결과에 상관없이 잠시나마 현실의 복잡한 일들을 잊고, 즐길 것이다. 이미 정현을 통해서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았기에…. 이명관 사회부 차장

[지지대] 출생아 40만 붕괴

지난해 여름 개봉했던 ‘보스 베이비’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보스 베이비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 아기들의 설 자리를 위협하는 애완견 주식회사의 음모를 알아내 애완견한테 빼앗긴 사람들의 사랑을 아기들에게 되돌리는 것이다. 영화는 아기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세태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이 반영된 영화는 보스 베이비가 위기를 극복하고 미션을 완료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영화 속 보스 베이비의 고민이 현실화되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24일 통계청이 발표한 11월 인구동향을 보면 지난해 11월 출생아 수는 1년 전보다 11.2% 감소한 2만7천명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0년 월간 통계작성 이후 최저치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태어난 아이 수는 33만3천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만5천900명이 감소해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면 연간 출생아 수가 사상 처음으로 40만명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결혼하는 건수도 같은 기간 3.1%(800건) 감소한 2만4천600건을 기록해 향후 출산율 전망도 어두운 상황이다. ▶정부가 최근 저출산 대책의 기조를 대대적으로 수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부처별 관련 사업을 나열하는 ‘백화점식’으로 진행됐던 저출산 사업을 고용·주거, 임신·출산 지원, 보육·교육부담 완화로 이어지는 생애단계별 핵심 사업 위주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다. 정부 외에도 지방자치단체들도 다양한 저출산 극복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정부 대책의 성과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결혼 적령기의 남ㆍ여 중 결혼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고,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 낳는 것에 주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도적으로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 조성과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당연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 확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정부 저출산 대책이 실효를 거둬 영화 속 보스 베이비가 미션을 완수하듯 해피엔딩이 되길 기대해 본다.이선호 문화부장

[지지대] 수원 삼일고

아주 가끔씩 특별한 학생이 등교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쯤 커 보였다. 창문 밖에서도 교실 내부를 내려다볼 정도였다. 유독 예의가 발랐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삼일의 자랑’이라고 불렀다. 1978년, 수원 삼일고(당시 삼일실업고)다. 학생 이름은 하동기, 농구 국가대표다. 2m5㎝로 당시 최장신 센터다. 참 가난했던 모양이다. 쌀이 없어서 감자를 한 솥씩 삶아 먹었다고 한다. 그런 학생을 국가대표로 키운 게 삼일고다. ▶삼일고의 투자는 25년 뒤 꽃을 피웠다. 2003년 22게임 전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양희종 선수가 있었고, 정승원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 하동기 선수의 아들 하승진 선수가 있었다. 2m20㎝의 키에 순발력까지 갖춘 대어(大魚)였다. 내로라하는 농구 명문 학교들이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하승진의 선택은 삼일중-삼일고였다. 가난했던 아버지를 키웠던 ‘삼일’을 숙명처럼 택했다. 대(代)를 잇는 신뢰, 이것이 삼일고 농구부의 힘이다. ▶1978년. 얼굴이 검게 탄 학생 몇이 있었다. 오전 수업 이후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는 시간까지 운동했다. 테니스부 학생들이다. 테니스가 사치 운동이라 여겨지던 시절이다. 라켓 하나쯤 들고 다니면 ‘폼’ 나던 시절이다. 그만큼 투자가 필요했다. 삼일고가 그런 테니스부를 운영했다. 4면짜리 테니스장도 구비했다. 라켓, 볼에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국 대회에서 큰 성적을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삼일고는 테니스부에 계속 투자했다. ▶그렇게 키워진 학생이 ‘일’을 냈다.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를 꺾었다. 한국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 8강에 올랐다. 40년도 훨씬 넘는 긴 세월을 기다린 결과다. 지역 언론의 1면이 약속처럼 닮았다. 주먹을 불끈 쥔 테니스 선수의 사진, 그리고 ‘수원의 아들 정현’이라는 제목. 정현(22)도 삼일고 출신이다. 수원 북중에서 자란 보석을 삼일고가 껴안아 키웠다. ‘아시아인은 안 된다’던 테니스에서 ‘삼일인은 된다’는 역사를 만들었다. ▶툭하면 없어지는 게 학교 운동부다. 성적 못 낸다고 없애고, 물의 일으킨다고 없앤다. 그래서 더 삼일고의 운동부 사랑이 돋보인다. 부자(父子)로 이어진 농구부 투자. 40년을 기다려온 테니스부 투자. 많이 지원해줘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언론 인터뷰에 남긴 김동수 교장의 말이다. “체육관 귀퉁이에서 연습하는 태권도부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운동장 빌려 쓰는 축구부 아이들도 눈에 밟힌다”. 88년에 지어진 체육관을 30년째 그대로 쓰고 있는 삼일고 선수들이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정치인 팬클럽

팬클럽은 연예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정치인 팬클럽’이 극성이다. 정치인 팬클럽은 21세기 한국정치의 대표 아이콘이 됐다. 정치인의 역량이 클수록 이름값만큼 큰 규모의 팬클럽이 움직인다. 정치인 팬클럽의 원조는 2000년 6월 결성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산악회’와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가 있긴 했지만 정당의 개입없는 순수 대중 기반 팬클럽은 노사모가 처음이다.노사모는 당내 지지 기반이 약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정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소액 후원금을 내는 희망돼지 저금통, 노란 목도리와 노란 풍선 등으로 ‘노무현’이란 정치인을 알리는데 적극 나서며 이변을 일으켰다. 2004년에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등장하며 세를 과시했다. 박사모는 노년층의 박정희 향수를 등에 업고 세를 키워 나중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외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명박사랑’,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안사모’,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창사랑’ 등 대선에 출마했던 정치인의 팬클럽 활동이 두드러졌다. 6ㆍ13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경기지사 선거를 앞두고 도내에서도 정치인 팬클럽 경쟁이 시작됐다. 더불어민주당 전해철 의원(안산 상록갑)의 팬클럽은 ‘문전성시(문재인과 전해철의 성공시대)’다. 전 의원이 친문(친 문재인) 핵심 멤버로 알려지면서 문 대통령 팬클럽인 ‘문팬’도 가세한다는 보도다. 같은 당 이재명 성남시장은 대선주자를 거치며 인지도가 높아져 ‘재명 투게더’, ‘내가 이재명이다’, ‘희망 바이러스’ 등 여러 팬클럽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선 때 지지했던 ‘손가락혁명군’(손가혁)’도 다시 나설 전망이다. 같은 당 양기대 광명시장의 서포터즈 ‘기대심리’도 페이스북 팬페이지 운영을 통해 본격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광명동굴의 기적’을 비롯해 KTX광명역세권에 이케아·코스트코 같은 대형 유통점 유치 등의 시정 성과를 부각시키며 양 시장을 응원하고 있다. 최근 자유한국당으로 다시 복귀한 남경필 경기지사 팬클럽인 ‘남사모(남경필을 사랑하는 모임)’도 세 확장에 나선다. 남사모는 경기지역에 25개 지회, 3천여 명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남 지사 재선 성공을 목표로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팬클럽은 가장 든든한 후원군이다. 자신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기싸움이 치열해지고 과열경쟁을 벌이면서 볼썽사나운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번 선거에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싶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개파라치

파파라치(paparazzi)는 유명인사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몰래 찍은 뒤 이를 신문사나 잡지사에 고액으로 팔아넘기는 몰래 카메라맨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일반인의 범법행위 장면을 찍는 전문 신고꾼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2001년 교통위반 차량을 몰래 촬영해 정부 보상금을 타내는 카(car)파라치를 시작으로 쓰파라치(쓰레기 불법투기), 학파라치(학원 불법영업), 쇠파라치(수입 쇠고기 원산지 표시 위반), 식파라치(음식물) 등 갖가지 파파라치가 생겨났다. 3월부터는 ‘개파라치’도 등장한다. 목줄을 채우지 않거나 입마개(맹견의 경우)를 하지 않은 개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다. 지자체가 과태료 또는 벌금의 20%를 포상금으로 지급한다. ‘개파라치’ 남용 사례를 막기 위해 포상금 횟수는 연간 20회로 제한했다. 정부가 최근 ‘반려견 안전관리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해 유명 한식당 대표가 가수 최시원씨 개에게 물려 사망하는 등 반려견 사고가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개에 물리면 건장한 성인이라도 파상풍이나 광견병에 걸려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정부 대책에 따르면 반려견을 데리고 외출할 때 목줄을 채우지 않고 풀어놓았다가 적발되면 최대 50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내년부터는 반려견이 사고를 내면 주인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모든 반려견의 목줄 길이도 2m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 맹견의 종류도 늘어난다. 현재는 도사견,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로트와일러 등 3종만 맹견으로 취급했는데 내년부터는 마스티프와 라이카, 오브차카, 캉갈, 울프독 등 5종을 추가한다. 내년부터 목줄없이 맹견을 풀어놓았다가 적발되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 내에서 키울 수도 없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특수학교 등에 맹견을 데려가는 것도 금지된다. 정부는 맹견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사람을 공격해 상해를 입힌 이력이 있거나, 어깨까지 체고가 40㎝ 이상인 반려견은 ‘관리대상견’으로 지정 관리한다. 관리대상견은 엘리베이터, 복도 등 건물 내 협소한 공간과 보행로 등에서 입마개를 착용해야 한다. 현재 국회엔 반려견의 엄격한 관리, 관련 사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관리 소홀로 사고를 낸 반려견 주인에 대해 처벌이 세진다. 형사처벌을 각오해야 한다. 반려견 1천만시대, 자신의 반려견이 타인에게 위협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개(犬) 탓을 할 게 아니라 페티켓을 지켜야 개파라치에 안 걸린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외로움 전담 장관

남미의 한 작은 마을에서 1세기에 걸쳐 기이한 일들이 이어진다. 라틴 아메리카의 복합적인 인종, 문화, 역사적 전통과 현실 등을 ‘쓸쓸함’이란 색안경을 끼고 담담하게 그려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82년 노벨 문학상도 받는다.▶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다. 꽤 부담 가는 명품은 더더욱 아니다. 인공 지능이 발달하고 로봇이 현실화되면서 인간은 그만큼의 분량으로 외로워지고 적막해지고 있다. 이미 수천 년 전 그리스의 숱한 철학자들이 우려한 바 있어 새삼스럽지는 않다. 예고된 재앙이다. 현대인들에게 외로움이 필수품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지구촌 곳곳에서 금연이 확산되면서, 담배 피우는 모습의 아이콘이었던 쓸쓸함이라는 사치품도 사라져가고 있다. 턱을 괴고 깊은 상념에 잠긴 형상의 로댕 조각이 외로운 인간의 모델로 되돌아오고 있다. 고독이라는 어휘를 곱씹으면 예전에는 고소한 땅콩 냄새가 났지만, 이제는 그저 단어 그 자체일 뿐, 아무런 느낌도 없다.▶영어권 나라에선 고독이나 외로움을 ‘Solitude’나 ‘Loneliness’ 등으로 표현한다. 서양의 문학가들이 이 어휘를 자신의 글에 쓴 사례는 숱하다. 문학가들은 물론, 대중음악가들도 곧잘 노랫말에 고독을 집어넣어 대중을 사로잡는다. 샹송 가수인 조르지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의 ‘나의 고독(Ma Solitude)’이 대표적이다.▶최근 영국 정부가 외로움과 관련된 문제를 전담하는 장관직을 신설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트레이시 크라우치 체육장관을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는 장관으로 겸직 임명했다. 크라우치 장관은 앞으로 국가통계국과 함께 쓸쓸함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 대한 통계를 취합하고 관련 연구, 정책 및 지원자금 마련 등을 추진한다. ▶이 같은 배경에는 고독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보고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됐다. 영국에선 75세 이상 인구의 절반가량이 혼자 살고 있다. 잉글랜드에서만 200만 명 규모로 파악되고 있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젠 가칭 ‘고독부 장관’ 신설을 검토해야 하는 걸까.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지지대] 크라운해태의 통큰 결단

지난해 11월 경기도 체육계에 한 차례 큰 파장이 일었다. ▶1981년 인천시와 분리 후 36년간 연 1억5천만 원이 넘는 출연(出捐)을 통해 경기도 육상 발전을 이끌어온 삼성이 회장사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도체육회 가맹 70개 경기단체 가운데 재정 지원 규모가 가장 큰 데다 기초종목인 육상에 대한 지원 중단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내 체육계에는 타 종목들에 미칠 영향과 함께 ‘어느 기업에서 그만한 지원을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체육회장인 남경필 도지사까지 나서 삼성에 대한 재고 촉구와 차선책으로 타 대기업 회장사 추진 또는 최악의 경우 경기도가 직접 지원하는 방안까지 나왔다.▶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에 육상연맹 주변에서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다. 조만간 회장사가 선정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부분 육상인들은 새로운 회장사가 삼성에 버금가는 대기업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고, 연맹은 후임 회장사에 대해 함구로 일관해 이를 뒷받침하는 듯했다. 1월2일 회장선거가 공고되면서 회장사가 모습을 드러냈고, 마침내 13일 단독 입후보한 크라운해태의 임원이 새 수장으로 선출됐다.▶새로운 육상연맹 회장사가 된 크라운해태는 이전 삼성이 지원해오던 출연금인 연 1억6천만 원을 그대로 지원키로 했다. 크라운해태는 제과업계 2위의 기업으로 삼성이나 현대, SK, LG 같은 글로벌 기업이 아님에도 통큰 결정을 했다. 크라운해태가 육상연맹 회장사를 맡게 된 데에는 제과 기업으로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윤영달 회장의 경영철학이 녹아든 때문으로 알려졌다. ▶윤 회장은 계열사인 ‘아트밸리’가 소재한 양주시의 육상연맹을 통해 회장 공석에 따라 경기도 육상이 꿈나무 육성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다는 전언이다. 윤 회장은 2010년부터 ‘모여라! 국악영재’ 행사와 ‘영재국악회’ 공연을 후원해오고 있을 뿐 아니라 서울 남산국악당 리모델링에 30억을 기부하는 등 20여 년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기업들의 문화예술, 체육 분야에 대한 지원 외면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 때에 크라운해태의 통큰 지원은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황선학 체육부장

[지지대] 토착 검사·토착 경찰

검사들에겐 몇 번의 인사 고비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부장검사 승진이다. 평검사에서 간부검사로 승진하는 때다. 잘 나가는 검사와 못 나가는 검사가 여기서부터 갈린다. 밀려났다 싶은 검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는다. ‘계급정년’ 문화가 엄중하던 십수 년 전에는 더 그랬다. 대략 40대 전후의 연령대다. 조직에 대한 서운함이 당연히 있을 터다. 하지만 ‘승진 안 시켜줘서 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많은 검사들이 이런 변(辯)을 남긴다. ▶“전국 옮겨 다니는 게 지겹다.” “애들 학교 문제가 생기니 더욱 그렇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위해 검사 생활을 접기로 했다.” 자녀 학업이 본격화될 연령대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여기저기서 ‘승진 못 하니까 옷 벗는 거면서…’라고 쑥덕거린다. 그런데 같은 불만이 ‘잘 나가는 검사’들에게도 있다. ‘평검사 2년, 간부 검사 1년’이라는 순환근무 원칙 때문이다. 평생 이삿짐을 싸야 하는 고약한 제도다. ▶역설(逆說)이다. 이런 불편함이 검사를 편하게 만든다. 토착세력과의 연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세상 욕 다 얻어먹는 검사들이다. 정치 검사, 권력의 시녀, 부패 검사…. 그런데 여간해선 듣지 않는 비난이 있다. ‘토착 검사’ ‘지역 검사’다. 토착세력에게 검사는 늘 ‘포섭대상 1호’다. 이런저런 줄을 대며 접근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웬만해선 토착세력과 엮이지 않는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1ㆍ2년마다 무조건 짐 싸는 순환 근무제다. ▶드라마 ‘전원일기’가 있었다. ‘영남이’는 김 회장(최불암 扮)의 손자다. 착실히 커서 경찰이 됐다. 드라마 종영 때까지 읍내 지서에 근무했다. 도망간 개도 찾아 주고, 부부싸움 말리려 출동도 했다. 양촌리 주민에게 경찰보다 가족에 가까웠다. 실제로 우리네 경찰이 그랬다. 늘 지역 주민과 함께 부대끼며 지냈다.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해결사가 됐다. 도둑 잡고, 밤길 지키는 게 경찰의 업무라고 말하던 시절엔 그랬다. 그게 멋이었다. ▶엊그제 청와대가 권력 구조 개편안을 냈다. 경찰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다. 반대 여론이 많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 될 것이라며 걱정한다. 이를 불식시킬 숙제가 경찰에 있다. 국민이 믿을만한 제도를 내놔야 한다. ‘토착 경찰 방지책’도 그중에 하나다. 토착 세력과 엮이지 않을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철저한 순환 근무제다. 고위직에만 적용하는 향피(鄕避) 제도는 안 된다. 이미 MB 정부에서 실패로 끝났다. ▶전원일기 속 양촌리. 김 형사 ‘영남이’는 이웃집 ‘일용이’를 구속시킬 수 없다. 그걸 우리 사회는 정(情)이라고 한다. 그 정을 제도로써 차단시키는 것이 경찰권 강화의 전제 조건이고, 그 전제 조건을 완성해가는 출발이 순환 근무제의 전면 실시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일확천금의 꿈

일확천금(一攫千金)은 한 번에 천금을 얻는다는 뜻이다. ‘천(千)’이란 숫자는 단순히 1000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주 큰 숫자를 의미한다. 천릿길 하면 대단히 먼 길을 뜻하고, 천추(千秋) 하면 천 번의 가을, 즉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천금(千金) 역시 큰 재산을 가리킨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단 한 번에 큰 돈을 버는 일확천금을 통해 인생 역전을 기대한다. 요즘 우리 사회가 ‘인생 역전’을 희망하는 투기 열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로또복권이 예전의 인기를 되찾고 여기에 가상화폐까지 더해지는 양상이다. 지난해 로또복권이 하루 평균 104억 원어치 팔려 판매량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나눔로또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로또복권 판매액은 약 3조7천948억 원(추첨일 기준)으로 추산된다. 한 게임에 1천 원임을 고려하면 판매량은 37억9천여 게임이다. 작년 통계청 추정 인구(5천144만명)로 판매량을 나눠보면, 한국인 1명당 로또를 74번 샀다는 계산이 나온다. 2002년 하반기부터 판매를 시작한 로또는 2003년 ‘광풍’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발적 인기였다. 2003년 4월12일엔 당첨금 이월로 1등 당첨자 한 명이 사상 최대 당첨금인 407억2천만 원을 차지했다. 2월엔 무려 835억9천만 원을 13명이 나눠 가지면서 사재기 열풍이 불기도 했다. 게임당 가격을 2천 원에서 1천원으로 내리면서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경기 회복세가 지연되면서 로또 연간 판매량은 2014년 3조원대 회복 후 꾸준히 증가세다. 복권은 경기가 나쁠수록 소비가 늘어나는 대표적인 ‘불황형 상품’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가상화폐가 새로운 로또로 등극했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화폐 가격이 단기간에 급등해 떼돈 벌었다는 소문이 인터넷과 SNS을 타고 확산됐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엔 가상화폐 투자로 540억 원을 벌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투기 열풍은 가상화폐 거래소가 늘어나고 투자할 수 있는 가상화폐도 확대됨에 따라 과열 양상이다. 온종일 가상화폐 시세만 들여다보는 ‘비트코인 좀비’까지 등장했다. 가상화폐 투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앱 분석업체에 따르면 비트코인 앱 이용자 연령층은 30대가 32.7%로 가장 많고 이어 20대(24.0%), 50대(15.8%) 순이다. 미성년자는 가상화폐 투자가 금지돼 있지만 10대도 6.5%나 됐다. 일확천금의 꿈은 현실의 불안에서 나온다. 취업이 안되고 직장이 안정적이지 못할 때 로또, 주식, 가상화폐가 유혹처럼 등장한다. 기댈 건 로또, 가상화폐 밖에 없다는 식으로, 여기에 몰두하는 사회가 심히 걱정스럽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그냥 쉬는’ 청년들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작년 청년 실업률이 9.9%로 실업률 측정 이래 가장 높다. 체감 실업률은 22.7%다. 이런 가운데 경제활동도 안 하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쉬는 청년이 3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쉬었음’으로 분류된 청년층(15∼29세)이 30만1천명으로 2016년(27만3천명)보다 2만8천명 늘었다. 전체 청년층에서 ‘쉬었음’으로 분류된 이들의 비율도 2016년 2.9%에서 2017년 3.2%로 0.3% 포인트 높아졌다. 비경제활동인구는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이들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일할 의사가 없거나, 일할 능력이 없어 노동 공급에 기여하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한다. 사유는 진학준비, 육아, 가사, 교육기관 통학, 연로, 심신장애, 입대 대기, 쉬었음 등으로 분류된다. 장차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있거나 직·간접적으로 경제활동에 도움을 주는 사유도 있지만 ‘쉬었음’은 이와는 꽤 거리가 있다. 유럽 등에선 교육·직업훈련을 받지도 않고 취업도 하지 않는 젊은층을 의미하는 니트(NEETㆍ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데 ‘쉬었음’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 바로 니트족이다. ‘쉬었음’ 청년층은 취업이 어려운 환경에서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니트족은 구직활동을 해도 안 되니 좌절감을 느끼다가 결국 일자리 구하기를 포기하고 취직 준비조차 단념하는 이들이다. 니트족 외에도 청년층의 취업난을 표현한 신조어들이 많다. 학교를 졸업해 자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어 사는 ‘캥거루족’, 직업을 갖지 않고 평생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프리터족’, 취직과 퇴직을 번갈아가며 계속하는 ‘메뚜기족’이 있다. 인턴과 비정규직, 계약직을 반복하는 ‘비계인’, 취업을 해야 비로소 인류로 진화한다는 ‘취업 인류’도 있다. 공시생과 취업 준비생을 합한 ‘공취생’은 공무원과 일반 기업 가리지 않고 취업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뜻한다. 흙수저 인턴의 줄임말인 ‘흙턴’은 단순노동만 반복하는 인턴을 말한다. ‘호모 스펙타쿠스’는 취업 불안감에 끊임없이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뜻한다. 모두 심각한 취업난을 빗댄 자조 섞인 단어들이다. 취업 자체를 포기한 니트족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정부·기업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니트족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지지대] 중산층이 사라진다

▶한 국가의 경제적 상황을 ‘빈익빈 부익부’라는 용어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라의 중심을 받치는 상당수 국민들은 ‘중산층’이라는 카테고리에 포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산층이 얼마만큼 든든하게 실물 경제를 책임지냐에 따라 한 나라의 경제가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꾸준히 성장할 수도 있기에 그 역할론이 막중해지는 요즘이다. 그런데 그 중산층이 대한민국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난 1997년 IMF 사태가 터졌을 당시, 대한민국이 빠른 속도로 위기를 돌파한 이면에는 중산층이 들고 나온 금붙이와 십시일반 모은 성금이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 땅에 IMF 사태가 터진다면, 그때와 같은 상황이 다시 연출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 중산층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는 이미 1천400조를 넘어서 직장인 상당수의 월급은 은행대출로 빠지기 일쑤이고, 치솟는 물가를 따라 가는 것 조차 버거운 현상이 생겨나며 스스로 중산층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골을 넣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공격수(부익부)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골키퍼(빈익빈)만으로 축구를 할 수 없다. 결국 감독이 어떻게 허리진(중산층)을 강화하느냐에 따라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에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사라져 가고 있는 중산층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경제라는 경연장에서 조별 예선 탈락(국가파산ㆍstate bankruptcy)이라는 고배를 들 것이다. 축구든 나라든 감독의 역할이 중요한 요즘이다. 김규태 사회부 차장

[지지대] 이산가족상봉은 이념보다 우선이다

그분의 고향은 함경남도 풍산군의 한 집성촌이다. 직업은 포수. 길게는 몇 달씩 금강산, 백두산을 누비며 사냥에 나선다. 그가 잡은 사냥감을 장터에 팔고 마을에 돌아오면 나머지 작은 산짐승을 잡아 동네잔치로 한바탕 왁자지껄한다.일제강점기후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낀 그와 친ㆍ인척은 1ㆍ4 후퇴 때 함흥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군의 배에 겨우 올라 월남한다. 거제도까지 간 그의 일행은 북진하는 국군의 뒤를 따랐지만 휴전으로 발이 묶인다. 당시 월남인 대부분 그렇듯이 ‘곧 통일이 될 것’이라는 바람으로 고양시, 현재의 일산신도시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여든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인도에 사는 다섯 살 사루는 홀어머니의 가계를 돕겠다며 형의 잔일에 따라나선다. 밤일에 기차로 이동하는 일이라 반대하는 형에게 막무가내로 우겨 따라나서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해 결국 기차에서 깜빡 잠든다. 눈을 뜨니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곳. 기차역에 홀로 남겨진 사루는 몰려드는 불안감에 엄마와 형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수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 고아원에 들어간 뒤 호주의 한 가정에 입양된다.청년으로 훌쩍 자란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기억을 더듬고 더듬지만 기억나는 것은 형 ‘구뚜’의 이름과 정확하지 않은 동네 이름뿐. 양부모의 격려 끝에 용기를 낸 그는 호주에서 인도까지 7천600㎞의 긴 여정 끝에 어머니를 만난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주름살 가득한 어머니는 ‘기다리면 언젠간 만난다’는 믿음 하나로 아들을 기다리며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로 훗날 영화로 제작돼 가족의 소중함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9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다. 핵 문제로 그간의 경색된 관계가 무색하게 회담장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대화의 창을 열고 군사 당국 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을 큰 성과다. 하지만 인도적 차원에서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개최를 합의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 아직 대화의 시간은 남았다. 이번 설에는 어쩌면 생에 마지막이 될 그분들이 그리운 가족을 만나길 기대한다. 김창학 정치부장

[지지대] 1997 판사·2018 판사

수원지법 방희선 판사의 전화였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곧 판사실로 찾아갔다. 동료 판사와 함께 쓰던 방이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방 판사가 일어섰다. ‘다른 곳으로 가자.’ 동료 판사가 없어야 말할 수 있는 듯했다. 인접한 검찰청 구내매점으로 옮겼다. 방 판사가 말했다. “내가 재임용에 탈락했다고 한다.” 급한 대로 매점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구입해 촬영했다. ‘방 판사 재임용 탈락 단독 인터뷰’라는 이상한 특종이 그렇게 작성됐다. ▶시국 사범 구속 영장 기각으로 정권에 눈에 찍힌 판사였다. 그에게 대법원이 내린 퇴출 명령이었다.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법원장이 ‘당신에게 재임용 탈락이 결정됐다’고 통고한 게 전부다. ‘소명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그런 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더 무서운 건 법원의 ‘단합’이다. 동료 판사 누구도 그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퇴임식? 그런 건 꿈도 못 꿨다. 그 순간부터 ‘방 판사 재임용 탈락’은 수원지법 판사들에게 금기어가 됐다. ▶1997년 3월 18일이다. 그 시절 법원이란 곳이 그랬다. 독재 권력의 횡포에 대한 판단은 각기 다를 수 있다. 방 판사의 진보적 견해에 동의하는 판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판사의 머릿속에만 있어야 했다. 대법원 결정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료였던 방 판사가 쓸쓸히 짐을 싸도, 마지막 인터뷰를 매점으로 쫓겨나가 진행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세상이 변했고 법원도 변했다. 중요 사건에 대한 판사 개인 의견이 거침없이 공개된다. 동료 판사의 판결을 당당히 지적하기도 한다. 대법원장의 처신을 대놓고 비난하기도 한다. 아예 ‘대법원 판례의 구속력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굳이 평가한다면 지금이 옳다. 법관은 스스로 판단한다. 법과 양심이 유일한 판단기준이다. 대법원 입장, 선배 판사들의 결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극히 독립적이어야 할 판사가, 세상 없이 폐쇄된 조직에 사로잡혀 살았던 ‘그 시절’이 문제다. ▶그런데 도를 넘는 듯 하다. 지금 판사들의 익명 게시판이 욕설과 비방으로 도배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도화선이다. 패거리, 개△△, ○뿌리는 인간들…. 저잣거리 패싸움과 다를 게 없다. 판사 내부 게시판이라지만 알 만한 국민이 다 알게 됐다. 판사들이 이렇게 가면 안 될 텐데, 큰일이다. 전체 판사 중 일부의 일탈이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판사 전용망에 접속한 판사 아닌 자의 분탕질이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걱정이다. 김종구 주필

[지지대] 독감 예방 에티켓

독감이 대유행이다. 주변에 콜록콜록 소리가 끊이지 않고, 병원마다 환자로 북새통이다. 독감 예방접종을 했는데 왜 독감에 걸렸냐고 항의하는 이들도 있다. 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급성 호흡기 질환이다. 감기와 마찬가지로 공기를 통해 전염되지만, 원인균과 병의 경과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병이라고 할 수 있다. 감기 증상과 비슷하지만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보통 12월 중순부터 그 다음해 3월 초까지 유행한다. 증상은 환자와 접촉한 후 1~4일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 나타난다. 독감 바이러스는 A, B, C형으로 나눈다. 사람에게 병을 일으키는 것은 A형과 B형이다. 이중 심한 증상이 지속되는 것은 A형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종플루나 홍콩독감, 스페인독감, 러시아독감 등은 A형 독감에서 파생된 것이다. A형 독감은 38도 이상의 고열과 두통, 관절통, 근육통, 콧물, 인후통, 기침 등의 증상이 1주일에서 10일 정도 지속된다. 심한 무기력감이 동반되기도 한다. 유아나 노인 및 질환자 등 면역력이 낮은 사람은 장기화될 수 있고, 폐렴이나 합병증을 유발해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B형 독감은 전파 속도가 느리고 변이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매년 유행하기 보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발생한다. B형 독감도 38도 이상의 발열과 두통, 콧물, 인후통, 기침 등의 증상을 보인다. 구토나 설사 증상도 동반한다. 올해 독감이 유난을 떠는 것은 이례적으로 A형과 B형 독감이 동시 유행하기 때문이다. B형 독감은 보통 A형 독감이 지나가고 2~3월에 유행하는데, 올 겨울엔 B형 독감 환자가 전체 독감 환자의 54%를 차지할 정도로 일찍 찾아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올 겨울 독감 백신을 맞았는데도 독감에 걸리는 것은 백신에 들어있지 않은 유형의 독감 바이러스가 유행해서다. 올해 독감 3가백신에 들어 있는 바이러스 유형은 A형 2종과 B형의 빅토리아 계열 등 3가지다. 그런데 3가백신에 들어 있지 않은 B형 야마가타 계열이 주로 나오면서 백신을 맞은 사람들도 속수무책으로 독감에 걸리고 있다. 아직 독감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백신 주사를 맞는 게 좋다. 백신 주사를 통한 독감 예방 효과는 70~90% 정도다. 손을 자주 씻고,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바이러스는 기침이나 재채기 등을 통해 번진다. 휴지 없이 손바닥에 기침을 하고, 씻지도 않고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 안 된다. 기침이나 열 나는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티슈로 가리고 기침을 하는 에티켓이 필요하다. 노약자는 외출 시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는 게 좋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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