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실종 5일

누구나 다 사생활이 있다. 공개적인 사생활도 있고 은밀한 사생활도 있다. 이것이 인간이며 판사 또한 인간이다. 30대 판사가 행방불명된 지 닷새만에 귀가했다. 그동안 경찰에선 실종사건으로 보고 수사했다. 현직 판사가 결근한 가운데 가족이나 친지도 어딜 간지 아는 이가 하나도 없고 본인과도 연락이 안 되니 실종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 신분이 판사이므로 혹시 원한을 샀거나 다른 일로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간의 판사 실종 언론 보도엔 이같은 우려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무사히 귀가한 것은 참 다행이다. 하지만 화가 좀 난다. “집을 나와 무작정 걷다보니 고속버스 터미널이어서 아무 버스나 타고 잤는 데 깨어보니 부산이었다. 거제도를 한 바퀴 돌고 부산의 찜질방에서 잠을 잤다”는 가출담은 더욱 화나게 한다. 거제도를 한 바퀴 돌고 부산의 찜질방에서 잠을 잔 게 닷새였다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행방불명된 닷새동안 뭘 했던 그건 본인의 자유다. 굳이 공개를 요구할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그동안 사회에 걱정을 끼치고 물의를 일으킨 공인의 책임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있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법원을 비운 닷새는 무단 결근이다. 이미 재판 기일을 잡아놓은 재판에 영향이 없다할 수 없다. 재판기일에 예정된 재판을 못받고 날짜가 밀리는 재판 당사자들의 고통을 짐작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법원의 신뢰성에 흠집을 냈다. 나이 30대 중반이면 한창 총망받는 판사다. 비록 나이가 젊어 인생 경험은 적다하여도 지각은 능히 있다고 보는 직분이다. 어쩌다가 거제도 한 바퀴 도는데 닷새나 걸리는 일이 생겼는 진 몰라도 공인의 처신으로서는 심히 적절치 못하다. 무사 귀환이 반가우면서도 이래서 화가 치민다./ 임양은 주필

DJ의 방북

김대중 전 대통령의 27일 방북이 유동적인 모양이다. 미사일 발사 위협으로 긴장이 고조된 탓이다. 국제사회가 긴장한 이상으로 평양정권 역시 미사일 도박에 긴장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김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반길만큼 한가로울 수 없는 것이 북녘 입장이다. 이 정부 역시 지금 북에 대고 DJ 방북을 말할 계제가 아니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토록 기를 쓰고 가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부가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을 추진할 요량이면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순전히 DJ 개인 자격의 방북으로 치고 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6·15 정상회담 회고를 위한 개인 여행의 평양 방문이 되어서는 하릴없는 노인 나들이 밖에 안 된다. 본인은 “북핵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느니, “통일방안을 논의한다”느니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선 그렇지 않다. 비록 6·15 정상회담 당사자일 지라도 대통령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이면 원로일 뿐 공식으로는 아무 권한이 없다. 이런 분을 앞에 두고 평양정권의 누가 얼마나 성의있게 핵 문제를 말하고 통일문제를 논의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 정상회담을 후세 사가들로부터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미련을 갖는다고 일이 더 잘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재임 중 아마 열 번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재촉했을 것이다. 끝내 안 되다 보니 이젠 퇴임하고 나서 재방북하겠다지만 그게 아니다. 역사에 주연의 무대를 되풀이 해준 역사는 일찍이 없다. 한 시대의 주인공으로 섰던 무대에서 내려왔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과거의 무대에 연연해서는 추하게 비치기가 쉽다. DJ 방북을 과욕의 노탐으로 보는 눈이 있어 안타깝다. / 임양은 주필

평양 사람들

‘6·15 공동선언 발표 6주년 민족통일대축전’(14~17일·광주)은 시종 친북·반미 세력의 한마당 정치 잔치판이었다.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노골적으로 두둔한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 광주 거리를 활보하며 큰 소리쳤다. 내정간섭으로도 모자라 ‘전쟁화염’을 들먹이며 협박까지 했다. 시인 김지하씨 등이 공개 서한을 통해 발언 취소와 사과를 촉구했으나 “해야할 말을 했다”며 시큰둥했다. 행사장은 말끝마다 “우리 민족끼리…”의 구호가 판을 쳤다. “우리 민족끼리 뭉쳐 통일을 이룩하자”고도 했다. 뭉치는 것도 좋고 통일은 더 더욱 좋다. 그럼 어떻게 뭉쳐 통일을 하자는 건가, 저네들 중심으로 뭉쳐 자기네식 체제로 통일해야 한다는 게 ‘우리 민족끼리 뭉쳐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무조건 ‘미제국주의 머슴’이고 ‘반민족주의’로 찍힌다. 6·25가 일주일도 안남았다. 6·25가 얼마나 반민족적 참화인 가를 여기에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문젠 그토록 ‘우리 민족’을 내세우는 위인들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총부릴 댄 6·25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란 사실이다. 6·25에 대한 과거사 정리가 없는 6·15는 겉치레 뿐이다. 겉치레이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그나마도 필요해 대북지원 명목의 돈을 주어가며 평화를 돈으로 사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걸핏하면 떼쓰고 억지부리길 밥 먹듯이 해대다가 급기야는 미사일 도박까지 벌였다. 인민들은 배 곯려도 군사력은 강성대국인 것이 ‘우리 민족’인 저네들이다. 이번에도 친북잔치에 정부는 14억원을 댔다. 평양 사람들이 타고온 고려민항을 전세기로 쳐 약 6천만원을 전세비로 준 것도 이에 포함됐다. 저 사람들을 칙사대접 하듯이 먹이고 재우고한 숙식비용은 더 말할 게 없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평양에 가면 대접받는 것도 아니다. 갈 때마다 숙식비 등을 비롯해 다 지불한다. / 임양은 주필

붉은 물결, 붉은 함성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 때와 지금 열리고 있는 2006년 독일월드컵축구대회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단연 우리나라 응원단 ‘붉은악마’들이다. 응원을 하며 파도타기를 하면 그야말로 붉은물결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붉은악마(RED DEVILS)’라는 명칭이 멕시코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때 4강에 오른 우리나라 선수들이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지침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외국 언론들이 ‘붉은악마들(Red devils)’이라고 칭한 데서 비롯됐음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색(色)’은 각각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고유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붉은색은 자극적인 색으로 사람의 감각과 열정을 자극한다. 힘과 에너지, 생명력, 그리고 흥분감과 연관된다. 붉은색은 또 환희, 행복감, 사랑의 감정 등을 자극한다. 진홍색은 가장 근원적인 육체적, 동물적 본능을 일깨워준다. 인간적이며 따스한 느낌을 지닌 붉은색은 생기가 없거나 혈액순환이 좋지 않을 때 사용되는 색이다. 한의학에서의 붉은색은 오장 중 심장에 해당한다. 심장은 단순히 혈류만 순환시키는 기관이 아니다. ‘심자신명출언(心者神明出焉)’이라 하여 정서기능과 사유기능을 심장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진단과 치료에 응용한다. 평소에 좋아하던 붉은색이 싫어지면 자신감과 의욕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붉은색의 생리적, 정서적 영향을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월드컵축구경기 응원복으로 붉은 티셔츠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7%로 4년 연속 증가한 체감실업률, 이에 따라 높아진 서민의 생활고통지수, 25%를 넘어선 자살증가율,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 특히 국민들을 물심양면으로 괴롭히는 정치 수준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의 열정과 감각을 일깨우는 붉은색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같은 목소리와 같은 구호로 응원을 하거나 지켜보면 즉각 영향을 미쳐 울체된 기가 풀리고 심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축구와 관련해서 만큼은 우리나라 국민의 색은 붉은색이다. 월드컵 응원을 통해 열정을 깨우고 붉은물결 속에서 붉은함성을 질러 기를 소통시키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유익한 일이다. 월드컵축구는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 임병호 논설위원

박지성 선수 심폐기능

월드컵축구대표 의무위원 한승섭 금산한의원 원장이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출정을 앞둔 선수들의 건강검진을 해줬다. 그때 심폐기능이 보통사람에 비해 2~3배가 강해 한 원장을 놀라게 한 선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박지성 선수다. 한 원장은 1993년 5월 축구 황제 마라도나의 고질적인 허리와 다리통증을 치료해 준 명의다. 박지성 선수의 심폐기능이 유난히 강한 것이 6월13일 열린 토고와의 대전에서도 여실히 입증됐다. 전·후반 경기 내내 쉬지 않고 달렸다. 전반 부진했던 한국팀의 공격 전선에서 그나마 활로를 개척하고 간간이 위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던 것은 박지성 덕분이었다. 박지성은 힘들이지 않고 영리하게 공간을 파고 들면서 상대 수비수들을 교란했다. 후반 들어서는 득점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물론 골을 넣은 이천수, 안정환도 잘 했지만 토고전 승리의 1등 공신은 박지성이었다. 토고전에서 나온 대부분의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빠짐없이 박지성이 있었다. 특히 수렁에 빠질 뻔한 이날 경기를 반전시킨 것은 후반 9분 박지성이 돌파하다 상대 수비수로부터 얻은 파울이다. 이 파울로 토고의 수비수 아발로가 퇴장당했고, 이 때 얻은 파울로 이천수가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골을 넣은 이천수의 킥도 좋았지만 역시 박지성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천수의 골도 없었다. 안정환의 추가골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박지성이 있었다. 후반 27분 송종국의 패스가 토고 골문으로 오는 순간 문전에는 박지성과 안정환이 있었다. 이때 박지성이 볼을 잡지 않고 수비수를 달고 옆으로 빠졌다. 안정환이 수비의 압박을 덜 받고 슈팅할 수 있게 만들어준 희생적인 플레이였다. 박지성은 토고전에 앞서 “토고 선수들이 나를 막는 데 집중한다면 우리에겐 기회다. 내가 수비수들을 몰고 다니며 동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말로 출사표를 대신했었다. 박지성은 경기 직전까지 몸상태가 완전하지 않았는데도 공격과 수비의 허리가 되고 ‘심장이 둘 달린 사나이’처럼 종횡무진해 역시 한국팀 최고의 보배임을 알렸다. 평소 “나는 11명 중의 한 명일 뿐”이라며 겸손해 하는 박지성이 19일 열리는 프랑스전에서 또 어떤 활약상을 보여줄 것인가. 기대가 참으로 크다. / 임병호 논설위원

내각 기강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에 당연히 참석해야 할 관계부처 장관들이 ‘다른 일정’ 등을 이유로 불참하는 것은 내각의 기강 해이가 이완된 것으로 볼수 밖에 없다. 지난 달 25일 한명숙 총리가 주재한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위원회’에 당연직 위원인 장관 15명 중 10여 명이 불참하고 대신 차관이나 실·국장을 참석시킨 일은 예삿 일이 아니다. 이날 회의는 올해 교육·복지분야의 109개 사업에 총 4조2천746억원의 투·융자 방안을 논의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해외 출장중인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어쩔 수 없었다해도 다른 경제 각료들은 다수 참석했어야 될 회의였다. 물론 장관이 부득이하게 회의에 불참할 경우 차관 등이 대신 참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해찬 총리 시절에는 장관들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총리 주재 회의에 참석했었다. 10여 명이 한꺼번에 불참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지방선거 기간이라 총리가 당정협의는 물론이고 가능한 한 관계 장관회의도 열지 않았고, 회의를 열더라도 장관들의 참석을 독려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총리실 측의 해명은 너무 저자세다. 또 해외 순방 중인 한명숙 총리와 포르투갈 총리가 9일 회담을 예정보다 30여분 늦게 시작한 것은 탑승자 명단 확인 문제로 항공기 이륙이 1시간 가량 늦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소크라트스 총리의 요청때문인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지만 그러나 총리를 수행 중인 외교부 관계자가 기자단에 미리 설명을 못한 것은 실책이다. 비행기 지연 이륙도 항공사인 에어프랑스 측이 총리 수행원과 영문 표기 이름이 유사한 한국인을 같은 자리에 실수로 배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전에 비행기 좌석배치 명단을 확인하지 못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비행기의 지연 이륙으로 포르투갈 공식 방문의 첫 일정인 포르투갈 대통령 예방시간에 23분이나 늦었다는데 총리실 관계자가 하는 말이 고작 “일정이 늦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총리 전용기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만에 하나라도 여성 총리라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기강 해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3기 신도시 개발론

분당, 화성에 이어 제3기 신도시 개발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김문수 경기지사 당선자가 이를 적극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당선자는 유세 과정에서 “정부가 분당과 일산 개발 이후 10년이 넘도록 강남을 대체할 만한 쾌적한 주거지를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도권 곳곳에 무계획적으로 아파트가 들어섰다”며 “강남 아파트값을 안정시키려면 그만한 아파트를 더 많이 공급해야 하고 수도권 지역의 택지 개발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이러한 신도시 개발론은 지난해 정부의 8.31 부동산 대책에서 밝혔던 수도권 택지 공급 확대정책과도 상통하기에 앞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집중적인 논의와 검토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경제를 활성화시키면서 집값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신도시 건설만큼 효과적인 정책은 없다. 지난 88올림픽이후 급등하던 강남 아파트 가격도 분당, 일산신도시 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92년부터 안정되기 시작하여 1998년 IMF외환위기시까지 장기 안정된 바 있다. 또 신도시 건설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수반하기에 경제 활성화에 커다란 효과를 나타낸다. 최근 한국토지공사에서 신도시 건설의 경제파급 효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생산유발효과는 투자규모의 2.3배, 임금유발효과는 투자규모의 0.34배, 고용유발효과는 1조원당 26,370명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화성동탄, 성남판교, 김포양촌 등 3개 신도시 건설에 따른 생산유발효과만도 총 85조원, 고용유발효과는 22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신도시 건설은 지방재정 확충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신규 주택에 대한 거래세 증가, 종합토지세, 주민세 등 세수 증대로 경기도내 전체에서 신도시의 세수입 비중은 1992년 8.6%에서 1995년 12%로 증가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한편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반대하는 논거의 핵심은 수도권 인구집중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권에 취업기회가 제공되지 않는 한 주택구입을 목적으로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이주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수도권 신도시 건설이 비수도권 지역으로부터 수도권으로의 대규모 인구유입을 촉발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분당, 일산 등 수도권의 5개 신도시 건설에 따른 인구이동효과를 조사한 결과, 수도권 이외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은 전체의 5%미만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향후 제3기 신도시 개발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지금까지의 개발 경험을 토대로 21세기에 걸맞는 미래형 살기좋은 도시를 창출하는 방안에 대해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가지 지난 교훈과 과제를 정리하면, 먼저 현재의 신도시는 자족성이 결여되고 베드타운화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보 통신, 나노기술, 문화산업, 생명공학 등 첨산산업을 중심으로 특화 벤처·연구단지 를 조성해 자족적 소득원을 창출함으로써 외부와의 교통수요를 줄이는 동시에 수도권 전체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허가등 추진 일정에 관한 문제로 기반시설 공급과 상권 형성이 주민 입주에 맞춰 이루어지지 않아 입주 초기 많은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순차적 개발방식과 적절한 경제적 유인제공으로 기반시설의 공급시기를 조정하고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유기적 도입을 통해 도시자족시설 공급을 최적화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래 신도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경우 자연과 유리된 획일적 주거형태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단지설계, 주택유형의 배합, 주거 서비스의 종류 및 수준 등에서 다양한 주택 대안들을 신도시 개발계획에 반영하여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현 도 관 한국토지공사 공보팀장

월드컵 유니폼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등은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업체다. 경기종목별 기구부터 시작하여 각종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모든 스포츠 용품을 만들어 판다. 이들 업체가 자사 제품의 무료납품 입찰을 한다. 주로 유니폼 등 스포츠 의류가 대상이다. 서로가 공짜로 많이 납품하려고 경쟁하다 보니 입찰이 붙는 것이다. 돈을 벌려고 하는 입찰이 아니고 공짜로 주려고 하는 입찰은 아마 이 외엔 없을 것이다. 올림픽대회, 종목별선수권대회, 월드컵대회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귀국 길의 선수들이 으레 공항에서 밀고 나오는 큰 가방속엔 이렇게 받은 스포츠 의류가 가득하다. 아예 가방까지 스포츠용품 업체가 만들어 통째로 넣어서 준다. 독일월드컵 축구대회 현지발 유니폼 소식이 흥미롭다. 이 보도에 의하면 푸마가 32개 본선 출전국 중 가장 많은 11개국의 납품을 따고 나이키는 8개국, 아디다스는 6개국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7개국 납품은 미확인이다) 그런데 대회 백두이긴 하나 푸마 스폰서 유니폼을 입은 팀들이 줄줄이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다. 각 조별 첫 경기에서 패배한 폴란드·파라과이·코트디부아르·이란·앙골라 등이 푸마 유니폼을 입고 뛴 팀들이다. 반면에 첫 승리를 장식한 독일·아르헨티나는 아디다스, 네덜란드·멕시코·포르투칼 등은 나이키 유니폼을 입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승운에 징크스를 무시하지 못하는 승부 세계에선 이 또한 그냥 넘기기 어려운 심리적 기분에 관한 일인 것이다. 어제 밤 심야까지 잠못 이룬 첫 대전 상대의 토고 스폰서는 푸마다. 또 마지막 상대인 스위스도 푸마 유니폼을 입는다. 같은 G조 강호 프랑스는 아디다스 유니폼이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유니폼은 나이키다. 이 역시 또 묘한 우연이다. / 임양은 주필

TV와 월드컵

여기도, 저기도 월드컵 축구다. KBS·MBC·SBS 지상파 3사의 심야시간대가 대체로 이렇다.똑같은 경기를 여기서도 저기서도 방송할 때가 있다. 심지어는 동작 하나가 안 틀린 것 같은 구도의 중계를 여러 곳서 동시에 방송하기도 한다. 전파 낭비다. 그러나 방송사로서는 이유가 있다. 보도에 의하면 한국방송협회(회원사 KBS·MBC·SBS)가 월드컵 국내 중계권을 사들인 금액이 236억원에 해당하는 2천500만 달러라는 것이다. 방송사 입장에선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는 한 달 동안에 본전 이상의 이문을 뽑아야 하는 것이다. 지상파 3사가 예선 3경기에만 잡고 있는 광고수입이 약 75억원이다. 첫 경기인 토고와의 경기에 붙는 광고 단가는 15초에 최고가 2천500만원이다. 우리가 출전하는 경기에만 광고 수입이 붙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 모든 경기의 중계방송에도 광고는 붙는다. 하지만 역시 우리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의 광고 단가가 높은 것은 더 말할 것 없다. 이래서 누구보다 16강 이상의 진출을 염원하는 것이 지상파다. 광고의 이해 관계가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상파 3사는 이번 역시 4강까지 진출하면 1천180억원을 벌어들일 것으로 보고 있다. 중계권료 236억원의 5배를 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 같은 방송사인 데도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개최국 독일에선 개막전의 경우 제2공영방송인 ZAF 한 채널에서만 방영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2개 채널이 전담하면서 재방송은 피하고, 일본 역시 자체에서 방송을 내부 조정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국내 지상파 3사는 월드컵 축구경기만이 아니고 오락 프로그램도 월드컵 축구와 연계시켜 ‘월드컵 흥행’으로 일색화하는 모양이다. 오늘 밤 10시면 토고와의 첫 경기 중계방송이 드디어 시작된다. 이를 안 보고 배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방송사의 중계방송은 좋지만 시청자들을 지나치게 장삿속으로 이용하는 것 같다. / 임양은 주필

외규장각 도서

프랑스와 13년 째 반환을 협상 중인 외규장각 궁중도서 296권은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것이다. 그러니까 1866년(고종3년) 대원군의 천주교도 탄압과 학살로 프랑스 극동함대 로즈 사령관 휘하 군함 7척이 강화도에 상류했다가 40일만에 물러가면서 가져갔다. 이로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약 10년만에 끝났지만 빼앗긴 책은 140년이 되도록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존된 채 아직껏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다. 그는 우리측의 반환 요구에 “도서관 직원과 싸운끝에 겨우 반승락을 받았다”며 반환을 약속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한명숙 국무총리가 외국 순방 중 프랑스에 들린것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 교섭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하게 됐다. 지난 8일 가진 한·프랑스 총리회담에서 프랑스측이 도서의 서울 정례 전시를 전격 제안한 데 대해 한 총리가 “좋은 생각”이라며 수용의사를 밝힌 게 문제가 됐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서울에 한 번씩 가져와 전시를 하겠다는 것은 전시를 마치면 가져간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돌려줄 생각은 없이 여전히 프랑스가 주인 행세를 하겠다는 것으로 우리측의 반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한 총리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좋은 생각”이라고 했는진 모르지만 ‘서울 전시’ 수락은 ‘반환 포기’ 의미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프랑스측 함정일 수 있다. 도서 일로 들려 일을 풀기는 커녕 되레 꼬이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다. 남의 나라 문화재를 약탈해 갔으면서도 국립도서관 직원이 ‘못돌려 준다’며 대통령에게 맞서는가 하면, 서울에서 한 번씩 눈요기나 시켜주겠다며 남의 것으로 주인행세 하려는 것을 보면 원래 나라에 힘이 없어 빼앗긴 우리의 잘못이 크다는 자책을 갖는다. 비록 그렇긴 해도, 영구 반환 협상을 프랑스측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 임양은 주필

제대군인 취업난

군(軍)은 장기 복무자 가운데 20년 이상 복무자 2천여 명, 10~20년 1천여 명, 5~10년 근무한 중기 복무자 3천여 명을 매년 전역시킨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영관급 46세, 위관급 36세, 준·부사관급 51세다. 장교 3천300여 명, 준·부사관 2천600여 명이 매년 제대한다. 문제는 본인이 희망하여 ‘군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제대 후의 ‘살아가는 길’이 막막한 현실이다. 최근 4년간 전역자 중 올 3월 현재 취업자는 2002년 46.4%, 2003년 45.8%, 2004년 42.0%, 2005년 35.2%로 점점 하향세다. 취업에 몇년씩 걸린다는 얘기다. 계급별로는 준·부사관의 당해연도 취업률이 27.4%로 가장 낮고, 연령별로는 35세 미만자의 경우 34.8%로 저조하다. 장군 전역자의 경우 최근 3년간 101명이 전역했으나 취업률은 33.7%에 불과했다. 고위공직자 재취업률이 경제부처의 경우 90%가 넘은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치다. 그래서 국방부는 주로 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군관련 직종에 취업을 지원한다. 2005년 전역자의 경우 예비군 지휘관이 329명으로 가장 많고 군사자문위원·용역관이 192명, 군관련 교수·교관 124명, 복지시설관리요원 120명, 공공기관 51명, 비상기획관 42명, 국방부 산하기관 취업 35명 등이다. 반면 국가보훈처는 민간기업 중심으로 취업을 지원한다. 지난해 540 명의 취업을 지원한 보훈처는 사무관리 분야 162 명, 기술분야 90 명, 보안경비분야 82 명, 서비스·영업 분야에 60 명을 취업시켰다. 정부가 중장기 복무 제대군인들의 사회 연착륙을 돕기 위해 2004년 4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대군인지원위원회를 설치하고 제대군인지원법을 개정, 지난달부터 시행한 것은 군의 사기 진작 차원에서 잘 한 일이다. 국방부도 1997년부터 국방취업지원단을 설치해 군 간부 재취업 주선에 적극 나서고 있고, 보훈처도 2004년 제대군인국을 만들어 중장기 복무자의 진로상담과 취업알선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군인들의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일부 군간부 출신이 군내에서 항상 관리자 지위에 있었던 현역시절을 생각해 재취업을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회가 얼마나 비정한 지 모르는 모양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달걀값

광복 이후 60년간 소비자물가지수는 해마다 21.3%씩 올라 10만9천배로 상승했다. 화폐가치가 11만분의 1로 작아졌다는 얘기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50%씩 뜀박질하던 물가는 1980년대 후반 들어서야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나 광복 직후엔 아주 심했다. 물가상승률은 1~6월 9.4%에서 8~12월에 무려 2,445.5%로 급등했다. 공무원 월급도 1944년에 비해 325%가 올랐지만 뛰는 물가에 비할 바 아니었다. 60년간 개별 물품의 가격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이를 쌀값과 비교해보면 수치가 달라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등급 쌀 80㎏ 한가마니의 도매가격은 1945년 0.2865원에서 지난해 6월 현재 15만8천138원이었다. 이를 기준 삼는다면 쌀 한가마니로 살 수 있는 쇠고기(600g)는 1945년엔 15근이었지만 지난해에는 4.3근에 불과했다. 쌀값으로 본 쇠고기의 상대가격은 60년새 3배 이상 오른 셈이다. 이와 달리 60년 전엔 쇠고기보다 37%나 비쌌던 돼지고기는 이제 쇠고기의 값의 4분의 1이 되면서 신세가 역전됐다. 1945년엔 쌀 한가마니로 돼지고기 11근밖에 못 샀지만 지금은 16.5근을 살 수 있으니 50%정도 값이 떨어진 폭이다. 소줏값도 쌀값에 비교하면 값이 내렸다. 60년 전 쌀 한가마니면 2홉 소주 27병밖에 못 샀지만 지금은 175병을 살 수 있으니 6.5배나 ‘폭락’한 셈이다. 쌀값과 가장 비슷하게 움직인 것은 서울~부산간 기차요금이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쌀 한가마니를 팔면 경부선을 편도로 2.5회 이용할 수 있다. 생필품 가운데 가장 극적인 반전을 보인 품목은 달걀과 북어다. 60년 전만 해도 달걀 1개를 들고 나가면 북어 2마리를 사고도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탈 수 있었다. 달걀은 소풍 가는 날이나 생일 같은 날 먹는 별식이었다. 하지만 요즘 북어 한마리면 달걀 27개를 살 수 있다. 쌀값에 비하면 요즘 달걀값은 60년 전의 16%에 불과하다. 반면 북어값은 11배 이상 폭등했다. 암탉이 달걀을 낳으면 한 개 두 개 쌀독에 보관해 두었다가 한꾸러미가 되면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살이나 자식들 학교에 낼 돈을 마련하시던 어머니의 어진 눈빛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따뜻한데 세상 인심은 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지 서글프다. / 임병호 논설위원

‘전선에서 온 편지’

KBS-1TV 현충일 특집 다큐 ‘전선에서 온 편지’(6일 밤 10~11시)는 근래 보기드문 수작이었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만 3년여에 걸친 처참한 동족상잔의 참화가 그 배경이다. 작품은 이 중 전선에서 온 편지를 소재로 전쟁의 비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이미 반세기가 넘은 사연이 빼곡하게 적힌 남편의 편지지는 누렇게 들떠 삭을 정도인데도, 전쟁 미망인인 아내에겐 이 편지 뭉치가 금덩이 보다 더 값진 것이다. 달덩이 같았던 새댁에게 유복자의 씨를 안기고 전선으로 달려간 남편이 보내곤했던 군사우편이 끊긴 어느날 날아든 전사통지서는 청천벽력이었다. 모진 세월은 흘러 달덩이 같았던 새댁 얼굴은 간곳 없이 깊은 주름살로 골지고 유복자 또한 50대 중반의 중늙은이가 됐다. 남편이 전사한 비무장지대 그 예전의 전선을 찾아 “여보!!” 하고 목놓아 혼백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푸른 산야의 하늘엔 흰구름만 떠돈다. 이토록 평화로운 산간이 포화속에 피비린내 난 전쟁터였으니 죽은 이들은 지금 보는가 아는가, 무심한 바람소리만 휘젓는다. ‘군사우편’ 그것은 당시 남편을 전선에 보낸 많은 아내들의 숱한 기다림이었다. ‘군사우편 찍혀있는 전선 편지를 / 전해주는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 가서 / 복받치는 기쁨에 넘쳐 울었소…’ 6·25전쟁중에 유행됐던 군사우편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의 가사 한 대목이다. 생각해 본다. 이쪽의 전쟁 참화가 이랬으면 저쪽인들 왜 전쟁 참화가 없었겠는가, 북녘사람들 역시 같은 사연이 많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전쟁을 일으켰는가, 전쟁을 일으킨 원초적 잘못에 대한 따짐은 아직껏 한 마디가 없다. 과거사 규명, 역사 바로 세우기는 뭔가, 민족적 불행의 단초는 제쳐두고 곁가지만 두고 말이 많다. ‘전선에서 온 편지’의 다큐,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게 얼마나 큰 죄악인 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임양은 주필

학도병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의 38선 일원에 걸친 남침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사흘만에 함락됐다. 학도병이 최초로 참전한 것은 6월28일 한강방어선이다. 그러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탱크는 고사하고 박격포 하나 변변히 없었던 국군은 수류탄을 품은 육탄으로 탱크를 막았으나 밀리고 또 밀렸다. 수원에서 500여 명의 학생으로 비상학도대가 결성된 것이 6월30일이었고, 이어 수도사단 3사단 등에 배속되어 포항전투 등에 참전했다. 군복도 입지 못했고 군번도 없었다. 그저 총 한자루 쥐고 총격전을 벌이고 때로는 육박전을 벌였다. 학생복 차림에 이마엔 ‘학도병’이라고 쓰인 수건을 동여맨 채 전사한 학생들이 시산혈하를 이루었다. 1950년 10월3일 동료 학생인 전우의 주검으로 살아남은 학도병들이 38선을 넘어 이윽고 북녘 땅으로 진군했다. 전세가 호전되어 학도병들은 다시 학원으로 되돌아가라는 학도의용군 해산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51년 3월6일이다. 6·25전쟁 당시 경기도에서 자원한 학도병은 수원중학교(이땐 고등학교가 없었다)를 비롯한 37개교에서 220여 명이다. 전국적으로 2천여 명이 참전하여 1천500여 명이 전사했다. ‘군인 아닌 학도의 몸으로 / 옥이 되어 부서져 버렸네 / 찬란하다 이 나라 소년의 의기 / 서릿빛 무지개 되어 이 땅 청산마다 길이 꽂혔네’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원로 문인이 ‘전몰 학도의용병’에게 바친 추모시의 몇 구절이다. 수원고등학교 학생들이 6·25 당시 참전한 전몰 학도병 기념비 앞에서 ‘꽃다운 젊은 생을 조국에 바친 선배들을 추념했다’는 본지 보도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자랑스런 선배에 자랑스런 후배들을 보는 것 같아 눈시울을 적신다. 아! 이름모를 산야에서 산화한 학도병들이여, 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압니다, 편히 잠드소서. / 임양은 주필

‘진대제’

1995년 6월27일 처음 시작된 경기도지사 선거엔 선거 때마다 묘한 징크스가 있었다. 민선 지사를 네 번 선출한 4기(期)가 다 이랬다. 이인제 지사 선출때는 관선 지사였던 임사빈씨가 라이벌이었다. 이인제 전 국회의원은 민자당, 임사빈씨는 무소속으로 나왔다. 임사빈 전 지사가 떨어지긴 했지만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관선 지사로까지 입신한 전설적 인물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됐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임창열 지사(국민회의)가 당선됐을 시엔 손학규 전 국회의원(한나라당)이 라이벌이었다. 손학규 전 의원은 이 때 비록 실패했지만 매우 아까운 인물로 평가됐었다. 재기에 나선 손학규 전 복지부 장관이 경기도지사로 당선됐을 당시의 라이벌은 진념 전 부총리(민주당)였다. 진념 전 부총리 또한 낙선하긴 했어도 해박한 식견을 지녔다는 말을 들었다.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는 3선의 김문수 전 국회의원(한나라당)이 라이벌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열린우리당)을 물리치고 경기도지사로 당선됐다. 그런데 도지사 선거 때마다 당선자도 훌륭하지만 낙선자 역시 아까웠던 것 처럼, 이번의 진대제 후보 또한 같은 말이 들린다. “진 후보에게 표는 안 주었지만 사람은 아까운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적잖다. 득표율이 30% 대 인 것도 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인간 ‘진대제’는 도전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어렸을 적엔 가난과 싸웠고 국비 유학을 다녀온 뒤엔 반도체와 씨름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신화를 이루어 삼성전자 CEO를 거쳐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장수하다가,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장관직을 그만 두었다. 실패를 몰랐던 인생에서 첫 실패의 쓴잔을 경험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의 거취를 주목하는 눈이 많다. 본인 역시 정치·기업·학계 중 선택을 미루고 심신을 쉴 겸해서 장고하는 것 같다. KAIST 같은 학계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임양은 주필

열린우리당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사퇴로 항로를 잃은 당이 김근태 최고위원으로 조타수를 잡도록 가닥을 잡는 것 같더니 무산됐다. 창당된 지 3년도 안되어 바뀐 당의장이 여덟 명인데도 이 모양이다. 정동영 전 의장이 죄가 있다면 3개월 전 전당대회 때 1등으로 의장에 뽑힌 게 죄다. 그때 2등이었던 김근태 최고위원이 1등이었더라면 이번의 정동영 의장 같은 입장이 됐을 게 분명하다. 아니 이미 그때부터 지금의 사태가 올 것으로 보는 정가의 관측통이 있었다. 그런데 당이 ‘비대위’ 체제로 간다 해도 진로에 무슨 뾰족한 수가 당장 있는 것도 아니다. 적잖은 당 소속의원들은 정부의 경제 실정이 민심이반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지만 청와대측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문희상 전 당의장은 “정부 여당에 대한 국민의 탄핵”이라고 말하고, 김두관 최고위원은 “선거 참패엔 노 대통령의 책임이 있다”고도 하는 등 전례없는 직언이 쏟아졌지만 쇠 귀에 경 읽기다. 이런 가운데 김혁규 조배숙 최고위원이 사퇴하고 나서 당헌상 최고위원이 세 명이나 비어 지도부가 와해됐다. 과거 노무현 정권을 태동시킨 광주·전남지역의 민심조차 이번 선거에선 민주당으로 되돌아가 열린우리당은 맥을 추지 못했다. 행정도시다 뭐다 해가며 공 들였던 충청권에서조차 약발을 받지 못한 채 고배를 들어야 했다. 개혁을 빙자한 독선의 말잔치만 요란한 무능 정권에 들러리 노릇만 해온 결과가 오늘의 열린우리당 신세다. 한나라당이라고 뭘 잘 한 게 있는가, 이런 야당 하나 당하지 못하고 제 풀에 자멸하여 재기마저 불투명하다. 만약 열린우리당이 앞으로 분당을 하는 사태가 오게 되면 분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태생적 숙명일 것이다. 예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사라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처음부터 앞 길이 뻔했다. 요즘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노무현 대통령 독대가 유별나게 잦은 것 같다. / 임양은 주필

解語花·3

평양(平壤)은 옛적 ‘색향(色鄕)’으로 불리던 곳이다. ‘녹파잡기’는 고려 중기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평양을 무대로 쓴 시 ‘송인(送人)’ 중 마지막 구절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딴 것으로 명지대 안대회(한국한문학)교수가 최근 찾아냈다. ‘녹파잡기’는 개성 명문가 출신의 시인 한재낙(韓在洛·생몰연대 미상)이 평양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산문인데 풍속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한재낙은 개성의 자연·사적 등을 기록한 ‘고려고도징(高麗古都?)’을 썼던 조선 정조·순조 무렵의 저명한 학자인 한재렴(韓在濂·1775~1818)의 친동생이다. 한재낙은 자신이 만난 평양 기생들을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인용하자면 이렇다. “봄날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화월(花月)은 비단 주렴을 걷어 달빛을 방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라 했다. 함께 대동문 성루에 올랐다. … 그녀는 은비녀를 뽑아 난간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구슬을 꿴 듯 청아하게 반공에 솟아 감돌았다. 모래밭의 갈매기는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지나가던 구름은 멈춰서 노래를 듣는 듯 하였다.” “영희(英姬)는 빼어난 미모에 가무를 잘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주렴을 걸고 서안(書案)을 놓고 자기와 서화를 진열하고 온종일 향을 사르며 단정히 앉아 있다. 방문 앞을 지나가도 적적하여 사람이 없는 듯 하다. 난초 그리기를 즐겨 옛사람의 필의(筆意)를 깊이 터득했다.” “경연(輕燕)은 복사꽃이 얼굴에 서려 있고, 곱게 세련된 자태가 뛰어나다.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문장이 이렇게 유려하다. 아마 기생들도 마음을 주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한재낙은 기생을 기예와 서화를 겸비한 예술인으로 묘사했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영주선”이나 “자태가 풍성하고 풍류가 세련된 죽엽” 등 “붓으로 노래하고 먹으로 춤을 추는 평양 기생”을 67명이나 만나 대동강변을 거닐거나 부벽루 또는 달빛이 저고리에 스며드는 기방에서 주흥과 정담을 나눴을 한재낙이야말로 진정한 풍류객이다. 오늘날도 ‘녹파잡기’에 나오는 ‘해어화(解語花)’ 같은 여인들이 있는 지 모르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解語花·2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계량),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내 언제 무신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대 /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황진이), “어져 내 일이여, 그럴 줄을 모르더냐. / 있으라 하더면 기랴마는 제 구태여 /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황진이), “꿈에 뵈는 임이 신의 없다 하건마는 / 탐탐히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보리. / 저 임아, 꿈이라 말고 자주자주 뵈시소.”(명옥), ”매화 옛 등걸에 봄절이 돌아오니 / 옛 피던 가지에 피염직도 하다마는 /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매화),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손데. /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홍랑),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 원앙침 바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한우)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시조작품을 쓴 사람들은 기생들이다.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뿐 아니라 한시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이며 명신인 허균·이귀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조선 중종 때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詩碑)를 세워주었다.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기생들이 상당수에 이르는데 그녀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情恨)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녀들의 작품으로 보여지는데 얼마전 19세기 전반 평양의 기생 67명과 기방 주변의 남성 5명의 삶을 그린 산문 소품 ‘綠派雜記’가 공개됐다. 환락적 풍모나 ‘성 노리개’식의 부정적 인상과는 거리가 먼 기생들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예혼을 불러 일으킨다. / 임병호 논설위원

解語花·1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에서 기생(妓生)은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됐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인데,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든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이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일 이들이 남녀노비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司祭)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 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성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游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또 조선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 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기생이 병들어 제 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했다. 고전소설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생이 되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기생은 조선사회에서 양민도 못되는 이른바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노리개를 찰 수 있었고,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 또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 기생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 임병호 논설위원

꽃게 ‘금게’

꽃게철이다. 연중 육질이 가장 꽉 차고 찐 맛이 또한 쫄깃한 게 담백하면서 감칠맛이 더 한다. 맛도 좋지만 동의보감은 열기를 푸는 식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해 중부 이북을 제외한 전 연안에 분포됐으나 모래질과 진흙질이 많은 서해 연안에서 많이 생산된다. 서해 연안에서는 꽃게가 밀물 때 헤엄쳐 들어오고 썰물 때 헤엄쳐 나가는 습성을 이용해 조간대(潮間帶·만조시 해안선과 간조시 해안선 사이의 부분)에 돌로 팔자(八字) 모양의 둑을 만든 곳에 발을 쳐 잡곤 하였다. 다른 게는 헤엄을 못치는데 꽃게만은 부채같은 양쪽 앞다리로 헤엄치는 특성을 지녔다. 그러나 발을 쳐 꽃게를 잡던 것은 옛날이고 지금은 자망(刺網)으로 잡기도 무척 힘들다. 서해의 생태계 변화로 꽃게가 귀해져 화성 앞바다에서도 많이 잡히던 게 이젠 전과 같지 않다. 이러다 보니 값이 높아져 꽃게 활어 한 마리가 돈 만원 가기 예사다. 값은 고하 간에 우선 꽃게 구경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지금도 많이 잡히긴 하지만 우리 어선보다 중국 어선이 더 설친다. 우리의 어선이 제약받는 어로 한계선을 중국 어선이 넘나들면서 그야말로 싹쓸이해가는 것으로 들린다. 수십 척도 아닌 수백 척씩 선단을 이루는 중국 어선은 그 위세가 여간 대단한 게 아니다. 어쩌다가 우리의 바다에서 우리의 어선이 제대로 못잡는 꽃게를 중국 어선이 싹쓸이 해가게 됐는지 정말 안타깝다. 남북회담 남북경협은 뭣 때문에 하는가, 작심하면 될 손쉬운 이런 어로 문제 하나 해결못해 중국만 좋은 일 시키면서 무슨 민족공조를 말하는 지 모르겠다. 연평도는 조기 잡이로도 유명했다. 해상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이 파시(波市)로, 연평 조기파시는 전국적인 명물이었다. 또 하나의 연평도 특산물인 꽃게 잡이가 제대로 돼야 한다. 우리 어선의 어로 제한은 언제쯤 풀릴 것인지, 꽃게철에 꽃게가 귀하다. 꽃게가 ‘금게’다./ 임양은 주필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