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태이너’

아나운서, 특히 여성 아나운서의 연예인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뉴스를 전달하는 당초의 영역에서 각종 오락프로그램 등 진행으로 보여주는 변신의 면모가 활발하다. 섹시한 화보의 모델로도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스 코리아 진으로 뽑힌 김주희 SBS 아나운서의 비키니 차림을 두고 KBS와 MBC 일부에서 아나운서의 정체성을 제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KBS나 MBC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성 아나운서의 탤런트, 즉 연예인화는 일종의 추세다. 일본이나 미국같은 데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나온 신조어가 ‘아나태이너’(annotainer)다. 아나운서(announcer)와 연예인인 엔터테이너(entertainer)의 합성어인 것이다. ‘탤런트 아나운서’란 말이 원래 있긴 있다. 특정 방송사 직원이 아닌 자유계약의 아나운서로 프리랜서다. 지금도 프리랜서인 ‘탤런트 아나운서’가 있지만 이들이 맡는 프로그램이 보도성 보단 대부분이 토크쇼나 연예프로인 점에서 역시 ‘아나태이너’ 들이다. 탤런트(talent)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탤랜턴(talanton)으로 저울에 속하는 천평(天秤)을 뜻한다. 그런데 저울의 중량단위 개념이 화폐단위로 변하면서 중세기 말엔 재능이란 의미로 또 달라졌다. 돈 버는 재능을 뜻했던 탤런트가 오늘날 고소득자인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말하는 탤런트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좁은 의미의 탤런트는 연기자에 국한하지만, 재인(才人)의 뜻을 크게 본 넓은 의미에선 인기있는 방송출연자는 다 탤런트다. 따라서 탤런트는 인기를 방송의 생명으로 하고 인기는 팬이 가름한다. 팬(fan)은 라틴어의 ‘패낵티커스’(fanaticus)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신전에서 열광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영어화하면서 광신자란 말로 패내틱(fanatic)이 됐다가 절미어(切尾語)인 팬(fan)이 된 것이다. 이러므로 팬이 없는 탤런트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설 입지가 좁다. 아나운서의 탤런트연예인화도 마찬가지다. 이의 신조어인 ‘아나태이너’ 역시 팬을 의식한다. 시청률을 다투는 방송에서 방송가 일각이 아나운서와 연예인의 품격을 애써 달리 해보이려는 건 허구다. / 임양은 주필

손학규의 질타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려놓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가 나서서 도박을 제도화하고 국민을 도박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나쁜놈들”이라고 했다. “서민을 팔아 정권을 잡고 그 불쌍한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나라를 거덜내는 이 패륜아들을 어찌해야 하느냐”고도 했다. 이러면서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서도 재벌의 등은 처먹었지만 서민들 호주머니를 이런식으로 긁어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엊그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이같은 대 정부 질타는 민생현장의 소리다. ‘100일민심대장정’으로 전국의 민생현장을 돌고 있는 그의 질타는 민중의 절규인 것이다. “새벽 3시에 선원 8명을 태우고 나갔다와서 손에 쥐는 고기 값이 22만원이다”라며 “찌들대로 찌들게 만들어 놓고는 절망에 빠진 서민들을 도박장으로 유인했다”고 했다. 전작권 문제에도 “지금 전작권 회수가 뭐가 그리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라고 나라를 혼란과 분열로 몰아넣고 있느냐”면서 “정부는 (전작권 논의의) 정력과 돈으로 서민경제 회복에 힘써야하며… 청년들에게 일자리 만들어주는 일부터 앞장서라”고 했다. 그런데 이와는 거리가 먼 얘기가 또 있다. “‘바다이야기’ 사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책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까지 되도록 모르고 있었는지 부끄러울 뿐”이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4일 청와대서 열린우리당 일부 재선 의원들과 가진 만찬 자리에서다. 대통령은 21일의 국무회의에선 한명숙 총리에게 “게이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데 이어 국무위원들에게 ‘자신있게 대처해달라’고 했다. 민생문제엔 평소 큰 틀로 보아 우리의 경제는 괜찮다고 보는 것이 대통령의 경제관이다. ‘바다이야기’는 (직접) 서민의 피를 이 정권이 빨아먹은 게 아니라는 것이 아직까지 보는 게이트가 아니란 논리인 것 같다. 다만 (누군가에게)서민의 피를 빨아먹게 한 것을 잘못으로 보고, 그래서 총리의 대국민사과를 검토하는 것으로 들리지만 (사과의)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오늘 갖는 한나라당경기도당위원장 경선이 ‘친박’ ‘반박’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닫는 가운데도 이에 초연한 채 민심의 강줄기를 따라 함께 가고 있다. /임양은 주필

윤(閏) 7월

지구가 태양을 일주하는 덴 365일5시간48분46초 걸린다. 일 수를 뺀 시간 단위의 단수를 모아 만드는 것이 윤일(閏日)과 윤달이다. 태양역은 4년마다 한 번 2월을 29일로 하루를 윤일로 정해 늘린다. 태음력은 평년을 354일로 정하기 때문에 5년에 두 번의 비율로 1년을 13개월로 하여 계절과 역월(曆月)을 조정한다. 그런데 윤달은 음력 5월에 가장 많고 동지섣달엔 없다. 남의 빚돈 떼어먹는단 말로 ‘윤동짓달 초하룻날 갚겠다’는 속담이 이래서 나왔다. 이런 날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핸 음력으로 윤달이 든 해다. 7월이 윤달이어서 지난 24일 두 번째 7월1일이 시작됐다. 윤달을 ‘여벌달’ ‘공달’ ‘덤달’이라고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란 책은 연중 행사며 풍습을 설명한 고서다. 조선조 순조 때 홍석모라는 이가 편찬했다. 이 책자에 윤달 풍습이 기록된 게 전래 풍습과 같다고 한다.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달엔 이것 저것을 가리는 생활풍습이지만 윤달엔 뭘 해도 통티가 안 난다는 것이다. 예컨대 윤달이 아니면 집안에 못을 쳐도 방위를 봐야하고, 집수리나 이사도 날을 가려야 하고 산소를 손보거나 이장을 하는것도 까다롭고, 혼사도 택일을 해야하지만 윤달엔 아무 날이나 마음대로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노인의 수의(壽衣)를 만들어두는 것도 윤달에 하면 좋다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엔 ‘윤달에는 무슨 일을 해도 꺼리지 않는다’고 적혔다고 한다. 기전(畿甸·경기도) 지방에서는 ‘윤달에 세 번 절에 가면 모든 액이 소멸돼 복이 온다하여 명산대찰을 찾는 부녀자들이 많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이런 저런 풍습을 지금 세상에선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지만 분명한 것은 계절의 흐름이다. 엊그제까지 삶아대던 날씨가 아침 저녁으로는 달라져 가을의 문턱을 실감케 한다. 인간의 세상사는 분분해도 대자연은 흐트러짐이 없다. 올 추석은 추분(秋分)을 지나 한로(寒露)를 이틀 앞둔 오는 10월6일이다. / 임양은 주필

무궁화 차(茶)

“무궁화의 약성(藥性)은 순하고 독이 없으며, 장풍(일종의 치질)과 사혈(썩은 피)을 멎게 하고, 설사 후 갈증이 심할 때 달여 마시면 효과가 있는데 졸음이 온다. 사풍(일종의 피부병)에는 볶아서 먹거나 차(茶)처럼 달여서 무시로 마시면 낫는다.” 조선시대 명의(名醫) 허준(許浚·?~1615)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편 목근조에 기록돼 있는 내용이다. 현대에 와서 무궁화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뿌리껍질에는 탄닌산, 꽃에는 사포닌, 종자에는 말발산, 세루쿨산 등이 들었다고 한다. 한방에서 무궁화의 줄기와 뿌리는 청열약(열을 내리는 약)으로 쓰이는데 이질· 탈항· 옴· 치질· 무좀의 치료에도 이용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무궁화 잎을 따서 나물이나 국으로 조리해 먹었다. 무궁화가 차나 약재 떡 등으로 쓰였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무궁화를 식용으로 활용했다. 유럽과 중국에서는 100여년 전부터 잎과 꽃을 차로 우려내 마셨으며, 일본에선 궁중요리의 향신제로 무궁화 꽃봉오리를 익혀 사용하기도 했다. 무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유명했다.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을 무궁화에 비유했고, 서양에서도 이집트의 아름다운 신 ‘히비스’를 닮았다 하여 무궁화의 학명을 ‘히비스커스 시리아커스’라고 붙였다. 그 이전엔 알테아 로지아(Althea Rosea)로 불리기도 했다. 알테아는 그리스어로 ‘치료하다’는 의미이며 로지아는 장미를 뜻한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치료효과도 지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궁화 차를 만들려면 꽃이 피기 전 맑은 날을 골라 채취한 다음 꽃술은 버리고 그늘에 잘 말려 보관해야 한다. 차 재료를 15~20g씩 500㏄의 물에 넣어 은근한 불에 달여 하루 세 번 마신다. 꽃을 약간 볶아 가루를 내 마실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끓인 물 1잔에 한 숟갈씩 넣어 마시면 좋다. 식성에 따라 설탕이나 꿀을 타서 마시면 더욱 좋다. 무궁화차를 꾸준히 마시면 이질, 하혈에 특효가 있고 이뇨작용도 돕는다. 대장염, 설사에 유효하고 중풍 예방에도 좋다. 만병통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웰빙시대를 맞아 무궁화차가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을 것 같다. / 임병호 논설위원

무궁화 문양

세계적 검색 포털 ‘구글(Googie)’의 홈페이지에는 매년 8월 15일이면 무궁화 장식 로고가 뜬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전세계 100여개에 이르는 구글의 국가별 홈페이지 관리를 맡고 있는 웹마스터 황정목씨가 전세계에 광복절을 알리기 위해 2001년 만든 디자인이다. 무궁화는 이렇게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널리 활용된다. 무궁화 디자인을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품은 우표다. 2004년 11월 1일 우표 요금이 인상되면서 새 우표로 대거 교체 발행됐을 때, 흰색과 분홍색의 무궁화 디자인이 본격 채택됐다. 190원, 220원, 240원, 310원권 등 4종의 우표에 선명하게 찍힌 무궁화 그림은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한국의 꽃을 알린다. 우리나라 정부를 상징하는 로고는 무궁화 한 가운데 ‘정부’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국회를 상징하는 금배지도 무궁화 모양을 기본 디자인으로 중앙에 한자로 나라 국(國)자를 새겼다. 전국의 광역의회 역시 예규로 1998년부터 휘장 규정을 두었다. 휘장은 무궁화 형상으로, 배지도 무궁화 테두리 가운데 ‘의(議)’자를 새기도록 했다. 군·경의 각종 계급장에도 무궁화가 사용된다. 경찰의 경우 일선 경찰서의 반장에 해당하는 경위부터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치안총감까지 간부들만이 무궁화 계급장을 달 수 있다. 호국에 진력하는 군에서도 무궁화가 두루 쓰인다. 영관급 지휘관들이 무궁화 계급장을 착용하고 있고, 매년 한차례 전군 장성이 참석하는 회의도 ‘무궁화회의’다. 교통수단의 명칭에도 무궁화가 애용된다. 1961년 군사정권이 애국심을 강조하기 위해 경부선 열차에 ‘무궁화호’라는 이름을 붙인 이후 무궁화호는 40년 이상 고급 열차의 명맥을 이어 왔다. 영해를 지키며 어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해양경찰청 어업순시선과 해양수산부 지도선박의 이름도 무궁화다. 우리의 첫 통신위성도 무궁화의 명칭을 사용했다. 1995년 KT는 한국최초의 통신방송용 위성의 이름을 무궁화로 지었다. 상업 통신용으로 무궁화위성 3개가 발사됐으며 지난 22일 낮 12시 27분 민·군 겸용 통신위성 ‘무궁화 5호’가 태평양 해상에서 성공리에 발사됐다. 무궁화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곁에 있다. / 임병호 논설위원

고구려 여성

소서노(召西奴)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 동명왕)의 부인이다. 유교사관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최초의 왕비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단순하게 기록했지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이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로 높게 평가했다. 소서노는 압록강변 졸본부여 계루부족장 연타발의 딸이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망명한 8세 연하의 주몽을 만난 뒤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기원전 18년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자신의 아들인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그리고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慰禮城·한강유역)에 백제를 건국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두 나라를 세운 여걸이었다. 유화(柳花) 부인은 주몽의 어머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연애결혼을 해 아버지의 미움을 샀다.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아이를 임신한 뒤 아버지인 하백(河伯)한테 쫓겨났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엔 국모로 숭상 받으며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호국신으로 떠받들어졌다.(강영경,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 여성의 역할과 지위’). 고구려 여성들은 전투력의 상징인 말을 즐겨 탔다는 풀이가 있는데, 유화 부인도 말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는 유화부인이 부여를 탈출하는 아들(주몽)에게 준마를 직접 골라준다. 우리나라는 한 많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보려는 시각이 많지만 그러나 고대 여성들은 강인한 힘과 생명력과 포용력을 품고 있었다. 소서노처럼 활을 다루고 말을 타는 등 무예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재물을 모은 창고도 갖고 있었다. 중국 현지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오녀산성(졸본성)만 보더라도 다섯명의 여성이 적군 500여명을 물리친 뒤 이름이 붙여져, 고구려 여성들의 기개를 입증한다. 전설과 상상력을 가미해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있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맞서 방영되는 TV 드라마 중 소서노가 등장하는 MBC의 ‘주몽’이 재미를 더해 준다.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SBS의 ‘연개소문’ 또한 그러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토종여우

여우는 사악한 동물로 평판났다. 여우에 관한 설화가 거의 다 이렇다. 천년묵어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공동묘지에서 야반에 나타나 밤길 가는 남자를 유혹한 끝에 해를 입힌다는 구전설화가 많다. 여우는 굴속에서 살지만 굴을 직접 파진 않는다. 다른 짐승이 애써 파놓은 굴에 주인이 없는 틈에 들어가 오줌을 싸놓는 등 분탕질을 한다. 주인이 돌아와 보면 정나미가 떨어져 더 살 마음이 없게 된다. 특히 여우의 항문에서 분비된 노린내는 견딜 수 없어 그만 굴을 포기하고 떠나면 여우가 유유히 입주하는 것이다. 오소리 굴이 이런 피해를 곧잘 입는다. 여우가 사악한 동물로 인식된 것은 교활성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산야에 여우가 있었다. 그 무렵의 여우목도리는 값이 꽤나 비쌌다. 머리에서 팔 다리며 꼬리 등 몸체가 그대로인 여우목도리는 목에 둘러 여우 입에 꼬리가 물리도록 됐다. 돈 많은 부인네들의 겨울철 최고 사치품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고비로 여우가 사라졌다. 조선호랑이 반달곰 같은 전래 동물과 함께 포화속에 여우도 자취를 감췄다. 토종 여우는 ‘붉은여우’다. 일본산 여우와 북방 여우와의 중간색 형으로 몸체의 윗털이 적갈색이다. 암수 한 쌍이 함께 생활한다. 겨울에 짝을 지어 50여일의 임신기간을 거쳐 초산은 서너마리, 초산 이후에는 대여섯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수컷은 암컷 옆에서 새끼들이 가을철에 독립할 때까지 양육을 거들며 들쥐 산토끼 고슴도치 등 먹이를 사냥해 댄다. 지난달 29일 성남 남한산성 도로에서 발견된 두 살이 채 안된 여우가 서울대공원의 유전자 감식결과 토종인 ‘붉은여우’로 밝혀졌다고 한다. 지난번 2004년 강원도 양구에서 토종 여우가 죽은 채 발견되어 안타깝게 하더니 이번에는 산 토종여우가 나타난 것이다. 궁금한 것은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 하는 경로다. 국내산이 아닌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녘에서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린 여우가 지뢰밭 투성인 휴전선을 무사히 넘어온 것이 대견하다. 서울대 공원에서 영양식을 하며 안정을 찾는 중이다. 진객이다. 건강하게 자라기 바란다./ 임양은 주필

개혁과 부패

타이완의 국민당은 87년이 된 정당이다. 1919년 쑨원(孫文)이 민족·민권·민생 등 삼민주의를 표방하며 창당했다. 국민당은 치앙 치에 쉬(蔣介石) 중국 국민정부를 지배했다. 1949년 12월 마오 쩌 뚱(毛澤東) 중국 공산당 혁명군에게 쫓겨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이동했다. 대만에서도 국민당은 여전히 집권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쫓겨난 것은 극도의 부패때문이었다. 대만에서까지 계속된 국민당 80년 집권을 무너뜨린 사람이 민진당의 천 수 이볜(陳水扁) 현 대만 총통이다. 개혁정책을 내건 민진당은 국민당에 식상한 대만 민중들의 열화같은 지지속에 천 수 이볜을 정권교체에 성공한 새 총통으로 당선시켰다. 새로운 이미지가 분명한 천 수 이볜 총통은 대만 민중의 호프였다. 이러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면서 점차 실망으로 돌아섰다. 인사는 측근 인사에 치우치고 개혁은 실종됐다. 대만 사회의 혼란을 가져왔다. 비리가 잇따랐다. 부패정권은 마침내 딸 사위 등 가족비리가 터지면서 민중 정서는 실망에서 분노로 폭발했다. 벌써 수개월 째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과거의 동지들이 총통 하야를 들고 나섰다. 민주화 동지인 스 밍 더(施明德)전 민진당 주석이 ‘100만명 천 총통 퇴진행동’을 결성한 것이 최근이다. 오는 9월 초순 타이베이에서 대대적인 하야촉구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에 필요한 자금 조달책으로 벌인 단 며칠간의 기부캠페인에 우리 돈으로 7억원 이상이 모금됐다. 친여 문화계 인사 100여명이 천 총통 하야촉구 대열과 함께 하면서 ‘천 수 이볜 퇴진의 노래’가 보급되고 있다. 상당 수의 친여 학자들도 천 총통에게 등을 돌렸다. 국민의 지지도 하락을 애써 무시해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마침내 10%대로 떨어지자 비로소 ‘고민된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왜 그런지 모른다는 것이다. “뭘 잘못했는지 꼽아봐라”고 했다. 하긴 국민의식이 뒤쳐져서 앞서가는 대통령을 몰라 본다고 한 수석비서도 있었다. 대통령은 성인오락실과 상품권만이 집권기에 발생한 문제로 아는 것 같은데 청와대는 이도 별 것이 아니란 투다. 민중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다. / 임양은 주필

내정간섭, 핵 실험

“개혁 성격을 변질시키고… 극우 보수세력의 꼴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이쪽 진보세력의 비난이 아니다. 근래 있었던 저쪽 평양방송의 힐난이다. 요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저쪽 사람들 음해의 입방아 대상에 올랐다. 6월항쟁 19주년 기념식에서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더 이상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한데 대해 개혁에서 후퇴하고 있다며 이같이 방송했다. 남북관계, 전교조, 사학법 등 정책 발언에도 “한나라당과 타협하는 등 변질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트집잡았다. 이 방송은 북녘 주간지 12일자 통일신보에 실린 ‘민심을 잃는 것은 자멸의 길이다’란 제하의 논평 전문을 소개한 것이다. 평양방송은 이러면서 김 의장을 가리며 “북남 관계를 6·15 이전 시기로 되돌려 세우려는 반민족 반통일적 범죄행위를 한다”고 몰아 부쳤다. 당사자인 김 의장은 실로 가당치 않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옆에서 보아도 말이 되지않는 어거지 소리란 판단을 갖는다. 이러다간 김 의장이 근래 재계와 노동계에 공 들이는 뉴딜정책도 자본에 영합하는 반개혁행위라는 비난을 할 공산이 높다. 말 같지 않는 저 사람들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저들이 남남 갈등의 조장을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고 있는가를 가름하기 위해서다. 이쪽 사회의 분열을 이른바 ‘남조선 혁명의 성숙’으로 보고 있는 것이 조선로동당 대남전략의 기조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내정 간섭이란 사실이다. 이미 여러 경로로 남북간에 서로의 체제를 인정키로 했다. 지난번 남북장관급부산회담에서도 같은 말이 있었다. 내정간섭은 이런 합의사항의 위배다. 이쪽에서는 관계 악화를 고려해 세계가 문제삼는 저쪽 인권 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다. 한국전쟁 도발의 책임도 따지지 않고 있다. 납북자 문제도 미루고 있다. 이런데도 저쪽은 틈만 나면 비방 일관으로 대남 내정 간섭을 일삼는다. 이래도 저쪽 사람들을 두둔하는 이쪽 사람들이 있다. 저쪽 사람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감상적 허점이다. 절대 불변의 전략에 무한 가변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평양 정권이다. 이젠 지하 핵 실험설까지 나오는 판이다./ 임양은 주필

무궁화

무궁화(無窮花)가 나라꽃이 된 것은 이 꽃의 속성이 우리의 민족 정신과 닮았기 때문이겠다. 무궁화는 다년생 목본이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택하지 않고, 장대하고 오랜 누림을 값진 값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민족정신과 상통한다. 예부터 우리는 밝고, 맑음 그리고 그것의 근원인 하늘과 태양을 숭앙하는 겨레로 살아왔다. 무궁화의 종류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너른 흰 꽃 바탕에 짙붉은 화심(花心)을 가진 꽃을 특히 사랑했다. 백의를 숭상하는 우리 민족성 때문이겠다. 무궁화가 대개 7월부터 찬바람이 부는 10월 하순까지 계속 필 만큼 화기(花期)가 긴 것도 누대로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력을 자랑해 온 우리 민족의 염원과 어울린다. 토질을 떠나 어디다 옮겨 심어도 잘 자라는 특성 역시 은근과 끈기라는 우리 민족성에 맥이 닿는다. 1896년 독립협회가 독립문 주춧돌을 놓으면서 부른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를 담을 만큼 일찌감치 은연중 무궁화는 우리 나라의 대표꽃으로 인식됐다. 무궁화와 우리 민족이 가까운 이유를 밝힌 글도 많다. 시인 조지훈은 “희디 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불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수필가 이양하는 “무궁화는 흰 무궁화라야 한다. 우리의 선인이 취한 것도 흰 무궁화임에 틀림이 없다.… 흰빛은 우리가 항상 몸에 감는 빛이요, 화심의 빨강은 또 우리의 선인들이 즐겨 쓰던 단청(丹靑)의 빨강이다”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시사월간지 ‘별곤걸’에 실린 ‘조선 산(産)의 하초와 동물’이란 글에서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로 말하면 꽃으로는 개화기가 무궁하다 아니할 수 없을 만치 참으로 장구하며 그 꽃의 형상의 엄연하고 미려하고 정조 있고 결백함은 실로 조선 민족성을 그리어 내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각자 민족을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무궁화같이 모양으로나 질로나 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어찌 흰 바탕에 짙붉은 화심을 가진 무궁화뿐이겠는가. 다섯 꽃잎이 항상 한데 피거나 지는 ‘단합과 공생’의 꽃! 무궁화가 그윽하게 피어 있는 8월의 아침이 신선해서 좋다. / 임병호 논설위원

한서 남궁억 선생

일제 강점기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친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1863~1939)선생은 일찍이 겨레의 가슴에 나라꽃 무궁화 정신을 심어준 선각자였다. 배화학당 교사 시절 가정시간에 무궁화꽃으로 한반도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해서 선물로 주고받도록한 이른바 ‘수본(手本)운동’을 전개했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한 뒤 자신의 밭 수천 평에 무궁화 묘목을 심어 해마다 전국 학교와 교회, 기독교단체, 가정에 분배했다. 무궁화를 곁에 두고 그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거레의 얼을 지키고 질긴 역사의 믿음과 미래를 확신하려 함이었다. 한서 선생은 서울에서 출생, 1884년(고종 21) 동문학(同文學· 영어학교)을 수료하고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관직을 사임하고, 그해 7월 서재필·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으며, 1898년 9월 나수연·유근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사설 등을 계속 실어 민족정기를 드높였다. 이후 성주목사,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밀파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매 관직을 사양하고 상경, 그해 11월 오세창·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그해 배화학당의 교사가 되었고, 1912년부터 상동(尙洞)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에 낙향, 이듬해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무궁화의 정신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자는 구국운동을 주창했다. 한서 선생의 무궁화예찬시들은 그 무렵 탄생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 (후렴)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같이 / 즐거워라 우리 이천만” 당시의 입말에 맞춰 쓴 ‘무궁화 노래’는 쉬운 곡에 얹혀 겨레의 노래가 됐고, 무궁화 묘목과 함께 삼천리 강산으로 번져갔다./ 임병호 논설위원

항공료 인하

중국 민간항공사인 둥팡(東方)항공이 인천~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 왕복운임을 20만원으로 낮췄다. 지난달 28일 이 구간 운임을 24만 원으로 낮춘 데 이어 추가 인하한 항공료다. 둥팡항공은 또 인천~옌타이(煙臺)운임은 왕복 45만 원에서 24만 원, 유명 휴양지인 하이난(海南) 섬 구간은 왕복 55만 원에서 26만 원으로 각각 낮췄다. 이달 9일부터 주 2회 새로 취항한 인천~닝보(寧波) 운임은 24만 원으로 책정됐다. 이 같은 요금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국내 항공사의 서울~제주 구간 성수기 왕복운임(18만5천800원)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한국~중국 항공운임 인하가 본격화된 것은 올해 6월 한국과 중국 정부가 체결한 한·중항공회담 결과 덕분이다. 이 회담에서 양국은 단계적으로 ‘항공자유화(오픈 스카이)’를 실시키로 하고 1단계 조치로 한국 전 지역~중국 산둥 성 운항을 시범구간으로 지정했다. 항공자유화는 당국의 허가 없이 항공사들이 수요에 따라 운항 구간, 운항 편수, 가격을 임의로 정하는 조치로 한·중 양국은 항공자유화 대상 지역을 베이징(北京). 샹하이(上海) 등 주요 도시로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항공사들도 한국~중국 산둥 성 항공료 인하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대한항공은 인천~웨이하이(威海) 운임을 현재의 29만 원에서 이달 25일부터 20만 원선으로 낮추기로 했다. 또 인천~칭타오 왕복 요금은 33만원에서 조만간 20만 원대로 인하할 예정이다. 아시아나항공도 25일부터 인천~옌타이 왕복요금을 35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낮추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중국을 오고 가는 승객들에게 항공료 인하는 뜻밖의 소득이다. 유가가 치솟는데 항공료가 떨어지는 건 획기적인 현상이다. 둥팡항공이 “중국 산둥 성 지역의 요금이 비슷한 거리에 있는 제주도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너무 비쌌다”고 분석한 것은 명석한 판단이다. 산둥 성은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1만여 명이 진출한 곳으로 한국인 상주 인구만 10만여 명에 달한다. 중국을 왕복하는 항공료가 대폭 인하됐으니 예컨대 제주도를 왕복하는 국내선 항공료도 내리지 않을 수 없겠다. 기분 좋은 소식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한국) 0-5 (일본)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세계100대글로벌대학’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미국이 잡탕 국민이면서도 초강대국이 된덴 연유가 있다. 전체 1위인 하버드대를 비롯, 무려 25개 대학이 100대글로벌대학에 포진했다. 다음이 6위를 차지한 케임브리지대 등 영국으로 13개 대학이다. 놀랍게도 홍콩이 3개 대학, 싱가포르는 2개 대학이 포함됐다.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단 1개 대학도 없다. 그러나 일본은 16위인 도쿄대를 비롯해 5개대학이 100위권에 들었다. 2004년 11월엔 영국 더 타임스 세게대학평가팀이 ‘세계50대대학’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 때도 하바드대가 역시 1위를 차지하면서 무려 17개 대학이 50위권에 진입, 미국의 대학이 가장 많았다. 영국 자기 나라 대학은 옥스퍼드 등 8개 대학이 들었다. 역시 홍콩과 싱가포르가 각 2개 대학이 포함됐었다. 이 땐 중국 베이징 대학이 들었던 것이 이번 뉴스위크 선정에서는 빠진 게 주목된다. 국내 대학은 이 때도 단 1개 대학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은 도쿄대가 12위에 오르면서 2개 대학이 50위권에 진입했었다. 이러한 대학 평가는 세계 학회에 발표된 교수진의 연구논문과 외국학생 입학 허용율, 외국 대학과의 교류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 가운데도 가장 비중 높은 것이 교수들의 연구논문이다. 실력있는 교수 아래 실력있는 학생이 나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외국에선 심지어 홍콩이나 싱가포르 교수들도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교수가 이처럼 먼저 공부하는데 국내 교수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정말 화딱지 나는 것은 일본은 50위권에 2개 대학, 100위권엔 5개 대학이 든데 비해 우린 1개 대학도 없는 ‘0-2’, ‘0-5’란 사실이다. 때마침 광복절이다. 이래가지고 우리가 언제 일본을 이기겠는 가를 생각해 본다. 말로 이기는 것은 백날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근본적으로 이 정부의 대학교육정책이 잘못됐다. 대학 같지 않은 대학은 정비돼야 한다. 대학도 개방해야 된다. 경쟁력 없는 대학은 도태되어야 한다. 하향평준화의 잘못된 평등주의가 국내 대학 발전을 해치고 있다. / 임양은 주필

맥아더 동상

인민군에게 낙동강까지 밀린 6·25 한국전쟁을 일거에 역전시킨 것이 유엔군인천상륙작전이다. 상륙작전은 1950년 9월에 이루어졌지만 원래 계획은 10월이었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비행기로 공중 정찰을 하면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것을 보고 인천상륙작전을 앞당겼다고 후일 회고록에서 밝혔다. 들녘의 곡식이 다 익으면 패주하는 인민군의 양도(糧道)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농민들에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현물세(現物稅)를 내야 했다. 아닌게 아니라 각 면인민위원회에서 나와 벼 이삭 하나의 낱알이 몇개인 데, 무게는 얼마고, 한 포기엔 이삭이 몇개며, 한 평에는 몇 포기니까 200평 한 마지기에 내야할 현물세가 얼마라는 식으로 산출된 벼가마 할당 수량이 턱없이 많아 소작료보다 훨씬 더 높았다. ‘공산주의 세상이 말 듣기보단 많이 다르다’는 농민들의 소리가 이때 나왔었다. 논 농사만이 아니고 밭농사도 이런 식으로 현물세를 매겼다. 그러니까 현물세를 매겨만 놓고 인천상륙작전바람에 그대로 퇴각했다. 안상수 인천시장 초청으로 온 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장 일행이 지난 11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에 헌화했다. 그는 “맥아더 동상의 의미를 기억해 달라”면서 “한국은 옛 친구를 버리지 말기 바란다”고 말했다. 16선의 공화당 소속 의원으로 82세다. 오는 11월 정계 은퇴를 앞두고 2차대전 때 맥아더 장군 휘하에서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그는 옛 상관에게 생전의 마지막 인사를 한 셈이다. 이른바 북녘 중심의 내재적 접근론자들은 한반도가 통일 안된 것은 맥아더 때문이라며 민족 해악자로 매도한다.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을 예상, 이를 저지키 위한 압록강 넘어 만주 폭격을 주장하다가 전쟁 확산을 우려한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 의해 1951년 4월 전격 해임됐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란 건 그뒤 미 의회에서 가진 고별 연설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적화통일 안된 것을 맥아더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욕해도 되는 이즈엄의 세태가 어디로 가자는 것인 지 정말 두렵다./ 임양은 주필

대통령의 특사 남용

사회통합을 위하여 행하는 제도가 사면제다. 일반사면은 범죄 중심, 특별사면은 범인 중심인 것이 특징이다. 일정시기의 범죄 종류를 지정, 이에 해당하는 죄인의 선고 또는 공소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일반사면인 것이다. 이에 비해 특정 범인을 지정, 형의 집행 또는 유죄선고를 상실케하는 특별사면은 일반사면을 보충하는 것이 원래의 취지다. 노무현 대통령의 8·15 광복절 특사가 말썽이다. 안희정 신계륜 전 국회의원,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 등을 특사시켰다. 이에 앞서서도 정대철 이상수 전의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김정길 의원 등 측근을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사했다. 이번에 특사된 서청원 김원길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안희정 전 의원 등을 특사시키기 위해 끼워넣기로 덕을 보았다. 같은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연루자로 형평성 차원의 비난을 모면할 요량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특사 남용에 쏠리는 사회적 비난은 거세다. 측근 중에 유일하게 남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도 조만간 특사할 것이 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불법 대선자금을 비롯, 이들이 저지른 갖가지 범죄행위는 상당한 국가 공권력을 소모시켰다. 범죄수사로부터 시작하여 기소, 유죄확정 판결에 이른 재판까지 소모된 국가 공권력이 상당하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범인들을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 하나로 다 무력화시켰다. 세상에 이토록 공평치 않은 세상은 있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이러면서 열린우리당이 경제살리기 일환으로 특사를 요청한 기업인 55명에 대해서는 완전히 외면했다. 측근 외에 특사된 사람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수 명으로 주로 정치관련 인사다. 사회통합을 위한 사면제가 대통령의 정치 수단으로 전락했다. ‘특사공화국’의 특권층 선민(選民) 형성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만민평등의 법 원칙에 위배된다. 법치주의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특사 역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찔린 양심은 있는 지 인사권을 고유권한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특사도 고유권한이라고는 우기지 않는다. 특사의 대상 범위가 광범위해지면서 정치적 전횡으로 누적된 적폐(積弊)가 너무 심하다. 사법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지경이다. 특별사면도 일반사면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든지 하는 제도개선이 절실하다./ 임양은 주필

형극(荊棘)의 길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 수원교구, 인천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 등의 7개 신학교에서 사제(司祭)를 양성한다. 신학교 입학과정은 일반대학과 비슷하지만, 세례 받은 뒤 3년 경과, 견진성사, 본당 및 주교 추천서, 부모 혼인문서, 간염 등 전염성 질환이 없을 것 등의 조건이 추가로 필요하다. 수능과 내신 외에 신약성서, 가톨릭예비신자 교리서, 한국천주교 예비신자 교리서 등에 대한 시험도 치른다. 또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교구가 지정하는 신학교에 입학한다.신학교 과정은 13~14학기로 운영되며 통상 7년의 학업과 수련과정을 이수한다. 학기 중에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2학년을 마치면 일괄적으로 군에 입대한다. 신학생들은 제대 후 10개월 가량 국내의 사회복지시설과 아시아교회 각지의 현장에서 활동한다. 4학년이 되면 성직자의 예복인 ‘수단(soutane)’을 입는다. ‘수단’은 ‘밑에까지 내려오는 옷’이란 뜻의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성직자의 지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사제는 검은색이나 흰색, 주교는 자주색, 추기경은 진홍색, 교황은 항상 흰색을 입는다. 러만 칼라에 앞이 트인 옷으로 30~40개의 단추가 달려 있다. 4학년 때부터 독서직(讀書職)을 부여받아 교회 전례 안에서 정규적으로 성경을 봉독할 수 있게 된다. 5학년에 올라가면서 시종직(侍從職)을 받고, 5학년을 마치고 한 달 동안 대침묵피정을 하게 된다. 자신의 소명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이다. 교구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제품을 받는다. 부제가 되면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를 제외한, 말씀선포와 봉사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 사제품은 보통 7학년 1학기를 마친 뒤에 받는다. 올해 사제품을 받은 54명은 모두 이같은 과정을 거친 이들이다. 올 7월7일 현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는 3천969명이다. 여기에는 각 교구 소속 신부를 비롯해 선교회, 수도회,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신부(183명)가 포함돼 있다.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은 한국 최초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인 7월 5일을 전후해 매년 열린다. 사제 서품식날은 축일(祝日)이자 형극의 길에 첫발을 딛는 날이기도 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믿기 어려운 이야기

고려 명종 때 노극청(盧克淸)이란 사람이 있었다. 살림이 빈한하여 집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팔리지가 않았다. 마침 일이 생겨 출타했을 때 그의 아내가 현덕수(玄德秀)라는 사람에게 백은(白銀) 열 두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 서울로 돌아 온 노극청이 제 생각보다 집값을 더 받은 것을 알고 백은 세 근을 가지고 현덕수를 찾아가 “전에 내가 이 집을 살 때 아홉 근 밖에 주지 않았고, 몇 해 동안 살면서 수리한 것이 없으니 세 근의 이익을 내는 것은 경우가 아닙니다. 돌려 주겠소”하였다. 현덕수 또한 의로운 사람이었다. “댁 혼자만 경우를 지키고 나는 못하게 하는 게요?”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그러나 노극청은 “내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탐내는 짓을 어찌 할 수 있겠소? 댁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집값을 다 돌려드릴테니 내게 집을 돌려주시오”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은 세 근을 받은 현덕수는 그 은 세근을 절에 바쳤다. 고려 500년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지어 전하는 노극청의 사연이다. 노극청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런 얘길 듣고서 실록을 편찬하던 이규보가 그 사실을 실록에 기록하고 자신의 문집에도 수록했다. ‘고려사’ 중 ‘현덕수 열전’에 노극청의 사연이 실리게 된 연유다. 김재해(金載海)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과부로부터 집을 사서 수리하다 집값의 두 배에 해당하는 백 냥이 담긴 항아리를 발견했다. 김재해는 아내를 시켜 본주인에게 돌려 주라고 했다. 그 과부는 뜻밖의 재물에 감사하면서 “꼭 제 물건이라 할 수도 없으므로 반씩 나누자”고 했다. 하지만 김재해의 아내는 “이 재물이 부인의 소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남편이 있어 살만하니 사양하지 마세요”라고 하며 돌려주었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일이다. 기대한 것 보다 백은 세 근을 더 받았다면 아내를 칭찬할 법 한데 노극청은 주인을 찾아가 더 받은 돈을 돌려 주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재물을 늘리는 행위를 탐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편이 있어 살만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던 김재해의 아내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전형이다. 노극청과 그의 아내, 그리고 현덕수, 김재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어느 과부의 심성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형용키 어려운 감동을 준다./ 임병호 논설위원

북한 수재민을 돕자

북한지역에도 폭우 피해가 극심한 것으로 상세히 알려졌다. 민간이 주최하지만 국가적인 행사인 8·15 평양통일대축전, 외화 획득에 한몫을 해온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남북이 금강산에서 열기로 한 8·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 등을 취소·중단·연기한 게 수해 때문임이 입증됐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북한의 자료를 근거로 7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달 14~16일 내린 집중호우로 549명의 사망자와 295명의 행방불명자, 3천4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2만8천747가구가 사는 살림집 1만6천667채가 완전 혹은 부분 파괴되거나 침수되는 등 주택의 피해 규모도 엄청나다. ‘조선신보’가 이재민 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국제적십자사연맹은 완전 파괴 및 침수된 가구수에 1가구당 가족수 5명으로 곱해 북한의 이재민을 계산해왔다. 이런 계산대로라면 북한에서는 이번 피해로 11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대북 지원단체가 추정한 사망·실종자 1만여명, 수재민 130만~150만명이라는 게 사실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다. 북한 최대 곡물 생산지인 황해북도를 비롯해 평안남도·강원도·함경남도 등에서 수만 ㏊의 농지가 유실되거나 물에 잠겼다니 그러잖아도 심각한 식량난이 더 심해질 게 뻔하다. 도로, 철도, 다리, 강, 하천, 제방, 전력 공급망, 공공건물 등 사회기반시설도 무너지거나 마비된 곳이 많다고 한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다. 식량,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생하는 참상이 떠 오른다. 북한의 7·5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조치로 쌀·비료 지원을 유보했으나, 그와 별도로 인도적 차원의 구호지원이 급박해졌다. 인도적 지원은 ‘인도적 위기에 대응해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줄이며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제공하는 도움’이다. 군사·정치· 이념을 초월한다. 정부가 남북협력기금을 투입,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에 참여하기로 한 방침을 인도주의 입장으로 이해한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다. ‘선군 정치’와 ‘강성 대국’을 내세우는 북한이 며칠간의 폭우로 수십만 t의 구호식량이 필요할 정도로 취약한 내부의 ‘치부’를 ‘자력 갱생’이라는 명분으로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18일 퇴직금이 300만원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는 퇴임후 자신의 허물을 ‘작은 티끌’에 비유했다. 제자 논문 표절 의혹이 발단이 되어 논문 재탕, 연구비 이중수령 등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작은 티끌’이란 그간 논란의 과정에서 밝힌 “관행” 또는 “몰랐다”고 변명한 말에 대한 또 하나의 사후 변명으로 들린다. “근거없는 보도를 한 일부 언론에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지만 그의 다발성 논문 의혹은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고약한 것은 교육인적자원부가 지급한 보수다. 지난달 21일 임명장을 받고 이번달 2일 사표가 수리됐다. 근무 일수가 18일이라지만 사표를 낸지 6일만에 수리됐다. 정상 출근은 12일이다. 이도 거의 날마다 논문 의혹관련의 변명으로 하루 하루를 소비했다. 그런데 경위가 어떻든 18일 근무 일수의 급여가 467만원이다. 연봉 9천471만원의 18일 분 금액이라는 것이다. 고액이지만 급여는 그렇다 쳐도 퇴직금이 300만원이 넘는다니 이는 또 무슨 계산법인 지 알 수 없다. 일반 근로자는 근무 일수를 1년 채워야 1개월 분의 법정 퇴직금을 받는다. 11개월을 근무해도 퇴직금 한 푼 없는 것이 일반 근로자의 퇴직금 규정이다. 이 틈을 타 고용승계를 하면서도 1년 미만 단위로 근로자와 고용계약하는 악덕 기업주가 없지 않았다. 굳이 이에 비하지 않아도 김 전 부총리 경우를 보아 정부의 연봉제공무원 퇴직금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 1년은 고사하고 1개월을 안채워도 지급하는 퇴직금제는 아마 이들만이 아닌가 한다. 퇴직금 자체도 합당치 않지만 18일 근무 일수에 300만원이 넘는다니 무슨 경우가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국민의 혈세가 정부 고위직 보수로 흥청망청 낭비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길을 막고 물어봐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행정자치부의 연봉제공무원 보수규정은 마땅히 개정돼야 한다. / 임양은 주필

‘생일’에 즈음하여

신문 제작은 일일 승부다. 경쟁지와의 승패가 하루하루 당일로 판가름 난다. 하루가 바쁘게 가다보니 일주일이 퍼뜩 간다. 일주일이 퍼뜩 가다보니 한달이 어느 틈에 가곤 한다. ‘당신은 심보가 삐딱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도 다름 아닌 아내의 말이다. 허구한 날을 날마다 조져대는 글만 쓰다보니 심보가 삐닥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우스갯 소리지만 일깨우는 점이 없는 게 아니다. 남편의 심성이 행여라도 진짜 삐딱해질까봐 그랬던 것이다. 딴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다. 일상생활에선 남들에게 그러면서 신문에 글 쓰는 것은 왜 그리도 부정적이냐는 말을 듣는다. 맡은 소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지는 것만이 소임인 것은 아니다. 추켜세우는 것도 소임이다. 사실은 추켜세우는 글을 쓸 때가 조지는 글을 쓸 때보다 더 신바람이 난다. 이래서 추켜세우는 글을 쓰고 싶지만 마음 같지가 않다. 분명한 것은 조지거나 추켜세우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머릿속 밑천을 ‘내 함량은 이 정도입니다’하고 벌거숭이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독자가 어떻게 볼건가 하고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갖는다. 쓰는 것은 또 머릿속에 든 걸로 쓰지만 세 가지 자세가 있다. 손가락으로 쓰는 것, 머리로만 쓰는 것, 가슴으로 쓰는 것 등이다. 신문 제작에 종사하면서 가장 긍지를 갖는 것은 상대에 위 아래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막강한 권력자나 길거리에서 노점을 하는 이나 다를 바가 없다. 권력을 두려워해선 안되고 사회적 약자를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권력자의 얘길 들으면 사회적 약자의 얘길 들어야 할 것이 또 있다. 권력자는 항시 감시의 대상이다. 권력은 민중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경기일보 창간 18주년이 되는 생일이다. 한 달이 어느 틈에 간지 모르게 지내다 보니 한 해, 두 해씩 쌓인 게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됐다. 그동안 고인 애환의 사연이 참 많다. 신문은 독자의 것이다. 격려해주는 것도 좋지만 꾸짖어주는 것도 좋은 관심으로 받아 들인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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