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1395년 창건한 경복궁의 정문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임진왜란 때 불탄 광화문을 다시 지었다. 광화문의 수난은 임진왜란으로 끝나지 않았다. 1927년 일제 조선총독부는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경복궁 여러 곳을 헐어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지금의 자리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광화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6·25전쟁 땐 폭격으로 편전인 만춘전과 함께 불탔다. 1968년 석축을 수리하여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중건한 것이 지금의 광화문이다. 조선왕조 궁궐의 정문으로 종묘와 사직의 상징적 권위인 광화문 수난사는 곧 역사의 수난사다. 문화재청이 광화문 복원사업에 나섰다.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을 가진 지난 4일은 1394년 태조가 경복궁 창건을 시작한 날이다. 오는 2009년말 완공 예정인 복원공사는 우선 지금의 철근콘크리트가 아닌 원래의 목조 양식으로 중건된다. 또 일제가 옮겼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광화문 원형은 가장 높은 가운데칸 높이가 17척 5촌에 너비가 18척이고, 양옆은 높이 16척에 너비가 14척5촌이다. 문루는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으로 우진각 지붕을 얹은 중층 건물이다. 1층 기둥 높이는 7척이고 기둥의 간격은 앞면 가운데가 27척, 양옆이 25척씩에 옆면은 10척씩이다. 그런데 1층 기둥 사이는 개방하고 2층은 판문을 달아 여닫게 했다. 이같은 규모의 광화문 복원공사에 들어갈 목재의 총량이 400t에 이른다. 4t 트럭으로 100대 분량이다. 위치 또한 일제가 경복궁과 어긋지게 옮긴 광화문 축을 역대 임금이 다닌 홍례문 사이 제자리로 다시 옮긴다. 그러니까 원래 위치보다 북쪽으로 약간 물러나 있고, 좌향 역시 원래의 축선과 일치하지 않게 놓인 것을 원형대로 바로잡는 것이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일제 잔재 청산이다. 광화문의 역사적 정통성 확립이다. 지금의 광화문은 이미 용마루 철거작업이 시작됐다. 새 웅자를 드러낼 진면모의 광화문을 상상하면서 더는 광화문의 수난이 없는 국태민안을 기원한다. / 임양은 주필

道 ‘한우펀드’ 재래사육으로 차별화를

경기도가 한우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현대증권과 연대한 70억원 규모의 ‘한우펀드’ 조성을 착안한 것은 기발하다. 도·농간에 투자기회를 제공하면서 브랜드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섹터인 것은 맞다. 이를위해 소비시장 확보 등 사업추진에 따른 세부 방안의 대책 강구에 나선 것도 적절하다. 아쉬운 것은 기존의 한우산업과의 차별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만약에 차별화가 없으면 기존 민간업계의 업권만 침해하는 형상이 된다. 이래서 차별화 방안으로 사육 방법을 생각해 본다. 한우 사육은 토종 비육우가 목적이다. 하지만 한우가 토종이긴 해도 사육 방법이 재래식이 아니어서는 완전한 재래의 토종 비육우가 아니다. 한우의 전통적 주식은 자연산인 여물이나 풀이지 가공품인 사료가 아니다. 지금의 한우산업은 사료를 먹여 사육한다. 더러 젖소고기가 한우고기로 둔갑하여 쇠고기가 맛이 없다는 소비자들의 의문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공 사료를 먹여 사육하기 때문에 예전같은 쇠고기 맛이 덜난다. 특히 겨울철에 먹이는 여물은 지푸라기를 썰어 벼를 도정할 때 나온 고운 겨에 콩을 넣어 가마솥에 끓이면 구수하게 풍기는 냄새부터가 가공 사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고기맛이 자연산 사료와 가공품 사료와 같을 수가 없다. 다른 예를 들자면 닭도 마찬가지다. 비록 토종닭 일지라도 역시 사료를 먹여서는 토종닭 맛의 진수가 안난다. 가둬 키우기보단 놓아 먹이면서 모이도 주고 벌레 등을 잡아먹게 해야 한다. 한우를 재래식으로 키우면 사육비가 더 들진 모른다. 생산비가 더 들면 그만큼 출하가격을 높이면 된다. ‘경기도 한우펀드’가 공식으로 보증하는 재래 품질의 쇠고기 같으면 값이 좀 비싸도 찾는 소비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차별화하는 방법이다. 기왕에 시작하는 한우 브랜드 연계사업이라면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여물이나 풀을 먹이기도 하지만 칸막이 사육보다는 방목 사육이 비육우의 육질을 높이는데 또 도움이 될 것이다./ 임양은 주필

탁신의 호화망명

홍콩 센트럴은 명품 쇼핑가로 번화가다. 여기서 고급 코트 등 자신과 부인의 옷가지를 샀다. 명품시계도 샀다. 그리고는 홍콩 금융가를 들러 장시간 요담했다. 요담은 수억달러에 이른 자신의 재산 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에 오기 전에 있었던 베이징에서는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승마 등을 즐겼다. 베이징 이전에 있었던 런던에서 역시 호화생활을 했다. 언제나 남자 2명 여자 2명이 이들 부부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경호한다.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부부가 이들이다. 탁신 전 총리 부부는 홍콩에서 동남아 최고 휴양지로 소문난 인도네시아 발리섬으로 날아가 휴양 중이다. 지난 9월 군부 쿠테타로 실각한 그는 망명생활을 이렇게 즐기면서 지낸다. 뉴욕 유엔본부 방문 중 권부에서 추방되자 바로 런던으로 간 이래 고뇌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런던에 가서도 거기에 체류해 있었던 딸을 만나자마자 쇼핑가로 직행했을 정도다. 탁신 전 태국 총리가 실각한 것은 무위 무능한데다 독선이 심했던 탓이다. 안목도 경륜도 없으면서 고집만 셌던 것이다. 여기에 부정 부패까지 겹쳐 군부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군부 쿠테타는 헌정 중단이다. 지극히 비정상적 정권 교체로 민주주의의 사망 선고인 것이 쿠테타다. 이런데도 방콕 시민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에게 꽃다발을 안기곤 했다. 공식으로 신고한 재산은 120억바트로 우리 돈으로는 약 3천억원이다.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신 정부와 교섭하는 모양인 데 잘 안되는 것 같다. 총선이 있을 1년 안에는 귀국이 허용되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니까 재산을 헌납하겠다는 신고액 말고도 홍콩 등 외국에 은닉해둔 재산이 그토록 많아 망명 중에도 호화생활을 하는 것 같다. 애시당초 그런 위인을 총리로 둔 것이 태국 국민에겐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같은 망명생활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헌정 중단의 와중에도 장갑차 군인들에게 꽃을 안긴 방콕 시민들의 심정이 뭣인가를…. 민주주의의 불행이다./ 임양은 주필

초상화

우리 미술사에서 초상화는 사람의 형상만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주인공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당시의 사회적 지위 등 외형적인 모습을 그렸지만 더 중시한 것은 인물 내면의 정신세계다. 고집스러운 입술, 형형한 눈, 한올 한올 섬세하게 그려낸 수염 등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다. 인물은 물론 성격이나 교양 등 그 사람의 정신까지도 그렸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조선후기 우국지사 황현,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강화도령’ 철종, 세자 시절의 영조, 조선 후기 대표 서예가 이광사 등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 19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초상화 유물들은 감상용으로 주로 그려진 서양과 달리 주인공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 미적 감각까지 녹아 있다. 뛰어난 묘사는 회화사적으로 의미가 크고, 실제 생존한 인물을 담았다는 면에서 역사적 자료로도 귀중하다. 또 당시의 복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목식사 연구에도 필수적이다. 초상화 중 상당수는 소수의 전문연구자들에게만 알려졌을 뿐 그동안 일반에게는 거의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다. 20세기 전반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채용신의 ‘황현 초상’(1911년)은 우리 초상화의 전통을 잇는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또 18세기 말 19세기 초 그려진 ‘조씨 삼형제 초상’은 여러 사람들을 한 화면에 담은 유일한 초상화다. ‘서직수 초상’(1796년)은 합작품이다. 얼굴은 18세기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몸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서양식 음영법이 들어간 의복·돗자리, 섬세한 선은 김홍도의 또 다른 화법을 보여준다. 세자 시절 영조를 그린 ‘연잉군 초상’, ‘철종 어진’은 한국전쟁 당시 화면이 일부 소실됐으나 작품의 수준이나 어진이 극소수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채제공 초상’은 기존 작품 외에 3점이 더 확인·추가됐다. 안타까운 것은 수원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의 어진이 여전히 발견되지 않는 점이다. 수원 화령전에 봉안됐던 정조의 어진은 1920년대 초 조선총독부가 서울 창덕궁으로 옮겨 간 것까지만 확인되는데 그후 행방이 묘연하다. 정조의 어진이 발견됐으면 좋겠다. / 임병호 논설위원

한국과 중국

국내 어느 신문의 베이징 특파원 보도가 흥미롭다. 10만위안(1천200만원 가량)만 주면 ‘1일 황제’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의 용포를 입고 대신을 거느리며 후궁 시녀 등을 둔 채 하루종일 궁중음식을 먹고 마시며 황제처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을 위한 이러한 궁전을 지어놓은 모양이다. 놀라운 것은 이를 전문으로 하는 ‘만사OK’라는 기업이 성업을 이루어 유사업체가 많다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누리지 못할 게 없는 것이 중국사회다. 별장을 아방궁처럼 짓는 거부들도 많다. 사회주의 체제에선 엄두도 못낼 ‘돈맛’ 향락이 날로 번창한다. ‘돈맛’을 안 중국 사회는 이래서 가진 사람,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돈 버는 데 혈안이 됐다. 중국은 분명히 공산당의 일당 독재가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사회는 분명히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에선 있을 수 없는 시장경제가 시장경제를 한다는 우리보다 더 발달해간다. 기업 또한 기업하기 좋은 ‘기업천국’을 이루어 기업을 활성화해야 할 우리와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활발하다. 중국은 기업을 조장하는 데 비해 한국은 기업을 규제한다. 중국은 좌에서 우로 가는데 이 정권은 우에서 좌로 간다. 중국은 이념에서 탈 이념을 하는데 청와댄 비이념에서 이념화해 간다. 어떤 것이 세상을 거꾸로 사는 진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중국에 이미 추월당했고, 더 추월당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국내에 옛 왕조의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궁전을 지어 거액으로 고객을 끄는 업체가 있다면 반응이 어떨지 가정해 본다. 중국에서처럼 ‘1일 임금’을 하기 위해 1천200만원을 낼 손님이 없기도 하지만 우선 사회적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면 국내 경제 형편이 그처럼 여유롭지 못한 긴박한 사정 때문이다. 중국에서 우리 나라로 돈벌러 온다고 우리가 우쭐해댄 것도 이젠 예전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앞으로는 우리가 중국으로 돈벌러가는 시기가 올 것이다. 중국 정부는 국제관계에서 이미 상국 행세까지 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죄상이 크다. / 임양은 주필

시위문화의 새 이정표

한국노총이 시위문화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 지난 25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노총의 ‘전국 노동자 대회’에는 2만5천여명이 집결했지만 아무런 불상사 없이 평화적으로 끝났다. 노동계 집회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죽봉과 쇠파이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위대를 차단하기 위해 집회 장소와 도로 사이를 수십 대의 전경버스가 가로 막는 일도 없었다. 중무장한 전경은 보이지 않았고 교통경찰 100여명이 나와 주변의 차량 소통을 도왔다. 서울시청 앞을 오가는 차량들은 평상시처럼 제 속도를 내면서 통행하였다. 불과 이틀 전인 22일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전국농민총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미FTA범국민운동본부 등이 열었던 집회는 참석자가 1만3천여명이었다. 한노총 집회의 절반 수준이었다. 경찰 7천700여명이 배치됐었다. 사전 평화시위 약속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폭력사태로 번졌다. 서울시청 앞 일대가 시위대 때문에 거의 마비됐다. 같은 날 지방에서 열린 집회는 참석자들이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폭력으로 얼룩졌다. 국민은 참으로 대조적인 두 집회 광경을 보았다. 한노총의 전국 노동자 대회가 평화적으로 끝난 것은 무엇보다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 덕분이었다. 이용득 한노총 위원장은 집회 이전부터 “시민에게 고통을 주는 폭력 시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평화시위가 어떤 건지 이번에 보여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한노총이 자율적으로 편성한 ‘질서유지대’가 집회 장소와 도로 사이에 인간띠를 형성했다. 평소 경찰이 하던 일을 집회 측이 대신 한 것이다. 술 취한 집회 참석자도 없었다. 집회 참석자들은 대회가 끝날 때 쯤 대형 쓰레기 봉투 600여개로 자신들이 버린 쓰레기를 말끔히 주웠다. 전경을 아들로 둔 부모들이 크게 기뻐하며 한노총에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한국 사회의 시위문화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어져왔다. 시위의 쟁점은 민주화와 인권, 자유와 권리 등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인 가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날 시위대의 폭력적 행동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불법·폭력시위는 국민이 용인하지 않는다. 한국노총의 평화시위는 그래서 더욱 신선하였다. / 임병호 논설위원

돈 든 쇼핑백

“도지사 공관에까지 쇼핑백을 들고 와(이 안에) 돈이 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지난 23일 서울서 가진 최고경영자 조찬특강에서 공개한 말이다. 김 지사는 돈이 든 쇼핑백을 물리치면서 “(인정상) 저도 괴롭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부정을 경계해야 하는 뜻으로 자신이 겪은 황당한 일을 공개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도지사 공관은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런데도 돈뭉치를 들고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김 지사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업 로비를 시도했건, 인사 청탁을 시도했건 그가 누구라고 하면 잘 알 사람일 것 같다. 이런 사례가 있다. 도내 기초자치단체장으로 꽤나 전도가 유망했던 분이다. 그가 어느 사업자에게 3천만원인가, 5천만원인 가를 받고 사업민원 하나를 들어주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빌린 돈을 갚기 위해서다. 동티가 안 나고 잘 넘어가는가 싶다가 사단은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그 사업자가 평소 사귀고 지냈던 여자가 투서를 한 것이다. 사업자는 자기 과시욕으로 “시장도 내 말 한 마디면 다 된다”면서 돈 준 사실을 얘기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둘 사이가 좋았을 땐 괜찮았는데, 무슨 이해다툼으로 토라져 갈라서게 되면서 들어두었던 얘길 투서질 한 것이다. 그 여자는 변심한 남자를 혼내주려 했던 것이 시장만 날벼락 맞았다. 부정으로 치부할 사람도 아닌데, 실수로 아까운 인재만 하나 망가지고 말았다. 공무원 비리가 들키면 ‘부조리’고 안 들키고 넘어가면 ‘복조리’라고 한다. 물론 안 들키고 넘어가는 수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해 본다. 자신의 주변이 조금만 이상해도 간이 콩닥콩닥할 것이다. 이같은 불안을 무릅쓰고 비리를 저지르는 공무원은 정말 간이 웬만큼 부은 별종인지 모른다. 그러나 부정은 대개가 결국은 들통나기 마련이다. 사례를 든 단체장처럼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데서 사단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 공무원 범죄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라고 했다. 하늘의 그물코가 엉성한 것 같아도 악을 건져올리는 덴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김문수 지사가 돈뭉치 쇼핑백을 물리친 것은 백번 잘한 처신이다. /임양은 주필

동거부부

미합중국 정부는 결혼 장려를 위한 복지법안이 의회에서 심의중인 가운데 결혼 지원의 각종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 결혼부부가 아닌 동거부부가 늘어 사회문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신생아 중 8%가 결혼하지 않은 동거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빈곤 탈출의 안정은 결혼이다’라는 캠페인은 그같은 프로그램 중 하나다. 결혼부부가 아닌 동거부부는 서로간의 법률적 책임이 가볍다. 이혼이 아닌 결별이 자유로워 결국 자녀가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결손가정이 아닌 결손동거의 부정적 사회파급 현상을 낳는 것이다. 미 보건복지부는 정상의 양친 밑에서 자란 아이보다, 비정상의 양친에서 태어난 아이가 한쪽 부모 아래서 자랐을 경우에 가난하게 살거나 범법률이 더 높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결혼 기피 풍조는 세계적인 것 같다. 특히 여성이 더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선 미혼을 고집하면서 동거도 아닌 좋은 씨받이로 아이만 선호하는 여성이 점점 는다는 것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동거부부나 미혼의 독신모는 경제활동에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서로 구애받는 게 싫어 생기는 신사고의 흐름이다. 국내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는 것 같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표본조사 결과 미혼여성의 43%가 결혼을 굳이 생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남녀간에 결혼이 인생 여정에서 필수코스냐, 선택코스냐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에 정답은 없다. 상대적일 뿐 절대적일 순 없기 때문이다. 어렵고도 쉽고, 쉽고도 어려운 게 결혼이다. 자녀의 결혼을 부모조차 맘대로 못하는 세상이다. 미국 정부가 벌이는 동거부부의 결혼지원운동 역시 반발이 만만치 않게 거세다는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사생활에 세금을 쏟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젊어서 제때 만나 결혼하여 때론 오순도순, 때로는 아옹다옹하면서도 자녀들 낳아 잘 기르며 해로하는 부부는 그 자체만도 성공한 인생이다. 삶의 행복이기도 하다./ 임양은 주필

대통령 비서실

조선 왕조의 비서실인 승정원은 거세하지 않은 내시와 마찬가지였다. 궁중 내시의 정치 참여가 금기였던 것처럼 승정원 역시 지금의 내각과 같은 조정의 정사에는 초연했다. 임금을 지근에서 섬기는 승정원의 도승지 부승지 좌·우부승지 등이 조정 일에 간여하기 시작하면 임금을 등에 업은 ‘호가호위’(狐假虎威)의 파당이 지어지기 때문이다. 승정원은 말없는 임금의 그림자 노릇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형태는 달라도 대통령 비서실이 갖는 직분의 본질은 다를 바가 없다.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 지근에서 묵묵히 보필하는 것이 소임이다. 국정의 중심은 내각이지 비서실은 아니다. 이런데도 마치 내각을 지휘하는 행세를 곧잘 해대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이다. 국무위원인 각 부처 장관은 관청의 지위에 있지만, 대통령 비서실은 그 누구도 보조기관일 뿐 의사결정권을 갖는 관청의 지위는 아니다. 청와대에서 관청의 지위는 대통령 뿐이다. 무슨 비서관이 어느 부처 정책을 앞서 발표하거나 정책을 다르게 발표하는 것은 대통령을 등에 업은 ‘호가호위’의 월권이다. 이러다 보니 대통령 비서실과 내각 간에 인맥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은 참 희한한 비서실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 규모도 가장 크고 말썽도 가장 많다. 국정의 난맥상은 그렇다 해도 추문이 끊이질 않는다. 강남에 사둔 아파트 두 채로 거액을 편법 대출 받았는가 하면 논문 표절 소동을 빚은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는 아내를 살해한 강력범도 있었다. 요즘은 다단계 업체와 10억원을 부당 거래한 사람이 있어 구설수에 올랐다. 가족이 한 일이라지만 몰랐다 할 수가 없다. 왕조의 승정원은 도덕성을 목숨처럼 중요시했다. 임금의 지근에 있기 때문에 처신 하나 하나에 그만큼 조심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에선 더 하면 더 했지 못한다 할 수 없다. 대통령 비서실은 최고의 권부다. 도덕성의 상징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승정원이 왕조의 승정원보단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청와대 비서실의 도덕성에 국민사회가 몇 점이나 줄지 흥미롭다./ 임양은 주필

황금돼지해

돼지는 돝 또는 도야지로 불려왔다. 돼지라는 명칭도 돝아지(도야지)가 변해서 된 것이다. 한자어로는 저(猪)·시(豕)· 돈(豚)·체(?)·해(亥) 등으로 표기한다. 돼지는 지신(地神)의 상징으로도 인식됐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상해일(上亥日)에 궁중에서는 나이가 젊고 지위가 얕은 환관 수백인을 동원해서 횃불을 땅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고 돌아다니게 하였는데 이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하였다. 돼지에 관한 속신(俗信)도 많다. 산모가 돼지발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난다고 한다. 또 돼지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쓴다고 믿으며,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고 한다. 특히 돼지꿈은 재물이 생길 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돼지를 지칭하는 한자의 음(音)이 돈(豚)이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일반적으로 돼지 해(亥)는 십이간지상 12년에 한 번씩 돌아오지만, 붉은 돼지해인 정해년(丁亥年)은 60년 만에 돌아온다. 정해년을 ‘붉은’ 돼지해라고 부르는 것은 오행에서 정(丁)이 불을 뜻하기 때문이다. 황금돼지해는 이 붉은 돼지해 가운데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더 따져 600년만에 한번꼴로 돌아오는 해인데, 이 해에 태어난 아이는 특히 재물운이 많아 다복하게 산다고 알려져 있다. 음력 정해년인 2007년이 역술상 600년 만에 찾아 온 ‘황금돼지해’로 알려지면서 최근 젊은 부부들 사이에 ‘아기 갖기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 해에 태어난 아기는 ‘재물운’을 타고 난다는 속설때문이다. 이 때문에 요즘 산부인과 병원에는 ‘계획 임신’ 방법을 묻는 전화가 급증하고 있고, 일부 산후 조리원에도 예약자가 쇄도하는 등 저출산 시대에 모처럼 ‘임신 ·출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임신과 출산은 의학적으로나 아기·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나 몸의 자연적 리듬에 따르는 게 가장 좋은 건 상식이다. 그러나 역술인들은 “황금돼지에 대한 속설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밝은 불(丁)과 맑은 호수(亥)가 만나는 정해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재물· 장원 급제 등 온갖 복을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년 돼지해에 맞추려고 출산 예정일을 늦추는 부부들도 있다고 하니 2007년엔 우리나라의 인구가 부쩍 늘어날 것 같아 흐뭇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잃어버린 영토

녹둔도(鹿屯島)는 두만강 하류 조산(造山) 부근에 있는 하천도서다. 역사상 우리나라 고유영토로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인데 처음엔 여진말의 음을 따서 사차마 또는 사차(沙次)· 사혈·사혈마 등으로 불리다가 세종 때 육진(六鎭)개척 이후 북변의 지명을 점차 새로 지을 때 ‘녹둔도’라고 명명하였다. 섬둘레는 2리(里), 높이는 수면에서 10자(尺) 정도 되는 작은 섬이지만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가 서려있다. 육진개척 이후 여진족들이 물자가 궁핍하면 보리·밀·수수와 각종 어류 및 청백염(靑白鹽)이 생산되는 녹둔도에 자주 잠입하여 약탈을 일삼아 조선군이 길이 1천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에 오가며 농사를 짓게 하였다. 1587년(선조 20) 9월과 이듬해,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 두 차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여진부족 중 하나인 시전부족(時錢部族)이 기습, 격퇴는 하였으나 피해가 막심했다. 조선군 11명이 전사하였으며 군민 160여명이 납치되고 15필의 말도 약탈당했다. 당시 녹둔도는 함경도 경흥부의 관할로서 부사(府使)는 이경록(李慶祿), 방수책임은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이경록·이순신은 두차례의 정벌에 나서 포로들을 구출하고 여진족을 토벌했다. 녹둔도는 1800년대 이후 강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됨에 따라 연륙(連陸)돼 갔다. 더구나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이었던 녹둔도가 조선·청· 러시아 3국 간의 국경지역이 됐다. 1882년 1월 고종이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삼고 녹둔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할 방략을 모색하도록 명했고, 러시아와 국교가 열리자 러시아 공사에게 이 섬의 반환을 요청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녹둔도에 러시아 군사 기지가 들어 서 있고, 최근 제방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북한이 1990년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맺으면서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확인해줘 우리조차 영토 주장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강성대국’과 ‘주체’를 외쳐 온 북한이 엄연히 우리 땅인 녹둔도를 러시아에 그냥 내준 셈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가 오는 25일 창립 5주년을 맞는다. 2001년 11월 국민의 기본 인권보호와 인권 수준 향상을 규정한 국가인권위법 발효에 따라 출범한 인권위는 그동안 성별·종교·인종·학력·신분 등에 따른 차별과 인권 침해를 조사해 시정· 개선 권고 조치를 내려왔다. 지난 10월까지 모두 2만59건의 침해·차별· 진정을 접수했고, 이 중 권고·고발·합의종결·법률규제 등 조치를 취한 건수가 884건(전체 대비 4.4%)에 달했다. 또 인권위의 권고조치가 수용된 경우는 394건이었다. 인권침해 진정사건은 구금시설이 7천579건(44%)으로 가장 많았고, 경찰(3천677건), 국가기관(3천637건), 검찰(936건), 보호시설(592건) 등이 뒤를 이었다. 하루 평균 11건의 차별·인권침해 진정사건을 접수한 셈이다. 인권위가 굵직한 결정을 쏟아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사례도 많다. 구치소내 여성재소자 성추행사건 및 폭행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의뢰, 정신병원 등 구금시설의 과도한 신체구금 등 인권침해 행위 시정 개선 등이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특히 외국인 고용허가제 도입 권고와 ‘살색’의 평등권 침해 용어 결정 등은 정부 부처가 받아들임으로써 제도화의 길을 열었다.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 개선, 공무원 채용시 키·몸무게 제한 금지, 여의도 농민사망사건에 대한 경찰 징계 권고, 군인의 의료접근권 보장 권고 등도 주요 결정들이다. 사형제 및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와 북한인권 의견표명 등 사안은 정치권과 국가기관, 보수와 진보 간의 세 싸움 양상으로 변질되면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인권위 결정이 사회적 합의도출을 얻어내는 데는 아직 미흡했다. 한 예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권고했지만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점이다. 재판에 대한 의견 제시나 관행· 정책 결정에 대한 권고, 진정사건 구제조치 등 실질적 권한이 주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법부에 영향을 미칠만한 결정이나 권고를 내린 것도 거의 없다. 인권단체의 협력부족, 정치권 및 여론 눈치보기도 해결돼야 할 문제이지만, 국가기관, 학교, 언론, 시민단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 인권벨트를 형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인권위의 결정에 보다 확실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논술

논술-논하여 의견을 진술함. 논설-사물의 이치를 들어 의견을 주장함. 논문-사리를 논술함. 국어대사전의 낱말 풀이다. 풀이가 비슷비슷한 것은 ‘논’(論)이란 말 자체가 ‘사물이나 시비를 가리는 주장(견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논술·논설·논문이 엇비슷하긴 해도 ‘서술’과 다른 것은 서술은 일의 경위를 차례에 따라 밝히는 것으로 객관적 형태인데 비해 논술·논설·논문은 다같이 주관적 형태인 점이다. 즉 논술은 논설이나 논문과 마찬가지로 설명조의 서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장(견해 및 의견)이 뚜렷하여 그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논문은 일반적으로 학문적 업적이나 박사 같은 학위논문 등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글로 서론·본론·결론의 3단계가 분명하다. 이 점에서 논술은 논문보단 정형(定型)에 덜 구애받는 논설과 가깝다 할 수 있다. 대입 수능시험이 끝나기가 바쁘게 논술 비상이 걸렸다. 좋은 학생을 뽑기위해 어려운 문제를 출제한다 해도 대체로 너무 난해한 게 대입 논술의 병폐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으로 볼 수 없는 칸트의 이론이 논제로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교사들도 어려울 정도라고 하지만, 대학 교수도 출제한 교수 외에는 난해할만큼 너무 어려운 게 더러 있다. 논제가 난해하면 논술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출제의 초점 파악이 어렵다. 평이한 논제로도 좋은 학생은 얼마든지 뽑을 수 있다. 올핸 고등학교 교과과정이면 이해할 수 있는 논제가 많이 출제됐으면 한다. 어떻든 논술을 쓰는 수험생들은 논제의 초점을 파악해야 쓰기가 쉽고 글이 명료해진다. 카메라의 초점이 흐린 사진은 희묽은 하고 초점이 정확한 사진은 또렷한 이치와 같다. 논술을 쓰는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기·승·전·결(起·承·轉·結)같은 정형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의식해서도 안된다.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주장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개성 표현이 중요하다. 물론 그같은 생각이나 주장이 맞지 않을수도 있다. 맞지 않다고 해서 꼭 나쁜것은 아니다. 사물의 변별력을 검증하는 것이 대입논술이기 때문이다. 논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는것이 논술을 잘 쓸수 있는 길이다. / 임양은 주필

독일과 일본

독일은 2차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의해 강제노동에 동원된 외국인 생존 피해자 11만9천여 명에게 우리 돈으로 모두 6조원의 배상금을 연내 지급키로 했다. 강제노동 종류와 피해 정도에 따라 1인당 최하 123만원에서 최고 920만원까지 지급된다. 배상금은 독일 정부가 낸 것도 있지만 기업의 출연금이 많다. 2차대전 때 외국인 강제 노동으로 부당이득을 본 독일 기업들이 51억유로(6조원)의 배상금 가운데 절반을 냈다. 영화 ‘쉰들러’는 2차대전 때 전쟁을 이용해 거액의 돈을 번 기업인 쉰들러의 실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처음엔 돈밖에 몰랐던 그가 유태인들이 강제노역장과 학살 현장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달라졌다. 나치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유태인들을 빼내곤 했다. 참담한 전쟁터에서 인류의 인간애를 꽃피운 쉰들러는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에서 살다가 지난해 타계했다. 미망인은 얼마전에 작고했다. 강제노동 배상금 출연에 참여한 독일의 기업인들은 쉰들러의 정신을 계승한 후예들이다. 독일의 배상금 지급은 자진해 나선 것이다. 자진해서 여러 나라에 수소문해 신청을 받았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너무나 다르다. 일제에 의해 끌려간 징용자는 강제노역을 혹사 당했다. 위안부로 끌려간 처녀들은 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종군 간음을 일본군들에 의해 강요받았다. 이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개끌어가다시피 끌려갔다. 공포의 눈망울을 초점잃은 채 굴리며 동네에서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다. 지금의 노인들 중엔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다. 이토록 목격자가 있는 사실을 일본 정부는 부인하고 있다. 일본 위정자들도 말로는 침략에 의한 과거의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2차대전 전범 청산은 독일과 아주 정반대다. 독일은 나치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닌 데 비해 일본은 군벌의 피해자들이 있는 것도 없다고 우긴다. A급 전범들을 되레 영웅시해가며 참배하는 것이 일본이다. / 임양은 주필

대북인권결의

정부는 올 유엔 대북인권결의에 처음으로 찬성했다. 첫 해엔 불참석, 다음 세 번은 기권한데 이은 다섯번 째 만이다. 대북인권결의는 고문·공개처형·기아 등 7개 항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절대 권력에 무조건 충성과 승복만이 존재하는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다. 감시 비판 기능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곧 반혁명 분자로 반동이기 때문이다. 반혁명 분자는 공민의 자격이 박탈된다. 천부의 자연법적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한다. 평양정권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유엔인권결의를 내정 간섭이라고 힐난했다. 하필이면 지구상에서 세계적 관심의 반인권국가가 동족인가 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북의 ‘조평통’은 연이나 대북인권결의에 처음으로 찬성한 남쪽에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나섰다. “반통일정책”이라면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성명을 밝혔다. 이 정부가 북에 끌려만 다닌 줏대없는 대북정책이 자초한 부메랑이다. 정부는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 진출, 핵 실험 후 대북 제재에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서 부득이 찬성했지만 본색은 아닌 것 같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 내정자는 국회인사청문회에서 6·25 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라는 질문에 “그런 규정은 적절치 않다”며 얼버므렸다. 잘은 몰라도 북측에 기회가 있으면 찬성의 의미를 애써 축소 해명하기에 바쁠 것이다. 줏대없는 대북정책을 비판하면 반통일 전쟁광으로 몰아대기 일쑤이지만 평화통일을 바라지 않고 전쟁을 원하는 미치광이는 없다. 전쟁을 함부로 들먹여서는 안 된다. 만약 전쟁이 재발하면 6·25 전쟁보다 훨씬 더 참혹한 전쟁이 된다. 인권은 평화가 보장돼야 신장된다. 여기선 학생의 두발 간섭도 인권침해라지만 저기선 기아에서 해방되는 인권도 없다. 인권이 없는 북녘에 종속된 ‘종속평화’는 정착된 평화가 아니다. 병립된 ‘병립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이제 저들의 인권을 말하는 데 주저치 않아야 한다. /임양은 주필

소설 속의 성윤리

영국 작가 D H 로렌스가 ‘채털리부인의 사랑’을 완성한 것은 1928년 1월이다. 소설은 성불구자 남편이 있는 주인공 코니가 사냥터지기 멜로즈와 성행위를 동반한 사랑을 나누고 결국 남편과의 이혼을 강행하는 내용이다. 당시 영국의 출판사들은 대담한 성행위 묘사와 비속어를 삭제하면 책을 내겠다고 제안했지만 로렌스는 거절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자비로 출판했다. 영어권 조판공들이 “도덕적으로 더럽다”며 인쇄 작업을 거부해 영어를 모르는 이탈리아 조판공에게 작업을 맡긴 것이다. 이탈리아 조판공은 소설이 섹스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명을 듣고 “그런 건 매일 하는 게 아닌가”라면서 작업에 착수했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영국과 미국에서 판금조치를 당했지만 불법해적판이 쏟아져 나와 비싼 값으로 팔렸다. 단속을 나온 경찰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고 무마했다는 서점 주인도 있었다. 로렌스가 타계한 후 2년 뒤인 1932년 영국과 미국에서 일부 삭제판이 나왔지만 성애 묘사가 들어 있는 해적판은 계속 팔렸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소송 사건은 특히 유명하다. 영국의 펭귄출판사가 소설 속 성애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내기로 결정하자 외설물 검열관이 출판사를 고소했다. 시인, 비평가, 영문학자, 성직자 등 35명에 이르는 증인이 외설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정에 섰다. 증인들은 이 소설을 집으로 갖고 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재판관이 정한 장소에서 각자 떨어져서 읽어야 했다. 검사는 30여 쪽에 이르는 성애 묘사가 꼭 필요한 장면인지 물었고, 증언들은 모두 “지나친 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음란 호색물로만 알려졌던 이 소설이 실은 정신주의적 삶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산업사회의 허위의식을 꼬집었다는 것으로 주제 의식이 부각됐다. 남녀 간의 육체적인 묘사가 자연주의 생명주의의 구현을 상징한다는 등 텍스트의 예술성을 탐색하는 다양한 성과도 나왔다.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재판은 1960년 11월 2일 펭귄출판사가 승소했는데 ‘외설과 예술 사이’를 판정하는 데 32년이 걸렸다. 이 소설의 원제는 ‘채털리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신문소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은 일본에서 배워온 신문제작방법에 근거한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소설은 1903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대동애전(大東崖傳)’이지만 작자가 분명치 않다.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가 무서명(無署名)으로 ‘대동애전’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뒤 대한일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 등에 소설이 연재됐는데, 실제로 작자명을 밝힌 소설은 1906년 ‘만세보’에 게재한 이인직의 ‘귀(鬼)의 성(聲)’이다. 근대 장편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무정’은 남녀상열지사가 한 대목도 없는데 자유연애의 파급에 위기를 느낀 봉건 양반들의 연재 중단 압력에 시달렸다. 1920년대에 들어와 신문소설은 신문지면 구성의 중요부분이 됐는데, 이광수의 ‘단종애사’(동아일보·1928~1929), ‘흙’(동아일보·1932~1933), ‘유정’(조선일보·1933~1934)과 김동인의 ‘젊은 그들’(동아일보·1930~1931). ‘운현궁의 봄’(조선일보·1933~1934), 염상섭의 ‘삼대(三代)’(조선일보·1931), 심훈의 ‘상록수’(동아일보·1935~1936),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전(林巨正傳)’(조선일보·1928)등은 한국소설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김말봉의 ‘밀림’(동아일보·1935), ‘찔레꽃’(조선일보·1936)과 박계주의 ‘순애보(殉愛譜)’(매일신보·1940), 김내성의 ‘마인(魔人)’(조선일보·1939) 등도 인기를 모았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됐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였다. “입술을 고요히 스치고”, “감색 스커트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은미의 하얀 종아리”라는 표현에도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는 서울신문 1954년 3월 14일자에 “(정비석)귀하는 남녀 관계 묘사만이 문학이고 성욕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대학 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염문을 뿌리고, 남편은 직업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의 소설 ‘자유부인’ 덕분에 서울신문의 판매부수가 3만 부에서 9만 부로 올랐다고 한다. 청와대가 문화일보의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선정성’을 이유로 신문을 끊은 것을 보자니 2006년이 1954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 임병호 논설위원

새 엄마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린 시절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링컨은 새 엄마가 가지고 온 물건 중 묘한 것을 발견했다. 천으로 만든 그것은 폭신폭신하고 따뜻했다. “이게 뭐예요?” 링컨의 물음에 계모는 깜짝 놀랐다. 홀아버지 밑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아 온 링컨은 베개가 뭔지 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금세 계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계모는 이 불쌍한 의붓자식에게 친자식 이상 잘해주리라고 결심했다. 링컨은 여전히 가난했지만 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올곧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정직한 에이브’가 링컨의 애칭이었다. ‘콩쥐 팥쥐’ ‘장화홍련’ ‘백설공주’ ‘신데렐라’ ‘ 핸젤과 그레텔’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설화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계모는 거의 비인간적이다. 그 중 콩쥐 팥쥐와 신데렐라는 전래지역과 관계없이 비슷하다. 그러나 오늘날은 혈연을 넘어서는 이른바 ‘대안적 가족 관계’가 생겨나고 이혼의 급증과 함께 피로 맺어지지 않은 재혼 가정도 급속히 늘고 있다. 그러함에도 설화처럼 계모가 전실 소생의 자식을 학대하는 사건이 가끔 일어난다. 전실 소생 딸을 세탁기 통에 넣고 돌려서 아이에게 악몽적 상처를 입힌 비정한 계모 이야기도 있었다. 그럴 때 답답하고 의심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라는 남자’의 존재다. 계모형 설화 속에서 아버지는 전처 소생 아이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출타중이거나 관심이 없다. 생모는 착하고 아버지는 후처만 믿는 무심한 가장이다. 그러나 사실 계모는 고달프다. 계모가 아이들에게 ‘잘 하나 못 하나’ 하고 바라보는 시댁식구들의 감시, 생모 친정식구들의 의혹의 시선에 시달린다. 새 엄마를 기피하는 전실 소생들의 언행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집에 늦게 돌아오고 말을 듣지 않아서 어린 의붓자식들을 마구 때려 딸을 숨지게 하고 아들을 중태에 빠뜨린 20대 주부의 모습은 용서하기 어렵다. ‘계모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지만, 링컨의 계모 같은 새 엄마는 어디에 있는가. 지난 12일 막을 내린 SBS-TV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선 무조건 반항적이던 의붓딸이 새 엄마의 지극정성으로 착한 딸이 되었다. / 임병호 논설위원

낙엽지는 거리

나뭇잎이 때가 되면 잎속의 영양분이 줄기 등으로 이동한다. 이로 인해 엽록소가 소실되어 떨어지는 것이 낙엽이다. 엽록소가 소실되고 남은 색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단풍나무 같은 홍엽이 있고 은행나무 같은 황엽이 있다. 낙엽은 주변 환경의 자극에 민감하다. 예컨대 가로수 은행나무에 가로등이 비치는 잎은 가로등 불빛이 그늘진 잎보다 더 오래 간다. 떡갈나무 같은 건 자연기온에선 낙엽이 지지만 온실기온에선 낙엽이 지지 않는다. 어느새 하늬바람의 냉기가 점차 거세다. 견디다 못해 떨어진 가로수 낙엽이 보도를 뒹군다. 낙엽은 바람따라 뒹굴면서도 하루하루 갈수록 더 쌓인다. 낙엽은 도심속 계절의 전령이다. 수북이 쌓여가는 낙엽을 보면서 겨울이 온 것을, 그리고 또 한 해가 다 가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다. ‘낙엽을 긁어 모아도 / 북풍이 싸늘한 망각의 어둠속으로 몰아가버리네 / 추억과 회한도 저 낙엽과 같은 것’ 덧없는 인생을 낙엽에 비유한 ‘낙엽’이라는 샹송의 노랫말이다.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노랫말에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조셉 코스마가 곡을 붙였다. 영화배우 이브 몽탕이 노랠 불렀다. 1950년대에 서구사회를 휩쓴 유명한 노래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시조문학의 대가인 윤선도의 시조 가운덴 이런게 있다.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 쓸어 무삼하리오’라고 했다. 늦봄엔 낙화, 늦가을엔 낙엽이 계절의 상징이다. 떨어지는 꽃이나 떨어지는 잎은 다 자연의 일부다. 자연은 쓰레기가 아니다. 사람들 손에서 나오는 것이 쓰레기다. 길에서 더러 낙엽 쓸어내는 것을 보면 좀 답답한 생각이 든다. 차도에 너무 떨어진 낙엽은 차가 미끌릴 우려가 있어서 쓴다지만 보도에 떨어진 낙엽은 그대로 두는 것이 자연의 운치다.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고 한 것처럼 ‘낙엽인들 잎이 아니랴!’ 하는 맘을 갖는다. 어차피 삶의 뒤안길은 ‘추억과 회한도 저 낙엽과 같은 것’을, 단풍나무의 진노랑 낙엽을 주어 책갈피 속에 고이 넣어둔 소녀가 생각난다. 잎 지고 다시 피는 낙엽따라 인생은 가고 인생은 온다./ 임양은 주필

새터민들

중국이나 러시아 또 태국 등 동남아를 유랑하는 탈북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들 가운데 국내에 입국한 새터민들은 제3국의 기아속에서 체포 등 사선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탈북 새터민이 지난 9월말 현재로 9천410명에 이른다. 당국은 연말까지 1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토록 많은 새터민들이 그리고 지금도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이 가령 한꺼번에 휴전선을 넘어왔고 또 넘어온다면 어찌 될까를 생각해 본다. 독일의 통일은 서독 행렬의 동독 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두드려 부순데서 시작됐다. 그러나 한반도엔 휴전선이 있다. 휴전선을 가로지른 철조망은 장벽보다 부수기는 쉽다. 쉽지만 지뢰밭 투성이다. 남쪽은 국군, 북쪽은 인민군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북녘 주민이 한 두 사람만 넘어와도 큰 뉴스가 됐던 시대가 지금은 아니다. 거의 날마다 입국하다 시피하는 게 새터민들이다. 그중엔 성공한 사람이 많다. 반면에 좌절한 새터민들도 적잖다. 새터민의 좌절은 자유사회에 적응을 못한데서 기인한다. 북녘생활은 ‘수령님 만세!’ ‘장군님 만세!’를 부르며 통제사회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그러나 남쪽생활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 책임을 창조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북녘의 기계생활에 젖은 새터민 중엔 남녘의 창조생활을 감당키 어려운 사람이 상당하다. 이런데도 탈북자는 늘고 입국하는 새터민들은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른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북녘 정권이다. 인민들 생활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탈북 사태를 빚어 제3국이며 남쪽으로 내몰면서도 전혀 수치를 모른다. 언젠가는 동독 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허문 것처럼 죽음을 무릅쓴 휴전선 돌파의 무더기 난민행렬이 있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장차 통일이 되어도 통제사회의 이질감을 어떻게 자유사회와 접목시키느냐가 문제다. 당장은 날로 느는 새터민들이다. 고향산천을 떠난 사람들이다. 부모형제를 두고 온 사람들도 있다.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목숨걸고 물정에 어두운 곳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마음으로나마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 임양은 주필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