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김옥심

서울·경기민요 명창 김옥심(1925~1988)은 양주에서 태어나 8살에 동기로 조선권번에 입번해 소리를 사사했다. 195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내로라하는 명인들을 제치고 1등을 하면서 국악계에 스타로 도약했다. 1962년 당시 국악인으로는 가장 많은 100여장의 음반을 녹음하고 각종 국악 관련 상을 휩쓸 정도로 인기와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1968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며 연주와 녹음, 후학 양성에 매진했으나 1975년 인간문화재 선정에서 ‘예능계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옥심을 ‘불운한 명창’ ‘재야 인간문화재’로 부른다.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명인이었지만 인간문화재 선정에서 탈락한 뒤 국악계에서 소외되고 소리 전수의 길이 막히면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던 탓이다. 그런데 최근 김옥심 소리의 정수를 모은 ‘김옥심의 서울소리’가 음반으로 출시됐다. 1982년 와병 중에 녹음한 가사 수양산가, 서도잡가 관동팔경, 엮음수심가, 회심곡 등을 비롯해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등 민요와 잡가, 가사 등 장르를 망라한 16곡이 담겼다. 이 가운데 김옥심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정선아리랑은 서울소리에 맞게 편곡한 곡으로 발표 당시 큰 반응을 얻었다. 또 경기소리꾼으로는 처음 녹음했던 ‘수양산가’나 ‘엮음수심가’ 등 김옥심의 유품에서 발견된 릴테이프에 들어 있던 ‘선산애원성’은 국악사에 처음 공개되는 곡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번 음반은 서울소리와 김옥심을 복권하기 위해 애써 온 김문성씨의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돼 의미가 더욱 깊다. 김문성씨는 1996년 청계천을 지나가다가 골동품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벼락을 맞은 느낌’으로 국악에 입문했다고 한다. 1천장 한정으로 발매된 이 음반은 경기소리 공연장에서 직판형식으로 판매된다. 경기민요는 ‘ 밝고 화려하다고만 생각되는데 김옥심의 소리는 우수가 깔려 있는 쓸쓸하고 애잔한 색깔’이라고 평가받는다. 김옥심 명창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국제공직자

올 9월 말 현재 국제기구에서 활동중인 한국인이 245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엔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외에도 국제기구의 고위직에 오른 한국인들이 많다. 한국인의 국제기구 진출사에서 새로운 역사를 세운 사람은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대표적이다. 2004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한국인 최초의 이사에 선출된 오종남 전 통계청장도 경제관련 국제기구에서 손꼽힌다. 오 이사는 호주와 뉴질랜드 등 14개국을 대표해 활약 중이다. 김학수 전 외교부 국제경제대사는 2000년 유엔 사무차장급인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 사무총장에 임명돼 현재도 활약중이다.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김두영 사무차장과 아시아·유럽간 상호 이해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아시아유럽재단(ASEF)의 조원일 사무총장도 고위직 관료다. 채이식 국제해사기구(IMO) 법률위원회 의장, 김재옥 국제표준화기구(ISO) 소비자정책위원회 의장도 있다. 여성으론 유엔인권부(副)고등판무관에 내정된 강경화 외교부 국제기구국장이 단연 주목을 끈다. 내년 1월부터 제네바에서 근무하는 강경화 국장은 한국인 여성으론 유엔에서 최고위직이다. 사법분야에서도 한국인이 많다. 권오곤 유고국제전범재판소(ICTY) 재판관,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 박춘호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재판관, 박선기 르완다 국제전범재판소(ICTR) 비상임재판관 등이 있다. 지난 5월엔 김영혜 부장판사가 한국인 최초로 세계여성법관회의(IAWJ) 이사로 선임됐다. 과거 인사로는 2001~2002년 유엔총회의장을 지낸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 1995년부터 4년간 세계무역기구(WTO) 초대 사무차장을 지낸 김철수 전 상공부 장관, 2002년 키프로스 주둔 유엔 다국적평화유지군(PKF) 사령관을 역임한 황진하 한나라당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때론 전쟁터나 오지에서 사선을 넘어야 하는 위험과 애환도 있지만 지구촌을 누비는 이들이야말로 글로벌시대 최고의 애국자들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언론의 외국어 남용

‘미디어 오늘’이란 신문(10월11일~17일자)에 ‘방송프로명 60% 외국어 점령’이란 제하의 보도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영어 투성이다. ‘뉴스라인’ ‘스타골든벨’ ‘레인보우 로망스’ ‘브라보 웰빙 라이프’ ‘사이언스 매거진 N’ ‘헬로 뮤직 쉐이크’ 등을 예로 들었다. 웬만한 시청자도 우리나라 방송이 우리 말로 하는 프로그램 명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명칭이 수두룩하다. 신문은 ‘한글문화연대’가 한글날을 기려 가진 ‘언론의 외국어 남용 실태와 대책’ 주제의 토론회 내용을 인용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YTN·SBS·EBS·KBS2·KBS1·MBC 등 6개 방송채널의 프로그램 412개 중 59.7%인 246개가 외국어 명칭이라는 것이다. 특히 YTN은 20개 프로그램이 하나만 빼고는 모두 외국어 이름이고, KBS2 역시 59개 프로그램 가운데 72.9%인 43개가 외국어 이름으로 다른 방송에 비해 외국어 사용 수치가 높다고 밝혔다. 신문의 외국어 남용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신문들이 불필요한 영어 어휘를 남용하고 심지어는 아예 영어만을 쓰거나 국적불명의 조어 영어 약자를 남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신문을 우리말로 쓰지 않고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로 만들어 내는 것은 영자신문도 아니고 정말 웃기는 일이다. 이같은 영어 남용의 이유가 가관이다. “기자들과 관련자들이 엘리트 의식에 젖어있기 때문인 것”으로 진단했다. 쉽게 말해서 영어로 표현해야 그럴싸 해보이고 유식해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조선은 길거리(간판)만 보아도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임을 알 수 있습네다”라고 했던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북측 대학생 미녀 응원단원의 말이 생각난다. 어떻게 된 판인지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입버릇 삼는 이 정권 사람들도 영어를 남용한다. 무슨 계획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 으레 영어 투성이다. 길거리 간판이야 점포주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만 언론은 영어 남용을 반성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는 물론이고 공공단체 역시 영어 남용을 자성해야 한다. 우리 말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영어로 쓰는 걸 팔불출로 알아야 한다. / 임양은 주필

대북지원

바다로 흘러든 강물은 바닷물이지 강물이 아니다. 어느 강에서 흘러왔다는 꼬리표가 붙는 것도 아니다. 대북 지원금이나 물품이 인민군대 자금이나 군수품으로 전용된다는 논란은 전부터 있어왔다. 배고픈 인민들에게 주라며 인도적으로 보낸 동포애의 쌀을 군용트럭이 군부대로 싣고 간다는 말이 있었다. 그같은 현장 장면의 사진이 보도된 적도 있다. 말하자면 인도적 의도의 쌀이 비인도적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최근엔 북쪽의 모래를 들여온 업체들이 모래값으로 준 4천200만달러가 군부대로 흘러간 사실을 정부가 묵인했다는 주장이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북측 계약 당사자가 인민무력부 산하의 무역상사라는 것이다. 인민들을 위해 동포애로 보낸 쌀이 엉뚱하게 인민군대가 먹을 군수품으로 쓰인다거나, 모래값으로 준 거금이 인민무력부 자금으로 쓰이는 것은 이를테면 군부대의 직접비 전용이다. 그러나 직접비 전용이 아닌 간접비 전용이라 하여 인민군대에 혜택이 안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지원받은 쌀을 인민들에게 배급해도 지원받은 그만큼 인민군대 유지에 간접적 도움이 되는 것이다. 쌀만이 아니다. 예컨대 금강산 구경값도 간접비 전용이 된다. 여태까지 북에 준 물품이나 달러가 다 마찬가지다. 얻어갔든 빌려갔든 일단 북에 들어간 금품은 평양 정권의 국력이 되는 것이다. 핵 개발에 이어 천억원대가 드는 핵 실험도 역시 다를바가 없다. 공짜로 주었든 대가로 주었든 북에 준 모든 금품은 핵 실험의 저력이 된 것이다. 같은 이슬도 벌이 먹으면 꿀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다. 정부와 국회는 쌀·비료·에너지 등 9천700억원을 비롯한 1조716억원 규모의 내년도 대북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할 것으로 알려졌다. 핵 실험을 강행한데 대한 당연한 조치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게 이 정권이다. 나중엔 삭감을 않거나 삭감해도 다시 살릴 공산이 없지 않다. 바다로 흘러간 강물은 바닷물이지 강물이 아닌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임양은 주필

빈민은행

우리도 이런 은행이 생기면 은행이 배겨날 수 있을른지 모르겠다. 돈을 보증도 없이 서류도 없이 빌려 준다. 갚지 못해도 문제삼지 않는다. 대출 자격은 빈민이다. 대출 한도는 자영업을 위한 소액자본의 대안금융이다. 이런 은행이 생기면 이내 거들날 것으로 보는 게 상식이다. 1976년 방글라데시에서 이같은 그라미은행이 생겼을 적에도 금융가의 비웃음을 샀다. 빈민 전용의 이 은행은 다만 대출자가 5명씩 조를 짜 신용을 서로 감독하도록 했다. 은행의 사후 관리는 영업 등 교육 프로그램을 지도하는 것 뿐이다. 방글라데시 금융가의 조소를 받던 그라미은행은 그러나 지속적인 성장을 보였다. 자진 상환율이 98%에 이른다. 지난 1년동안의 대출액만도 6억8천900만 달러다. 1천500만 달러의 수익금을 냈다. 수익금은 재활기금으로 충당된다. 1980년대 미국에 전파된 것을 비롯해 세계 52개국에 빈민은행을 파급시킨 것으로 보도됐다. “가난한 사람도 신용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은행 설립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방글라데시 치타공대 경제학 교수의 말이다. 올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유누스 교수의 말은 명언이다. 명언도 돋보이지만 그같은 기대에 부응할 줄 아는 방글라데시 빈민대출자들의 신용정신 또한 돋보인다. 가난한 자, 은행 손님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빈민은행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생각케 한다. 적선(분배) 보다는 자활(성장)이 역시 제대로된 빈민퇴치의 왕도라는 사실이다. 국민의 혈세를 구호성 배급주의로 소모하면서 기업 규제로 성장을 저해하는 이 정부의 분배정책은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누스 교수는 빈자에게 빵을 주기보다는 빵을 만들어 갖는 길을 터주었다. 올 12월4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앞서 오는 18일 한국에 온다. 노벨상 결정 이전에 2006년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바가 있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서울에 와선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주목된다./ 임양은 주필

헬리콥터 부모

자녀가 다 자란 뒤에도 주변을 맴돌면서 간섭을 멈추지 않는 부모를 일컫는 신조어가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s)’다. 최근 미국과 영국의 주요 언론에는 대학에서 수강과목을 골라주고, 교수와의 상담에 끼어드는가 하면, 좋은 룸메이트를 배정해달라고 로비하는 헬리콥터 부모의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 부모는 심지어 자녀가 입사한 기업과의 연봉협상까지 나서고 있다고 한다. 용어는 새롭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얘기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끝나던 치맛바람이 이젠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학부제 대학 입학 후 학과를 선택하는 학과설명회는 아예 반 이상이 부모들이다. 취업설명회에서도 자녀 손을 잡고 온 부모의 모습이 태반이다. 대학공부나 취업에선 물론 결혼과 이혼과정에도 부모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다. 60대 초반 주부 A씨는 헬리콥터 부모의 전형이다. 큰 아들을 자신이 결혼시켰다가 마음에 안들어 이혼시켰다. 헬리콥터 부모들은 자녀가 필요하다면 슈퍼맨이나 베트맨을 자처한다. 한 어학연수 전문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응답자 가운데 16%만이 ‘어학연수 비용을 본인이 마련하겠다’고 했다. 반면 25%가 1천만원이 넘는 연수경비를 부모가 마련해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한국노동연구원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가정을 꾸려 부모로부터 독립해 사는 30, 40대 10가구 중 1가구 정도가 부모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캥거루족’으로 나타났다. 헬리콥터 부모가 생기는 이유는 자녀수가 줄고, 부모학력이 고학력이며, 상대적으로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풍족해진 시간과 돈을 한 두명인 자녀에 집중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저마다 가정에서 왕자와 공주로 키워지고 있다, 이런 ‘풍족한’ 관심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헬리콥터 부모의 역할이 대학입시까지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자녀의 인생을 심각하게 망칠 우려가 크다. 요즘 일본에서도 엄마와 아들이 늘 세트로 다니는 ‘캡슐모자(母子)’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헬기부모, 캡슐모자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특히 젊은 부모들이 걱정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방송작가

일반적으로 방송대본을 집필하는 것으로 알려진 방송작가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주말극이나 일일극, 미니 시리즈 등의 극본을 쓰는 드라마 작가와 교양·연예·시사·다큐 프로그램의 제작을 담당하는 구성작가, 외화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번역작가 등이다. 현재 공중파 3사를 비롯 케이블 TV와 외주제작업체 프로덕션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2천명을 넘는다. 방송작가는 7 대 3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소속작가를 기준으로 드라마작가는 360명 정도며 외화 번역작가는 100여명, 나머지는 구성작가다. 방송작가들의 세계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다. 방송계에서 특A급으로 분류되는 S씨, L씨, K씨 같은 드라마 작가의 경우 최근 원고료가 편당 2천만원을 넘었다고 한다. 50~60회 짜리 대하극을 집필한다면 원고료가 10억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은 세칭 ‘2000클럽’으로 통한다. 공중파는 원고료 상한선이 있는데다 특별고료까지 합쳐도 이 수준에 못미쳐 외주업체들이 ‘2000클럽’ 작가들을 싹쓸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성작가의 경우 전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메인작가와 한 코너만을 전담하는 서브작가(꼭지작가), 이들을 돕는 보조작가에 따라 원고료에 차이가 난다. 편당 원고료를 받는 메인작가와는 달리 월급제인 보조작가의 고료는 외주제작업체의 경우 70만~80만원, 공중파는 100여만원을 웃도는 수준이다. 코너작가는 경력에 따라 편당 200만~400만원 정도를 받지만 50분짜리 다큐멘터리 한편 제작하는데 길게는 6개월까지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액수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방송계에 보편화돼 있는 불평등한 계약 관계다. 작가와 프로덕션, 방송국간의 계약은 대부분 구두로 이뤄진다. 게다가 원고료는 100% 사후 지급이다. 이 때문에 군소 프로덕션에선 프로그램을 다 제작해 놓고도 방송이 안된다는 이유로 원고료를 미루거나 심지어 떼먹는 일까지 발생한다. 계약서가 없어 작가들은 불이익을 받아도 하소연 할 데 조차 없다. 방송작가들이 노조를 결성하려는 이유다. 원고료의 많고 적음만이 문제가 아니다. 투쟁을 해야 타결되는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 방송작가들이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은 이제 없어질 때가 됐다. / 임병호 논설위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

도학자(道學者)로 주자성리학을 조선화시킨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시인이며 서예가였다. 평생 140여회의 벼슬이 내려졌어도 70여회를 병이나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1566년 7월, 명종이 기대하는 뜻이 간절한데도 퇴계가 오지 않자 독서당 신하들에게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는다’(招賢不至歎)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고, 화공에겐 ‘도산도’를 그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게 했을 정도다. 퇴계가 이렇게 출사를 거절한 실제 이유는 학문의 목적을 출세가 아닌 자기수양에 두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생애 가운데 50, 60대 도학자로서의 역정을 저술 중심으로 보면, 53세 때 ‘천명도설후서·부도’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주자사설요’ ‘계몽전의’ ‘자성록’ ‘고경중마방’ ‘송계원명이화통록’ ‘심무체용변’ ‘심경후론’ ‘전습록변’ ‘성학십도’ 등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이기호발설’을 중심으로 하는 주리적 정통론은 ‘주자서설요’ ‘사단칠정논변’을 통해 확립됐고, 거궁궁리로 요약되는 퇴계 도학에서 심학의 문제는 ‘심경후론’과 ‘성학십도’에 집약되었다. 퇴계는 이들 저술을 통하여 성리설·예학·수양론·의리론 등에서 조선시대 도학 이념의 여러 기본영역을 확고히 정립하고 심화시켰다. 요컨대 평생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 일관한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스스로 지은 ‘묘갈명’에서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라고 고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실천궁행으로 역사에 사표가 된 퇴계의 참모습은 최후의 순간에 더욱 빛이 난다.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작고한 해인 1570년 12월 4일 조카 영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장은 국장(國葬)을 치르지도 말고,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는 물론 비석도 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엔 단지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게 할 정도로 검약했다. 같은 날 제자들에게 평소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했고,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다. 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하고는 유시(酉時, 오후 5~7시)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 받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고매한 도학자다운 생애다. /임병호 논설위원

‘영수회담’의 어폐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 알린 여야 영수회담 제의는 결국 5당 대표 회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북의 핵 실험 예정 발표로 통보했던 영수회담 제의는 청와대측의 검토형식으로 유보됐다가 핵 실험이 있고나서 노무현 대통령이 5당 대표의 청와대 초청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수회담이란 영수(領袖)에 어폐가 심하다. 국어대사전은 영수란 말을 ‘여러 사람 중의 우두머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강 대표가 당(黨)의 우두머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다분히 권위주의적인 게 또 ‘영수’란 말이다. 영수회담의 용어 역시 권위주의 시대에 쓰였던 정치용어다. 집권당의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했던 시절이다. 그것도 그냥 대표가 아니고 ‘총재’라고 했다. 강 대표가 노 대통령과의 회동 요구에 여야 영수회담이라고 한 것은 이런 어감상의 어폐도 있지만 어의(語意)로 보아도 어폐가 있다.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위는 평당원이다. 물론 대통령 지위의 영향력을 당에 직간접으로 발휘하고 있긴하나 법통으로는 집권당의 총재도 아니고 대표도 아니다. 강 대표의 회동 제의는 정부 조직의 지위가 아닌 정당법에 의한 정당, 즉 제1야당 대표 자격으로서 한 것이다. 야당 대표가 여당의 평당원에 제의한 여야 영수회담이란 당치않은 소리다. 5당 대표 중 열린우리당 대표로는 김근태 의장이 참여했다. 강 대표의 영수회담 제의는 이번만이 아니다. 전에도 영수회담이란 걸 제의한 적이 있다. 영수회담이란 말을 선호하는 덴 권위적 위엄이 있기 때문인 진 모르겠지만 시대적 어감으로나 어의적 해석으로나 어폐가 많아 즐길수 있는 말이 못된다. 북이 ‘김일성 수령’으로 속된 수령(首領·국어대사전 ‘한 당파나 무리의 우두머리’)의 용어를 절대·신성·최고의 개념으로 만든 ‘수령론’ 같은 개작이 있으면 몰라도 일반적 ‘영수’ 용어의 영수회담이란 당치않다. 강 대표가 앞으로라도 노 대통령과의 회동을 제의하고자 하면 말 그대로 ‘대통령 면담’ 제의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임양은 주필

이상한 대법원 권고

판사·검사·변호사가 짜면 못할 일이 없다.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재판에 붙인 검사, 재판받는 피고인의 억울한 사정이나 딱한 형편을 변론하는 변호사, 이에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직분이 각기 다르다. 다른 직분의 법조 삼륜이 한통속이 되면 그 재판은 엉망일 수밖에 없다. 무죄가 유죄가 되고 유죄도 무죄가 날 것이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다는 대법원의 재판 진행절차 협의 권고가 또 말썽이다. 첫 공판 전에 갖는 진행 협의는 ‘사개위’가 제출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공개된 법정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상황에 따라선 비공개가 가능하도록 돼 있다. 대법원이 일선 판사들에게 권고한 첫 공판 전 진행 협의는 법 개정안의 공판 전 준비절차 수준을 원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공개 법정에서 갖는 것은 환영하지만 판사실 같은 공개법정 이외의 장소에서 갖는 덴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검찰측 입장이다. 이에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법원이 소송 지휘권을 활용, 비공개로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검찰이나 변호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걸로 전해졌다. 검찰의 입장과 법원의 반응이 어떻든 분명한 건 있다. 방청객이 없는 법정 이외의 장소에서 갖는 판사·검사·변호사의 협의 모임은 공판중심주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법원은 변호사 등의 판사실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잘 하는 일이다. 모든 것은 법정에서 피력되고 논의되고 처리돼야 한다. 판사실 출입 제한은 단순히 브로커의 준동을 막기 위한 것 만은 아니다. 그런데 판사실에서 판사·검사·변호사가 모여 재판 진행 협의를 갖도록 하라는 갑작스런 대법원 권고는 좀 황당하다.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다 보니 재판이 지연될 수 있어 그러는 진 몰라도 아직 법제화되지 않은 것을 권고하는 것은 실정법 정신에 합치된다 하기가 어렵다. 법원이 재판에 소송지휘권을 갖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검사나 변호사를 맘대로 ‘오라 … 가라’ 하는 것이 지휘권의 재량에 든다 할 순 없다. 아뭏든 판사·검사·변호사가 법정 이외에서 갖는 모임은 ‘밀실협의’의 인상이 짙다.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더라도 장소를 법정으로 국한해야 된다. / 임양은 주필

朝鮮朝 여왕?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빅토리아 여왕(1819~1901) 두 여왕 치세에 전성기를 누려 오늘날의 영국 터전을 닦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안으로는 중상주의로 국부를 확립, 르네상스로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기를 이룩했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들이 이때 배출됐다. 밖으로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 해상제국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내적으로 자유주의적 개혁과 함께 산업을 발달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정책에 바탕을 둔 시장 획득으로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1952년 2월5일 즉위한 지금의 엘리자베스 2세는 상징적 국왕이지만 역시 대연방제국의 자상한 어머니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당시 처칠 영국 수상은 “신이 우리에게 보내준 서광”이라고 말했다. 역사상 최초의 여왕은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인 클레오파트라(BC 69~30)다.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제휴한 함대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자 자살했다. 632년에 즉위한 신라 선덕여왕은 동양 최초의 여왕이다. 당나라 고종의 황후가 고종 사후에 예종 등을 폐하고 690년 스스로 제위에 오른 측천무후(則天武后)보다 62년 앞선다. 신라는 진덕·진성의 두 여왕이 또 있었다. 일본은 아키히토 국왕 손주 가운데 남아가 없어 여왕을 세우는 왕실전범 개정을 서둘다가 둘째 며느리 기코가 이번에 아들을 낳는 바람에 여왕제 추진이 불발로 그쳤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없던 여왕이 왕조가 아닌 이 시대에 갑자기 나타났다. 지난달 29일 열렸던 이해원(87) 황손의 대한제국 30대 황위 승계식이다. ‘대한제국황족회’가 추대한 이 분은 의친왕의 딸이다. 그러는가 했더니 이번엔 ‘우리황실사랑회’ 등에서 적통이 아니라며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추진한 단체나 반대하는 단체나 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사람들이다. 글쎄, 경위가 어떻든 이미 끝난 망조(亡朝)를 두고 여왕 승계라니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임양은 주필

청와대 신무문 공개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는 조선시대 고종의 서재다. 1868년(고종 5년) 6월 경복궁이 중건되고 나서 신무문(神武門) 안에 건립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은 임금이 지금의 청와대 뜰에서 거행된 과거장에 행차할 때만 문을 열었다. 소장된 책이 많았다. 무영전총서(武英殿叢書) 851권 같은 다수의 전집류를 비롯해 소장된 책이 광범위했을 뿐만이 아니라 수량 또한 방대하였다. 집옥재에 있던 이런 책들은 규장각 등에 소장돼 있다. 청와대 경내인 집옥재가 신무문과 함께 지난 달 29일 개방됐다. 서울 청운초등학교 5학년 1반 어린이들이 기념행사의 하나로 이에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린이들을 맞아 연설을 한 것은 있을법 한 일이다. 어린이들에겐 평생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 희망은 지배와 피지배자 간의 차이가 작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설 내용 중 한 대목이다. 그런데 신문 보도는 이렇게 전했다. 어느 대목에서 “대통령이 말하는 데 지루하다고 하면 어떡해…”라는 노 대통령의 농담에도 아무 응답이 없자 다시 “여러분 안 지루하지요?”하자 “예!”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안 지루하지요”하는 데 “아닙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의 연설은 약 20분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역시 대통령의 화법이다. 긍정을 요구하는 화법은 국무회의 등 주변의 지도급 인사, 즉 중책을 맡은 기성인들도 거역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아니요!”하고 누구 하나가 간언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접근이 금기됐던 경복궁 숙정문 개방에 이어 신무문이 개방된 것은 잘한 일이다. 이날 노 대통령은 “내년 4월이면 서울 성벽을 따라 자하문까지 갈 수 있다”면서 “최상의 코스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청와대 주변을 점차적으로 개방,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은 보기에 무척 좋다. 기왕이면 민심에 접근하는 대통령 마음의 문도 편견없이 이처럼 활짝 개방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 임양은 주필

정운찬 교수

‘망둥이가 뛰니까 빗자루도 뛴다’는 속담이 있다. 남이 한다고 해서 그럴 처지도 못되는 사람이 덩달아 나서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다음 번 대통령에 나설 요량인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엔 나설만한 사람이 물론 있다. 그런가 하면 ‘망둥이’도 못되는 ‘빗자루’같은 엉뚱한 사람도 있다. 이런 판에 “저는 대통령 감이 못됩니다”하는 사람이 있다. 그 자신은 나서겠다고 한 적도 없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총무가 먼저 말을 꺼내어 말이 번졌을 뿐이다. 정운찬 서울대 교수가 바로 화제의 주인공이다. 며칠 전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 주최 조찬간담회 자리에서 출마 가능성의 질문을 받고 그같이 말했다. 서울대 총장 당시 정부의 잘못된 대학정책에 강력히 맞서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그는 지난 7월 총장 임기를 끝내고 경제학부 교수로 복귀했다. 정 교수는 간담회에서 “정치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정치 이야기가 아닌 경제학자로서의 경제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지금은 경기부양책을 써야 할 때”라고 자신의 처방을 제시한 것으로 보도됐다. 과거에는 경기부양보다는 구조조정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같아서는 앞으로의 생산능력 배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므로 경기부양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꺼져가는 성동동력을 살려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크진 않지만 강한 실력을 갖춘 ‘강소국’ 유형을 한국이 추구해야 할 일류국가 모델로 제시하면서 아일랜드를 예로 들었다. 차기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질문엔 “기초가 튼튼하고 겸손한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로 말하면 너도 나도 나서는 차기 군상 중엔 상급 품질에 비유된다. 이런데도 정치권에 “제발 거명조차 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하물며 ‘꼴뚜기’나 ‘빗자루’ 같은 함량 미달의 자천자들은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정부는 정 교수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을 게 뻔해 걱정이다. / 임양은 주필

송편

떡은 곡식으로 만든 먹거리 중에서 가장 정결한 음식으로 이 중 송편은 추석 차례상에 밥과 국 대신 올린다. 우리 조상들은 햅쌀가루로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으며 감사의 마음과 다음해를 기원하는 정갈한 마음을 담았다. 요즘은 추석이 아니어도 송편을 먹는 날이 많다. 백일·돌잔치에도, 한식 뷔페에도 송편이 빠지지 않는다. 송편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보이는 종(?)과 열(? 이 송편인 것으로 추정된다. 종은 줄풀잎에다 기장을 싸서 삶아낸 것으로 각서(角黍)라고도 하였다. 열은 찹쌀가루를 꿀로 반죽하여 길이 1척, 너비 2촌으로 펴서 빗으로 잘라 이것에 대추와 밥을 아래위로 붙인 다음 기름을 골고루 바르고 대나무잎으로 싸서 쪄낸 것이다, ‘목은집(牧隱集)’에 보이는 팥소를 넣은 차기장 떡도 송편의 일종으로 추측돼 고려시대에 일반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정월 보름날 농가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집집마다 장대에 곡식 이삭을 매달아 대문간에 세워 두었다가 중화절(中和節·2월 1일)에 이것으로 송편을 만들어 노비에게 나이수대로 나누어주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이날을 속칭 노비일이라고 하며, 이 떡을 나이떡이라고 불렀다. 이 풍속은 중화절부터 시작되는 농사일을 잘 해줄 것을 당부하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추석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고 하였다. 이 풍습은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와 지금은 송편이 추석의 상징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 빚는 며느리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시간은 흘러가는데 / 적적하던 내 고향집 오늘은 북적대지만 우리 모두 다 떠나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 또 우실지 몰라” 안치환이 작사·작곡·노래한 ‘고향집에서’ 3절은 추석을 맞은 고향집 정경을 담았는데 며느리들이 마루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며느리들 뿐이겠는가.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딸을 낳는다”며 온가족이 모여앉아 송편을 빚는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정겹다. 하지만 요즘은 떡집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팔기 때문에 집에서 송편을 빚는 풍속이 점점 사라져 간다./ 임병호 논설위원

박인환의 계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8·15 광복 후의 혼란과 소용돌이, 6·25 전쟁의 황폐를 의식하면서 도시적 서정시를 쓰다가 30세로 요절한 박인환(1926~1956) 시인은 ‘세월이 가면’을 서울 명동의 한 주점에서 즉흥시로 지었다. ‘명동백작’ ‘댄디 보이’로 불리던 박인환은 주점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세월이 가면’을 썼고, 한 자리에 있던 극작가 이진섭 역시 즉석에서 작곡, 테너 가수 임만섭이 이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 가히 전설적인 일화다.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국민적인 애창곡이 됐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올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중략)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목마는 하늘에 있고 /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가을 바람 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목마와 숙녀’도 시대적 고뇌를 노래한 서정시이지만 그러나 박인환은 감상주의적 시인이 아니었다. 현실비판적이었다. 기자의 신분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고,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1952년 퇴사했다. 지난 8월 발간된 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에 실린 시 80편과 산문 70편이 박인환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박인환의 계절이 되었다. / 임병호 논설위원

쌀값

생명의 근원으로 불렸던 쌀의 가격이 ‘껌 값’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됐다. 그나마 저가의 수입쌀이 밀려들고 있어 가격은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지난해 국민 한 사람이 소비한 쌀은 80.7㎏으로 하루 221.2g에 불과하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쌀 관측’ 자료를 보면 올해 1인당 쌀 소비량이 78.7㎏으로 줄어 한 가마(80㎏)를 밑돌 것이라고 예측했다. 30년 전인 1976년(328.0g)에 비해 3분의 2 수준이다. 쌀 소비는 과일·채소 소비 증가와 미용·다이어트 등에 밀려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쌀은 120g 안팎으로 하루 소비량은 두 공기도 안 된다. 대형 할인점에서 파는 20㎏들이 고급쌀 한 포대의 가격이 5만원선이니 한 끼 분량의 쌀값은 300원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껌 한 통 값이 500원이고, 유명 메이커의 3~4인용 피자 한 판이 2만~3만원에 이르는 상황을 감안하면 쌀값은 싸도 너무 싼 편이다. 쌀값은 2000년을 정점으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생산비는 갈수록 치솟는다. 지난해 기준으로 80㎏ 한 포대 당 생산비는 9만원을 웃돈다. 반면 판매가는 잘 받아야 15만원대이고, 12만원에 못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쌀농가 수익은 갈수록 줄어든다. 지난해 10a(300평)당 총수입은 87만9천411원이지만 생산비를 제외한 순수익은 29만1천516원으로 1994년(27만8천948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쌀 농가의 82%인 74만가구는 1.5㏊(4천500평) 미만의 영세농이다. 1년간 논 4천500평에서 흘린 땀의 대가(순수익)는 400만원을 조금 넘는다. 쌀 농사를 지어 온 우리 조상들에게 1천석(한 석 144㎏)의 쌀을 생산하는 ‘천석(千石)꾼’은 큰 부자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천석꾼이라도 부자 소리를 듣기 어렵게 됐다. 쌀 1천석을 생산하려면 논 30㏊(9만평·평당 평균 생산량 1.6㎏)는 돼야 하는데 순수익은 연간 1억원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유다. 1971년 1천471만명이었던 농가인구가 2004년 341만명으로 76.8%나 줄었다. 그런데도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었단다. 농촌 현실을 못 보는 장님 정부다. / 임병호 논설위원

대통령 내외의 추석 선물

추석엔 으레 추석선물이 따른다. 사회적 전래 미풍이다. 문젠 추석선물이 아닌 추석뇌물이다. 이래서 공직사회의 선물을 정부가 금지시켰던 적이 있다. 이러다보니 소비가 위축되어 이해찬 전 총리는 선물 수준의 추석선물은 해도 괜찮다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직사회의 추석선물은 역시 경계의 대상이다. 올 추석에도 아마 중앙·지방의 관아 주변에 암행감찰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부부도 설과 추석 명절엔 선물을 한다. 취임 초엔 청와대의 관행이었던 명절 선물을 중단키로 했다가 “정(情)으로 주는 선물에 인색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정대철 민주당 대표(열린우리당 분당 전)말에 따라 명절 선물을 다시 시작했다. 대통령의 선물은 예를 들면 복분자 세트 등으로 약 3만원 상당이다. 대상은 각계각층의 5천명 한도다. 그러니까 택배로 배달되는 대통령의 선물을 받으면 전국의 5천명 한도내에 간택된 셈이다. 선물은 알맹이도 알맹이지만 상자가 무척 볼품이 있다. 대통령 휘장인 금박의 봉황 무늬에 내외의 이름이 씌어 있다. 이래서 어떤 못된 사람이 청와대를 빙자한 사기에 선물상자를 악용한 사례가 있었다. 그 사기꾼은 언론인으로 발표됐지만 사실은 언론인으로 보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노 대통령 부부는 이번 추석에도 명절 선물을 했다. 국산차 세트를 보냈고 대상 가운데는 지난 여름의 수재민과 소년소녀 가장 등이 포함됐던 것 같다. 대통령 내외가 이들에게 추석선물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런데 소년소녀 가장이나 수재민들에게 차(茶)선물은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분분했던 모양이다. 딴은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일단 부친 선물을 회수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청와대는 궁리끝에 수재민과 소년소녀가장에게 쌀같은 걸로 적절한 선물을 따로 골라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이리하여 대통령 내외의 추석선물을 두 번 받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수재민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애시당초 이를 예견치 못한 청와대측 단견은 매사가 이럴 것 같아 답답한 생각이 든다. / 임양은 주필

홍콩의 황금궁전

황금침대·황금소파·황금테이블 여기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실내수레 그리고 황금변기·황금목욕탕 등 실내 장치가 온통 황금장식으로 치장됐다. 이쯤되면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 대궐을 돌아본 소감을 대궐 기둥도 금덩어리였다고 과장한 ‘동방견문록’이 가히 현실화한 셈이다. 외신은 홍콩의 한 유명 기업인이 이같은 객실용 스위트룸을 지었다고 전했다. 객실이 자그마치 약 200평 규모다. 번쩍거리는 황금장식 가구이다 보니 드넓은 객실의 다른 장식품도 초고급품이다. 몇 해 전에 일본의 어느 호텔에서 목욕탕을 황금으로 꾸민 적은 있었어도 황금가구 일색으로 꾸민 숙박업소는 일찍이 없다.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다. 이 황금궁전을 짓는데 5년이 걸렸고 이에 들어간 황금이 무려 2t이라니 이를 지은 사람도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어지간한 호사가(好事家)인 모양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러지 않고는 이토록 엉뚱한 일을 벌일 순 없는 것이다. 아마 옛 황제도 이런 궁전침실은 갖지 못했을 황금궁전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잠깐 구경 한 번 하는데 우리 돈으로 약 5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하루 숙박비는 무려 2천400만원이다. 그런데 이런 거액에도 불구하고 숙박 예약이 밀려들어 야단들이라는 것이다. 중국도 중추절(仲秋節)이라고 하여 추석을 쇠는데 오는 10월1일부터 8일까지의 연휴 기간에 예약을 놓친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연휴 이후의 예약도 사양치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은 1국2체제의 중국땅이다. 공산당 1당 체제의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개혁·개방으로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하다. 혁명 이전의 농경사회 같은 빈부의 격차가 산업사회에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 중국 정부가 이에 골머릴 앓고 있다. 그러나 일단 돈 맛을 알게 된 인민들의 의식을 예전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래서 농촌 잘살기 캠페인으로 벌이는 것이 ‘신농촌운동’(새마을운동)이다. 황금궁전의 인기는 중국 사회의 변화를 가늠할수가 있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임양은 주필

또 복권 ‘복권천국’

복권은 잘사는 나라의 사회적 오락이다. 그러나 못사는 나라의 복권은 사회적 흡혈귀다. 우리의 복권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떻든 복권천국이다. 온라인복권 인쇄복권 전자복권 등 열두가지다. 올 복권 발행 총액이 3조5천977억원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4조2천71억원에 비해선 19.2% 줄었다. 복권 수요층인 서민생계가 말이 아니어서 구매력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복권을 열심히 사는 사람은 서민층이다. “딴 덴 희망을 걸데가 없으니까요. 유일한 희망, 한 주일을 사는 희망을 여기에 걸고 있으니까요” 어느 로또복권 가게를 들른 40대 남자의 얘기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쑥스러워선지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참 기막힌 일이다. 그러니까 매주 그토록 많은 복권으로 그야말로 ‘인생역전’의 벼락치기 떼부자가 생기긴 한다. 그 대신에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없는 돈을 갖다 바친다. 이번에는 행여나 하는 ‘낙타 바늘구멍’ 같은 기대감 속에 복권으로 갖다 바치는 서민들의 돈은 회한이 서린 기막힌 돈들이다. 이를 즐기는 것이 이 정부다. 복권수입을 좋은데 쓴다지만 서민층 돈을 이렇게 긁어모아 좋은데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속내를 알 수 없다. 복권 판매 수익금은 연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1조2천억원 가량 된다. 그렇지 않아도 경마·경륜·경정 등 사행성 오락이 많다. 여기에 ‘바다이야기’로 국민의 사행성 도박을 조장시켰다. 정부가 허가한 이같은 사행성산업으로도 모잘라 직접 수익금을 챙기는 복권장사에 열 올리고 있다. 정부는 온라인으로 구입, 추첨으로 당첨자를 가리는 인터넷로또를 오는 11월부터 발행키로 했다. 정부 관계자의 말이 웃긴다. “지금의 로또보다 당첨률이 높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사행성 조장이 아니다”란 얘기다. 길거리 약장수 같은 소릴, 사회병리현상을 조장하는 정부 관계자 입에서 듣는 현실이 한심하다. / 임양은 주필

여성 상위시대

‘세계는 남성이 지배한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이 지배한다’고 했다. 그럴싸 했던 이 말도 이젠 달라졌다. 세계엔 여성을 최고 지도자로 두고 있는 국가가 점점 늘어간다. 비근한 또 하나의 예를 든다. 지금 중동을 순방 중인 한명숙 국무총리는 남편을 대동하고 있다. 여성이 남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남성이 여성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섹스파업을 내용으로 하는 ‘여인들의 평화’란 희곡이 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BC 445~385)가 쓴 작품이다. 당시 그리스가 양대 진영으로 갈려져 스파르타 맹주동맹인 펠로포네소스와 30년이나 치른 전쟁이 작품의 배경이다. 내용은 여주인공 류시스트라테가 “남자들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전쟁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면서 아테네의 모든 기혼 여성들을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모이게 한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종교 및 정치의 중심지다. 이 모임은 드디어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남편과의 잠자리를 절대로 같이하지 않는다는 굳은 맹세를 결의했다. 기혼 여성들의 섹스파업 동맹으로 동침을 거부당한 남성들은 견디다 못해 전쟁을 종식시켜 마침내 평화를 이룬 것으로 됐다. 그런데 2천410여년 전 작품의 섹스파업이 콜롬비아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인구 30만여 명의 페레이라는 커피 산지로 유명한 한편 범죄로 악명이 높은 도시다. 총기로 무장한 조직폭력배가 설쳐 지난해만도 480여 명이 살해된 것으로 전한다. 이에 당국의 무장해제 명령이 떨어지자 범죄조직원 아내나 애인들이 “당국에 협조해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해 남자들이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있는 것은 체력우위가 조건이던 농경시대, 산업화시대를 지나 체력과 무관한 정보화시대의 발달에 기인한다. 정보화시대는 곧 지식산업사회인 것이다. 예컨대 고시 합격률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아간다. ‘세계는 남성이 지배한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이 지배한다’에서 ‘세계는 여성이 지배한다. 남성 또한 여성이 지배한다’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장차의 여인천하는 남성사회보다 평화가 깃들 것인지./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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