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부터 읽어라

요즘 재미를 더해 가고 있는 MBC-TV 사극 ‘이산’은 조선조 21대 영조와 22대 정조 때 얘기다. 개혁 정치를 펼쳤던 정조 이산은 세손 시절 제왕의 수업을 철저히 받았다. ‘적을 가까이 두라’. 이산은 영조로부터 적을 가까이 두는 법을 배운다. 궐 안에 있는 음해세력을 알고 있지만 발본색원하지 않고 묻어두는 자세를 익힌다. 몇몇을 추려낸다 해도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은 언제나 생겨나는 법을 안 것이다. 정치적 라이벌이 없으면 물이 썩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게 상생하는 법이다. ‘위보다 아래 눈치를 보라’. 영조는 세손에게 임금의 권한을 넘기면서 자신의 눈치를 보기보다 백성의 눈치를 보고, 백성의 마음에 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리고 임금의 처결이 백성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백성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대통령 후보 때는 민생정치를 외치면서 재래시장을 돌고 서민들을 만난다. 상인들의 손을 잡고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던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국민에게 묻지 않고 비서들에게만 의존해 정책을 추진한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 영조는 정조에게 군왕의 자질 중 하나가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차기 정권이 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청년실업, 비정규직, 사교육, 심화된 양극화, 부정부패, 고용불안 등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준을 분명히 정하고 원칙을 중심으로 하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책을 펼치는 것이 필요하다. ‘측근을 조심하라’. 생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됐듯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을 겪을 때 세자 시강원 설서(說書) 홍국영의 도움이 컸다. 홍국영은 세손의 즉위를 방해한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이 커 숙위대장, 도승지, 대제학, 대사헌을 역임했지만 정조의 총애를 빙자하여 세도정치를 자행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을 과감히 축출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신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은 해악이 많았다. 대통령 당선자가 염두에 둬야 할 얘기들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푸틴 총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제1부총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푸틴이 메드베데프를 오는 3월 대통령선거에서 통합러시아당의 후계자로 지명한 게 지난 10일이다. 이에 메드베데프는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 푸틴을 차기 정부의 총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푸틴은 17일 당대회에서 메드베데프의 총리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공식 표명했다.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다. 전직 대통령이 후계자 밑에서 총리를 하겠노라며, 세계 어느 나라 정치사에도 없는 이변을 자청하고 나선 푸틴의 처신은 권력에 대한 끝없는 야망이다. 푸틴은 지난 2일 치른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당 비례대표 1번에 올라 60%가 넘는 지지율로 당을 압승시켰으므로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푸틴 총리’ 시나리오는 헌법의 3선연임금지를 뛰어넘는 러시아판 꼼수다.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 대통령 밑에서 실세 총리를 하다가, 어느 시기에 후계자 대통령을 사퇴시킨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하면 3선연임이 아니라는 해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3선중임’ 금지가 아닌 3선연임 금지란 데 그같은 해석의 함정이 있다. 푸틴은 3선연임 철폐 개헌, 내각제 개헌 등 여러가지 집권 연장 방법을 궁리끝에 총리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라스푸틴은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인 알렉스산드라의 마음을 교묘히 사로잡은 괴승이다. 대신의 임면, 중죄인의 처벌 등 내정만이 아니고 외교에까지 간섭하여 니콜라이 2세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둘렀다. 푸틴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고도 실세 총리의 국가지도자로 후계자인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 것이고, 메드베데프 역시 이를 모르지 않고 푸틴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내년 3월 대통령선거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지리노프스키 자유민주당 당수 등도 출마할 것이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푸틴의 후광을 업은 메드베데프의 당선이 유력하다. 푸틴에 대한 이런 국민적 지지는 경제를 살린데 기인한다. 경제를 살린데 대한 국민적 지지는 좋지만 ‘푸틴총리’ 시나리오는 아니다. 러시아판 야바위 정치가 다른 자유민주주의 후진국에 혹시 전염되지 않을까하여 우려된다. /임양은 주필

기후협약

지난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유엔기후변화협약총회장, “미국이 어떤 이유에서든 협상을 주도하기 싫다면 나머지 우리가 주도할 수 있게 방해하지 말고 떠나라!” 파푸아뉴기니 콘라도 대표의 단상 일갈에 180여개국 대표들은 우레같은 박수를 터뜨렸다. 그로부터 25분뒤 도브리안스키 미국 대표는 “우리는 발리회의의 성공을 원하며 합의에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교도의정서 탈퇴 이후 기후협약에 냉담해오던 미국이 마침내 굴복한 것이다. 미국은 지구온난화 위기를 가져오는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이면서,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온실가스 감축을 협약보단 자율이행으로 하자고 하던 종전 주장을 철회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다. 앞으로 기후협약에 대한 로드맵에 각국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관건이다. 발리회의에서 유럽연합(EU)은 선진산업국들은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 수준으로 25~40% 감소하자고 제안했다. 회원국들은 나라마다 구체적인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방법을 오는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총회에 보고해야 한다. 세계적인 기후학자들은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이대로 50년을 더 가면 북극의 빙산이 대부분 녹는다고 경고한다. 북극의 빙산이 녹으면 남극의 빙산도 무사할리 없다. 만약 양극의 빙산이 녹으면 바다에 잠기는 육지가 많아져 세계지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약 200㎞에 이르는 해안에 거대한 제방 축조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2m 정도밖에 안되어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우려하는 것이다. 빙하가 10%만 녹아도 바닷물이 덮치는 재앙을 면치못할 것으로 싱가포르 당국은 보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해수면 이변만이 아닌 사막화를 예고한다.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호주 등 지구촌 곳곳에서는 강수량이 줄어 사막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반면에 폭우나 폭설로 환경재앙을 겪는 지역이 허다하다. 2004년에 개봉된 미국영화 ‘투모로우’는 롤랜드 에어리히 감독에 데니스 퀘이드 주연의 기후영화다. 지구의 온난화 재앙을 예고한 기후학자를 비웃던 백악관이 어느날 갑자기 덮친 지구의 빙하기 현상으로 당황해 하는 내용이다. 영화가 아닌 예고된 실화일 수 있다./임양은 주필

원유 재앙

지하 유정(油井)에서 채취된 원액 그대로의 기름이 원유(原油)다. 유층(油層)의 깊이와 산지의 유전(油田)에 따라 색깔이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흑색이다. 탄화수소 등 혼합물로 유황 질소 산소 금속 등 화학구조가 다양하다. 이 때문에 분해 과정에서 나오는 물질 또한 다양하다. 휘발유 경유 중유 등은 대표적인 가연성 에너지다. 원유는 버리는 게 없다. 플라스틱 원료도 원유에서 나온다. 열에 의하여 변형된 채 원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합성수지는 각종 제품을 만들어 인간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생활주변에 플라스틱 제품이 없는 게 없다. 인류가 옷감을 발명한 1차 생활혁명 후 2차 생활혁명을 가져온 것이 종이다. 플라스틱 발명은 가히 3차 생활혁명을 일으켰다. 원유의 찌꺼기로는 아스팔트를 만든다.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연가스 또한 유전에서 내뿜는다. 원유는 태고(太古) 적 이전의 동물들 기름이다. 지구가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키면서 땅속 깊이 묻힌 동물 무더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 억년, 십 수 억년 전이다. 중국 대륙의 내륙에서 암염이 채취되는 것은 태고 적 이전엔 바다였기 때문이다. 지각 변동으로 바닷속 지층이 솟아 중국 대륙이 된 것이다. 한반도에 암염이 없는 것은 바다에 잠긴 적이 없는 육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유의 부존자원이 줄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세기 중반에 가면 거의 바닥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한다. 육지의 원유 부존자원 고갈은 바다로 눈을 돌린다. 바다 유정 탐사는 난관이 많다. 그래도 세계 여러 나라가 포기하지 않고 탐사를 지속한다. 우리 나라도 탐사는 한다. 하긴, 하는데 안타깝게도 성과가 없다. 최근 브라질이 자국의 대륙붕에서 대규모 유정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기세로 남미의 경제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원유 한 방울 안 나는 우리 나라가 기름벼락으로 큰 곤혹을 치르고 있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유조선 원유 유출로 인근 이 백리 서해 연안이 기름벼락을 뒤집어 쓴 지가 벌써 열 하루 째다. 경기만이 위협받는 지경이다. 양식어장마다 기름범벅이 되어 떼죽음 당한 현장이 처절하다. 어민들의 한숨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이 악취를 마다않고 갯바위에 눌러 붙은 기름 덩어리를 뜯어내고 개펄을 닦아내는 모습들이 숙연하다. / 임양은 주필

재미있는 TV토론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13일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여의도 KBS 스튜디오에서 열린 TV토론에 나온 17대 대선 군소 후보 4명 가운데 경제공화당 허경영 후보는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인 지 “아이큐가 430이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양아들이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유엔 사무총장직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허 후보는 “정치인과 특권층은 유토피아를 누리고 있지만 국민은 지옥에서 헤매고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경상도, 민주당이 집권하면 전라도, 이런 식으로 국민을 나누고 선거 때만 되면 싸우기 때문이다”라며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정당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자금인 국세를 낭비하고 파당을 지어 국회에서 싸우는 것을 어린이에게 보여주는 이런 정치제도는 없애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폐지하고, 국회의원을 100명으로 줄여 무보수로 하면 예산을 15조 원 절감할 수 있다”며 “(대통령이 되면) 남북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미국에 있는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신혼부부에게 각 5천만원씩, 1억원을 제공하겠다” “출산수당 3천만원 지급” “60세 이상 국민에 매월 70만원의 건국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공약도 거침없이 내놨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 정책보좌역을 하며 새마을 운동과 방송통신대를 만들고, 우리 경제를 국민소득 1만7천불이 되게 하는 데 기여한 장본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런데 허 후보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혼담이 있었다”고 주장해 지난달 박 전 대표로부터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주인연합 정근모, 새시대참사람연합 전관, 한국사회당 금민 후보도 ‘딱 한 번’ 주어진 TV 토론회에서 자신과 공약을 그럴듯하게 홍보했는데, 내용과 면면은 차치하고 살기등등했던 정동영 이명박 권영길 이인제 문국현 이회창 후보의 토론회보다는 재미있었다. 심대평 후보도 그렇지만,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왜 후보로 나왔다가 TV에 한번 못 나온 채 맥없이 사퇴했는지 원 별 싱거운 경우를 다 봤다. /임병호 논설위원

JP 출연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깨끗한 유세단’을 이끌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취약한 수도권과 호남권을 너무 열심히 돌아 목이 심하게 쉬어 병원 치료를 받았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도 ‘엄지유세단’을 이끌고 수도권과 젊은층 밀집지역을 집중 공략하고 있는 중이다. 당내 후보 경선 때 정 후보를 공략했던 유시민 의원도 영남권 지원유세와 검찰규탄 촛불집회 등에 열심히 나온다. 세 사람은 모두 소위 범여권의 차차기 대선후보로 꼽힌다. 무소속에서 입당한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은 요즘 이명박 후보의 유세에 거의 빠짐 없이 동행한다. 안동 지원유세에서 춤까지 춘 정 의원의 ‘열성’은 대선 이후 ‘당권’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많다. 정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대선 후 “행정부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당에서도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 의원이 가깝게는 내년 6월 당 대표 선거를, 그 다음엔 대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내다보는 이유다. 이명박 후보를 가장 강력하게 돕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와의 ‘대혈전’을 예고케 하는 정 의원의 행보다. 이명박 후보가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를 한나라당 명예고문으로 영입한 건 의외의 ‘횡재’다. JP는 지금 아예 충청권에서 지낸다. JP는 이명박 지원 유세에서 “정계에서 물러났던 팔순늙은이가 다시 선거판에 뛰어든 것은 너도 나도 대통령되겠다고 설쳐대는 정치현실을 눈뜨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JP는 “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뒤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던 사람이 뒤늦게 ‘나 아니면 안 된다’며 올바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며 “BBK 수사발표와 관련해서도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 어마어마한 공직을 역임한 장본인이 국가기관을 무시하고 국민혼란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일갈했다. JP는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모신 뒤 다시 야인으로 돌아갈 것”이란 말도 했다. “43년의 정치역정을 통해 사람 보는 눈이 생겼는 데 그 눈으로 여러 후보들을 훑어보니 국가경영을 위한 소양과 식견,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은 이명박 후보밖에 없더라”라고 치켜세웠으니 이 후보가 얼마나 좋아하고 있겠는가. 야인으로 돌아갈지 ‘최초의 10선 국회의원’을 꿈꾸는진 몰라도 언행이 역시 JP답다. /임병호 논설위원

哭! 박건호 시인

“시 전문지가 배달되어 오는 날이면 절망한다. 말을 모르고 외국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거기에 실린 시들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시를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어떤 것은 그 난해성 때문에 쉽게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소위 잘 나가는 시인과 평론가들로 가득한 시 전문지에 실려 있는 어 시들로 인해 나는 시의 문맹자가 되어 버린다. (중략) 시는 나의 구원이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로 인해 나는 가끔씩 졸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내 정신적 구원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않았던 갈증으로 점점 목이 탔다. 앞으로 그 갈증이 다소나마 해소될지 더욱 목이 탈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를 쓰는 것은 나의 숙명이고 마지막 한 편은 미완성인채 남겨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글씨 끝에 나의 펜이 멈춰져 있을테니 말이다.” 올해 초 발간된 박건호 시인의 세 번째 에세이집 ‘나는 허수아비’에 실린 ‘시의 문맹자’ 가운데 처음과 끝 부분이다. 난해하게 흘러가는 한국 현대시, 난해해야 좋은 시로 착각되는 한국시의 사조(思潮)를 비판한 글이다. 박건호 시인은 20세 때인 1969년 미당 서정주 선생의 서문이 실린 첫시집 ‘영원의 디딤돌’로 문단에 나섰다. 이후에도 ‘타다가 남은 것들’ ‘물의 언어로 쓴 불의 시’ ‘나비전설’ ‘모닥불 이후’ ‘유리 상자 안의 신화’ ‘딸랑딸랑 나귀의 방울소리 위에’ ‘그리운 것은 오래 전에 떠났다’ 등 시집을 출간했다. 1972년 ‘모닥불’을 발표하면서 작사가의 길을 걸어온 박건호 시인이 지은 노랫말은 3천곡이 넘는다. ‘내 곁에 있어주’ ‘잊혀진 계절’ ‘아! 대한민국’ ‘오직 하나뿐인 그대’ ’슬픈 인연’ ‘단발머리’ ‘모나리자’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토요일은 밤이 좋아’ ‘빈 의자’ 등 국민애창곡이 박건호 시인의 작품이다. 1989년 수족 마비와 언어장애를 부른 갑작스러운 뇌졸중을 앓았으며 신장과 심장 수술도 했으나 그야말로 주옥같은 시와 노랫말을 짓는 열정을 잃지 않았다. 1949년 원주에서 태어난 박건호 시인이 9일 오후 10시 30분 향년 58세로 별세했다. 그리고 12일 이승을 떠났다. 친구의 명복을 빈다. /임병호 논설위원

현대판 냉소주의

시니컬(cynical)의 어원은 ‘개’란 뜻의 라틴어 ‘cyon’이다. 희랍어의 개는 ‘kyon’이다. 냉소주의인 시니시즘(Cynicism), 이의 학파를 견유주의(犬儒主義)라고 하는 퀴닉(kynic)학파란 말이 이에 유래한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본 견유학파는 세속적 욕심을 버렸다. 생긴대로, 있는대로, 처한대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았다. 디오게네스(BC 400~323)는 대표적인 견유학파다. 알렉산더 대왕이 통집에 기거하는 그를 찾아 ‘소원이 뭣이냐’고 물으니까 ‘햇볕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 달라’고만 했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다. 동양에는 중국 진(晉)나라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있었다. 노자(老子)의 허무적 도가(道家)를 숭상, 대나무숲에 모여 명리를 떠난 청담을 일삼았던 왕융 등 일곱명의 선비를 일컫는다. 조선 왕조에선 죽림파가 있었다. 속세를 멀리한 채 초야에 묻혀 평생을 유유자적하게 지낸 선비들이다. 동대문밖 죽림에서 고담준론의 청담만 나눠 청담파라고도 불린다. 남효온·홍유손·이정은·이총·유선언·조자지·한경기 등이다. 백이 숙제는 고대 중국 은(殷)나라 주왕이 애첩 달기에 빠져 주색과 폭정을 일삼긴 했으나, 은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이 신하로서 역성반역을 한 것에 분개,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산서성 수양산에 은거했다. 무왕의 수차 부름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자, 산에서 나오게 하기위해 불을 질렀으나 끝내 나오지않고 불에 타 죽었다. 백이 숙제는 반역으로 임금이 된 무왕의 것은 먹지않는다며 수양산에 나는 나물만 먹고 살았다. 그러나 후대에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백이 숙제의 절개는 참으로 고고하지만 안타깝도다. 수양산 땅도 무왕의 것이어늘 수양산 나물이라고 어찌 무왕의 것이 아니랴’라고 했다. 난세다. 사회가 어지럽다 보니 현실도피의 심리들이 적잖다. 그저 내 한 몸, 내 가족만 잘 건사하면, 죽이 끓든 밥이 끓든 그만이라고 여기는 현대판 냉소주의가 팽창해간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도 알렉산더의 지배를 못 면하고, 백이 숙제도 무왕의 치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설픈 청담파 노릇을 하다가는 외톨이가 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세태다. /임양은 주필

삼인성호(三人成虎)

전국시대다. 위나라 방총이 혜왕의 아들 태자가 조나라 수도 한단으로 볼모로 가는데 따라가게 됐다. 방총은 자신이 조정에 없는 사이에 다른 신하들이 혜왕에게 참소할 것이 걱정되어 왕을 찾아가 독대를 했다. “임금님께선 만일 한 사람이 시장 바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니 믿지요” “그럼, 두 사람이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한 번쯤 의심은 해보겠지요”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믿게 되겠지요” 전국책(戰國策)에 전하는 ‘삼인성호’(三人成虎) 고사다. 방총은 이어 “시장 바닥에 호랑이가 나타날리 만무하지만 여러 사람이 우기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처럼 됩니다. 소신이 시장 바닥도 아닌 타국에 멀리 가 있으면 참소하는 소인배가 세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오니 이 점을 통찰해 주소서”하고 주청하자 혜왕은 “잘 알았으니 걱정말고 다녀오시오”했다. 그러나 태자의 볼모가 풀려 귀국했을 때 혜왕은 여러 사람들이 그동안 주청한 참소만 믿고 방총의 배알조차 허락지 않았다. 죽음을 면한 것만도 볼모로 떠나기 전에 방총이 받은 혜왕의 다짐 덕분이었다. 한나라 중엽 왕부란 사람이 쓴 잠부론(潛夫論)에 ‘일견폐형’(一見吠形)이면 ‘백견폐성’(百犬吠聲)이란 말이 있다.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다른 백 마리의 개가 속내도 모르고 따라 짖는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일인전허’(一人傳虛)면 ‘만인전실’(萬人傳實)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허언이 만 사람에겐 사실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심하는 얘기로 진서(晉書)에 ‘배중사영’(杯中蛇影)의 고사가 있다. 진나라의 악광이라는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잔에 뱀의 영상이 비치곤하여 몹시 언짢았다. 집에 돌아가서는 음식을 토한 끝에 급기야는 자리에 눕게 됐다. 악광의 친구가 병문안하여 연유를 묻자 악광은 술잔에 비친 뱀 그림 얘기를 겪은대로 얘기했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옷칠로 된 활을 벽에 걸어 놨두었는 데 활에 그려진 뱀의 그림이 밤에 켜놓은 촛불로 술잔에 비쳤던 것 같다고 말하자 악광은 그만 자릴 털고 일어났다. 세상사엔 남을 믿을수도 안 믿을수도, 남을 의심할 수도 안 할수도 없는 일들이 많다. /임양은 주필

망년회

옛 중국의 제나라 위왕을 섬긴 순우곤은 키카 오척단구다. 몸집은 왜소했으나 담대하고 언변에 익살이 풍성했다. 위왕이 위에 오른지 3년이 되도록 정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허송세월하는데도 간언하는 신하가 없었다. 보다못한 순우곤이 나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선 나라에서 가장 큰 새가 궁정뜰에 날아와 3년이나 머물며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위왕은 한참 있다가 결연한 자세로 가다듬어 대답했다. “그 새가 날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일단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며, 울지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일단 울었다하면 뭇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신하에 그 임금이었다. 크게 깨달은 위왕은 제도를 정비하고 문물을 일으켰다.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땐 순우곤이 조나라를 찾아가 10만 원군을 데려오는 수완을 보여 이를 본 초군이 그만 물러갔다. 어느 날 연회에서 위왕이 순우곤에게 “경의 주량은 어느 정도인가?”하고 물었다. 호주가라고 소문난 그가 연회 자리에선 별로 마시지 않아 궁금했던 것이다. 순우곤의 대답은 이랬다. “높은 분들 앞에서 마시면 한되 술에도 취하고, 친구들하고 마시면 한말 술에 취하나, 저녁 때 정인하고 마시면 한섬 술은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고사는 ‘사기’(史記) 골계열전에 전한다. 순우곤의 그같은 주량은 술마시는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다. 술꾼이라면 능히 이해가 가고 또 사실이 그러하다. 술 좌석의 분위기에 따라 술이 먹히고 안 먹히곤 하는 것은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술 좌석은 술만이 아니고 기분을 마시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술은 기분좋게 마신 것 하고, 할 수 없이 마신 것 하고 다른 게 바로 몸의 컨디션에서 나타난다. 술 자리가 잦은 연말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이렇게 저렇게 서로 갖는 망년회가 많고 또 으례 술을 마시기 마련이다. 기분좋은 술자리가 돼야 하는 것은 술을 많이 마시기 위함보다는 몸의 건강을 위해서다. 술도 소중한 음식이다. 허물없는 사이일지라도 기본적 예의를 지키고, 덕담을 많이 나누는 음주문화의 건전화가 좋은 모임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 해의 괴로움을 잊기로하는 좌석에서 새로운 괴로움이 생겨서는 망년회의 본 뜻이 아닌 것이다./임양은 주필

정년 연장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는 ‘2020년 70세 정년’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배일도 한나라당 의원은 정년을 국민연금 수급연령과 연동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정부도 오는 2010년부터 정년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상공회의소는 정년 연장 반대 입장을 발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일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인기영합적 행위”로 규정했다. 경총은 정부와 정치권의 정년 연장 정책을 ‘포퓰리즘’이라거나 ‘노동시장을 초토화시킬 것’이란 표현을 써가며 비판을 가했다.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로 기업들이 장기 고용을 기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년을 늘리면 기업에 막대한 비용 부담을 줄 뿐 아니라 고용 의지마저 꺾게 된다는 것이 경제단체들이 내세우는 반대 이유다. 정년 연장에 따른 기업의 막대한 비용부담은 신규채용 억제로 이어질 것이며 비정규직을 양산시키고 청년실업자를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선 저출산·고령화 추세에 대응해 정년 연장은 불가피하다고 뜻을 굽히지 않는다. 기업들은 정년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선진국에선 이미 법률로 정한 정년을 다시 연장하는 추세다.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다. 전후 베이비붐 때 태어난 ‘단카이세대’의 퇴직과 신규 노동력 감소 등이 겹친 일본은 2013년까지 현행 60세 정년을 65세로 늘릴 방침이다. 영국은 2010년부터 65세에서 68세로, 독일도 65세에서 67세로 정년을 연장할 계획이다. 미국은 2027년까지 정년을 67세로 올리기로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현행 ‘고령자고용촉진법령’에 사업주가 정년을 정한 경우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권고 조항이 있을 뿐이다. 지난해 국내 기업의 평균 정년은 56.9세였다. 2003년 이후 조기 퇴직·고령화 대책의 하나로 일정 연령 이후 임금은 단계적으로 삭감하되 정년까지 근무하게 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문제는 이것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의 만 60세 남녀는 ‘환갑 잔치’도 하지 않을 만큼 젊다. 나이 들어서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한 형편이라면 혹 모르거니와 세계적인 흐름인 정년 연장을 반대만 하는 건 능사도, 도리도 아니다. / 임병호 논설위원

남녀의 사랑

해방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39세의 ‘여간첩 김수임’은 6·25 전쟁 발발 9일 앞둔 1950년 6월 16일 다섯 발의 총탄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낸 이강국을 사랑했고, 미8군 사령부 헌병감이었던 군정의 실세 베어드 대령과 동거했던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에게서 빼낸 고급 군사정보를 이강국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판 마타하리 김수임’에 관한 역사는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억울한 죽음’ 쪽으로 수정되고 있다. 특히 군사재판 시작 사흘 만에 내려진 사형 판결, 김수임의 간첩 행위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베어드 대령에 대한 무혐의 처분 등이 이데올로기의 시대, 분단의 시대를 위태롭게 살았던 그녀를 재조명하게 되는 실마리가 된다. 얼굴이 희고 훤칠했던 경성제국대학 출신 이강국과 이화여전을 졸업한 신여성, 김수임. 그녀의 죄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으며 기꺼이 그 책임을 지겠다”며 그녀가 목숨 던져 사랑했던 이강국도 5년 뒤 북한 땅에서 박헌영과 함께 간첩죄로 처형됐다. 재미교포 출신의 여성 군수물자 로비스트인 ‘린다 김’은 1996년 당시 이양호 국방장관이 보낸 세 통의 핑크빛 연서를 받았다. 김씨의 경우 사건의 본질보다 미모의 로비스트와 국방장관,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인해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 김씨가 군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인 ‘백두사업’ 팀장에게 제공했던 뇌물이 1천만원에 불과한 것만 봐도 그렇다. “로비스트는 현재에 사는 법. 나는 과거는 말 할 수 있지만 현재는 말하지 않는다”는 김씨가 “(신정아가) 제 2의 린다 김이라니, 신정아 사건과 내 사건이 어떻게 같으냐”고 항변했었다. 학력으로 사람과 능력을 평가하는 시대적 부조리가 만연하는 사회에서 ‘예일대 박사 출신 명문 미술관 큐레이터’로, 대학 교수로 화려하게 활동했던 신정아씨가 며칠 전 재판을 받았다. 위조한 학력으로 문화권력을 만끽한 그녀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연인 관계가 맞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다 “변양균 실장 정도가 배후면 수도 없이 많다”고 했던 신정아씨가 말한 사랑의 실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여간 남녀의 사랑은 복잡다난하다. / 임병호 논설위원

‘쌈짓돈’ 위력

급여통장과 보통예금통장 등에 들어 있는 서민들의 ‘잔돈’ ‘쌈지돈’을 홀대하던 은행들이 이 돈이 은행에서 증권사로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급여통장과 보통예금통장은 이자율이 낮아 은행권에선 ‘저원가성 예금’이라고 부른다. 저원가성 예금의 이탈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은행에 곤혹스러운 일이다. 하나는 저원가성 예금의 특성에서 나온다. 정기예금은 금리와 수익률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정기예금이 지금은 주식시장으로 많이 빠져 나갔지만, 증시가 침체하거나 은행이 금리를 많이 주면 은행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월급통장을 옮기려면 각종 공과금과 대출금 자동이체를 다시 해야하는 등 따라붙는 일들이 많아, 한번 빠져나간 월급통장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국민은행의 경우 저원가성 예금이 10월 말 현재 36조 1천822억원으로 지난해 10월 말에 견줘 2천500억원 정도 빠졌다. 지난해 연말 들어온 토지보상금 2조원 가량을 빼면 2조~3조원 가까이 줄어든 셈이다. 또 다른 이유는 저원가성 예금이 최근 수익성 악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은행에 든든한 기반이 돼 왔다는 점이다. 우리은행의 경우 올 1~10월 정기예금 이자는 평균 4.8%였지만 월급통장 이자는 0.14%에 그쳤다. 이렇게 모인 자금을 가지고 6% 정도의 이자를 받으면서 대출을 해 이윤을 남겼다. 저원가성 예금이 가져다주는 마진이 정기예금의 30배가 넘는 셈이다. 회사원들이 월급통장에 있던 돈을 모두 빼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옮기는 이유는 “은행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회사원들의 월급통장이나 보통예금통장에서 인출돼 모인 증권사의 CMA 잔액이 지난달 23일 현재 26조원에 이른다. 1년 전인 지난해 11월 말의 8조원과 견줘 3배가 넘는다. 같은 기간 계좌 수도 145만개에서 455만개로 3배 이상 늘었다. 이런 현상은 돈이 예금상품에서 투자상품으로 이동하는 이른바 ‘머니 무브’(자금 대이동)에서 비롯됐지만 은행들의 ‘부자 마케팅’에 대한 반작용도 한 원인이다. ‘평범한 다수’가 ‘잘난 소수’보다 낫다는 이론이 성립된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은행은 ‘큰돈’ ‘몫돈’ 예치도 중요하지만 서민들의 ‘쌈짓돈’ ‘푼돈’도 소중히, 정중히 대접해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선거판의 유령

‘유령이 떠돈다. 악마의 붉은 유령이…’ 공산당선언의 모두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상적사회주의에 대칭되는 이른바 과학적사회주의 입장을 요약한 공산주의 동맹강령으로 발표한 것이나, 이 또한 공상적사회주의로 끝나 결국 붕괴됐다. ‘악마의 유령’을 인용하는 것은 여기서 이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중반에 들어서면서 악마의 천민자본 유령이 떠돌아 선거판을 더럽히고 있다. 떼거리 산악회 등산, 관광나들이에 멋 모르고 휩쓸리다가 경찰 같은데 불려가 조사를 받는 사람이 요즘 부쩍 늘고 있다. ‘놀러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무조건 사람을 데려오라고 해서 그냥 데려갔다’는 것 등이 선거관련 선심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진술이다. 이런 사람들이야 공짜 좋아한 죄밖에 없지만, 정작 이들을 유인한 배후, 또 배후의 배후 등은 마치 간첩망 조직같아 장막에 가려진 것으로 전한다. 비단 이 당만이 아니다. 저 당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후보, △후보, X후보 등 계열도 마찬가지인듯 싶다. 수법도 가지가지다. 무조건 사람들 데리고 어디로 밥먹으러 가라고 해서 가면 계산은 유령이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름만 올려놓으면 돈을 준다고 하고, 실제로 돈을 주는 사례도 없지 않은 모양이다. 궁금한 것은 그같은 돈줄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선거 브로커들의 발호다. 선거꾼들 조직에서 내려오는 돈줄이 중간 중간에 한 무더기씩 잘려나가고도 낚시 밑밥처럼 그렇게 뿌려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보들 간의 치졸한 음해성 공방으로 추하긴 해도 돈선거는 조용한가 싶더니, 이도 아닌 게 날이 갈수록 더 뒷돈놀음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이다. 뭣보다 유권자가 각성해야 한다. 산에 가잔다고 산에 가고, 관광 가잔다고 관광가고, 밥 먹잔다고 밥먹고, 돈 준다고 덥석 받다가는 후회막급한 일이 생긴다. 그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만한 민도의 자긍심을 가질 때가 됐다. 선거사범 신고는 로또에 버금가는 포상금제가 있다. 선거판을 혼탁케하는 미로의 유령들 장막을 어떻게든 발본색원해내야 한다. /임양은 주필

플래카드

개신교를 이룩한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면죄부 판매 등 여러가지로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촉구, 비덴베르크교회 대문에 내붙인 ‘95개조의 고백’이 플래카드(Placard)의 효시로 꼽힌다. 프랑스 말로 벽에 맨 선반의 뜻이던 플래카드가 구호 등을 외치는 현수막 등 선전물로 바뀐 것은 ‘95개조의 고백’이 있은지 17년뒤 파리 왕궁에서 발생한 이변으로 시작됐다. 그러니까 1534년 10월17일 밤 파리 시가지는 물론이고 프랑수아 1세의 침실 출입문에까지 당시의 교회 타락상을 비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선전물이 나붙은 소동이 일어나 이를 ‘플래카드 사건’으로 부른 데서 유래된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 황제 칼 5세에 대항한 이탈리아와의 전쟁속에서도 내치에 힘써 후세에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린 사람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가 ‘플래카드 사건’을 계기로 반종교개혁의 입장을 취했다. 이것이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일어난 격렬한 종교전쟁의 발단이 되긴 했으나, 오늘날 프랑스가 가톨릭 교도가 많은 나라가 된 게 프랑수아 1세의 그같은 단안에서 비롯됐고 ‘플래카드 사건’이 발단이 된 것이다. 왕권시대의 산물인 플래카드가 민주주의시대에 넘쳐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만 다른 것은 왕권시대에는 은밀한 배후수단이었던 것에 비해 민권시대에서는 당당한 발표수단으로 전환된 사실이다. 집회의 자유가 있고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는 다원화사회다. 절대적 지배의 독재주의는 단원화사회로 지배자 1인에 귀속된 목소리 뿐인데 비해, 다원화사회는 상충되는 여러가지 목소리가 나온다. 이래서 서울시청앞 광장이나 여의도광장 등에선 각종 집회가 열릴 때마다, 또 가두시위를 벌일 때마다 갖가지 구호가 적힌 형형색색의 플래카드가 넘실거리곤 한다. 제17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플래카드가 전국의 방방곡곡에 나붙어 눈길을 끈다. 선관위에서 붙이는 대통령 후보군 사진 벽보도 일종의 플래카드다. 후보가 12명이나 되어 플래카드가 참 길기도 하다. 각 후보 진영에서 내거는 여러가지 내용의 현수막 역시 플래카드다. 대통령 선거 플래카드를 훼손하면 법에 의해 징역 4년 이하 또는 벌금 400만원 이하에 처하도록 돼 있다. 법이 아니더라도, 보기싫은 사람이 있거나 다 보기싫거나 간에 그냥 두고 보는 것이 민주시민의 소양이라 할 것이다. /임양은 주필

시계 공방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스탈린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알력이 극심했다. “트로츠키 동지, 당신은 훌륭한 두뇌를 가졌지만 그게 바보의 몸위에 놓여있군요!” 한날 정치국원 회의서 격론 끝에 스탈린 지지파 루즈타크가 반대파인 트로츠키를 비아냥거린 말이다. 그러자 트로츠키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의 말씨가 당신의 능력보다 낫구려!” 정치국의 알력은 피의 숙청을 가져왔을 만큼 살벌했었다. 요즘 대선 싸움의 말씨가 피의 숙청을 이룬 소련 공산당 정치국 싸움 말씨보다 졸렬하다. 일일이 예를 들 것도 없다. 공격해도 기지와 해학이 있어야 품격이 있다. 그런데 대선판은 욕지거리다 못해 음해성으로 간다. 미국 하원의 공화당 다선 의원이 시골에서 수의사를 하다가 당선되어온 민주당 초선의원에게 물었다. “전직이 수의사라지요?” “예! 그렇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가 있습니까?” 초선의원의 대답이다. 딴은 골탕 먹인다고 말한 것이 되레 자신이 동물로 비유되는 골탕을 먹은 것이다. 명품시계 시비는 재치도 익살도 없는 음해성 공방의 하나다. 시계를 말하자니까 생각되는 것은 지금은 흔한 게 시계지만 예전엔 귀중품이던 때가 있었다. 그 가운데 회중시계는 양복 조끼에 넣어두는 몸시계로 조끼 단추구멍에 고리를 낀 시계줄만 보고도 신사중 신사로 쳤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의 일화가 있다. 어느날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과 있다가 심야회의에 지각하게 됐다. 그러자 지각한 5분을 미리 분침으로 되돌린 회중시계를 참모들에게 보여주고는 바닥에 내던져 깨버렸다. 단 5분이지만 시간을 어긴 체면을 그렇게 살린 것이다. 명품시계의 발단은 김현미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부인이 찬 시계가 프랭크 뮬러로 1천500만원짜리 고가품이라고 공식 발표한데서 비롯됐다. 이에 이 후보 부인은 7만원짜리 국산 로만손 시계라며 김 대변인에게 1억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및 위자료청구소송을 며칠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이 후보 부인은 천만원짜리 핸드백을 들고 다녔던 게 도덕성 시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이 후보는 사실을 시인하며 사위들이 선물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산 시계가 스위스 명품과 비슷하여 명품 핸드백에 이어 명품시계 공세를 또 벌인 착각을 했는 지 모르지만 공방이 치졸하다. 시계가 흔한 가운데도 천오백만원짜리 시계가 있다니 놀랍다./ 임양은 주필

폴리테이너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많은 연예인들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폴리테이너로 나서왔다. ‘폴리테이너(politainer)’란 정치인(politician)과 연예인(entertainer)의 합성어다. 연예인 출신 정치인이나 정계에 직접 진출하지 않더라도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연예인을 뜻한다. 1999년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슐츠가 처음 사용했다. 한국에선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활약한 문성근, 명계남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노 후보를 지지했던 명계남씨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연예인은 의식 있는 딴따라” “노 후보를 지지하는 연예인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연예인과는 종자가 다르다”는 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연예인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가장 큰 이유는 유명세가 ‘먹히기’ 때문이다. 얼굴이 잘 알려진 연예인들을 각종 행사에 동행하면 자연스럽게 유권자의 시선을 끌 수 있고, 후보의 이미지까지 친숙하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명예욕도 작용한다. 정치판에 줄선다는 건 권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영향력 때문이다.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지성인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고, 인맥을 넓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선거 이후다. 지지하는 후보의 당락에 따라 폴리테이너의 명암도 갈린다. 정몽준 후보를 지지했던 가수 김흥국씨,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뽀빠이 이상용씨는 숱한 고생을 겪었다. 이 후보를 따라 다녔던 트로트 가수들도 다 출연줄이 끊기는 피해를 봤다.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장관도 되고 방송에도 잘 나갔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상도 다 휩쓸었다. 이번 17대 대선 이명박 후보 캠프엔 80여명의 연예인들이 몰렸다. 그들 가운데 탤런트 백일섭씨가 ‘이회창 출마규탄 대회 및 필승결의 대회’에 참석, “이회창씨 하는 짓거리는 뒈지게 두드려 맞아야 할 짓거리”라며 “(이 후보는) 밤거리를 다니지 말아야 한다. 뒈지게 맞기 전에…”라고 했었다. 그러고도 백씨는 언론과의 통화에서 별뜻 없이 웃자고 한 말인데 문제가 커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저질 폴리테이너가 따로 없다. 이회창씨는 이래 저래 욕을 먹는다. /임병호 논설위원

外高의 허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고등학교 입학을 명문대 진학의 ‘보험’쯤 되는 것으로 알지만 현실은 모두 그렇지 않다. 외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외고 가면 못해도 연·고대는 간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는 것은 이 땅의 고교생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외고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외고에 들어가기보다 몇배나 더 치열하다. 늘어나는 사교육비 등 경제적 부담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개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석차’를 놓고 충격을 경험한다. 중학교 때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는데, 외고 가서 첫 시험을 본 후 적이 놀란다. 성적에 자신감을 잃으면 학생들은 혼란을 겪는다. 학생들이 자퇴나 전학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이유다. 외고에 다니는 학생들의 긴장감은 상상 이상이다. 시험 때는 밥도 안 먹고 공부하는가 하면 보약 먹는 학생들이 많다. 시험 때가 되면 기숙사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학교 분위기 자체가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학원’으로 바뀐다. 흔히 학부모들은 외고만 들어가면 ‘끝’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적 부담, 치열한 경쟁 등을 감당할 수 없다면, 오히려 학생에게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 좋은 점도 많다. 외고에 입학한 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맞닥뜨리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외고가 주는 만족감은 넓게 존재한다. 우선 동기나 선배들 사이에 생기는 ‘결속력’은 ‘자부심’의 토대가 된다. 신문 한 페이지를 보고 세 시간 동안 토론하는 게 아무 데서나 가능한 면학 분위기는 아니다. “중학교 때는 모르는 게 있어 질문하면 선생님들이 귀찮아서 피하고 대답을 안해 주는 게 다반사였는데 외고 선생님들은 다음 시간에 조사를 해서라도 가르쳐 주신다”고 자랑한다. 치열한 경쟁에 적응하면서 끊임 없이 발전한다. ‘경쟁’의 순기능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보다 경쟁이 심할텐데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학생들이 많다. 사회 진출 전에 ‘예방접종’ 맞는 셈치고 갖은 스트레스를 이겨낸다는 말이다. 교사들도 “학생들이 처음에는 성적 때문에 비관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격려한다. 시험지 사전 유출로 마음 고생이 심한 김포외고 합격생들이 생각난다. /임병호 논설위원

탈레반의 득세

2001년 11월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고 한다. 6년전 권좌에서 쫓겨났던 탈레반은 국경 너머 파키스탄의 케타 등까지 도망쳐 근거지를 형성하고 다시 힘을 길렀다. 탈레반 세력 확장의 가장 큰 요인은 아프간 사회에 만연한 빈곤과 실업이다. 친서방 정부 출범 뒤에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탈레반에 기대게 된 것이다. 아편 생산을 통제하지 않는 탈레반은 그 판매 대금을 안정적인 재원으로 삼고 있다. 최근 정국 혼란을 겪고 있는 이웃 파키스탄은 물품 공급의 통로다.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체첸, 중국 신장성 등에서 국제 이슬람주의의 ‘성전(지하드)’을 부르짖으며 참전하는 ‘외국계 탈레반’도 늘었다. 1970~80년대 옛 소련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권 각국에서 전사(무자헤딘)들이 아프간에 몰려들었던 것을 재현한 듯한 풍경이다. 반면, 탈레반이 물러간 아프간에서 평화유지와 국토재건을 이룩하겠다며 들어온 나토(NATO) 중심의 국제안보지원군(ISAF)은 제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연합군은 애초부터 카불 주변 지역의 안정을 목표로, 제한적인 지역에서만 작전을 진행했다. 4만 명에 이르는 현재 지상군의 병력 규모론 ‘해방’시킨 지역을 방어할 능력조차 없다. 점령지에서도 탈레반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고 무장 충돌이 잦다. 다국적 민간 연구소 ‘센리스 카운술’이 낸 최근 보고서 ‘혼돈 속으로, 벼랑끝의 아프간’에서 아프간의 54% 가량을 탈레반이 영구적인 거점으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과거엔 넘보지 못했던 지역까지 장악했다는 탈레반은 아프간 동부·남부, 파키스탄 국경 산악 지대의 주요 거점을 포함한 많은 지역에서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어, 신병 모집과 훈련에도 장애가 없는 상황이다. 현재 탈레반과 정부군·연합군 사이의 전선은 수도 카불 쪽으로 점점 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탈레반이 공언해온 대로, 이들이 2008년 카불 입성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NATO군의 병력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는 이유다. 파병이 연장된 한국군이 점점 위험해지는 아프간의 사태가 걱정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실루엣

실루엣(silhouette)은 프랑스 말이다. 윤곽 안이 검은 측면화상, 검은 반면(半面)영상을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사람 이름이다. 고유명사가 보통명사화 한 것이다. 프랑스의 재정가 실루엣(1709~1767)이 재무상이 된 것은 1759년으로 루이 15세 치세다. 당시 7년전쟁으로 극도의 재정위기에 처했던 터라 국고를 늘리는 것이 시급했다. 수입 증대 방안으로 세금 중과를 위한 세제개혁을 서둘렀으나 그 무렵 이의 승인권을 가진 대법원이 번번이 불허했다. 그러자 마침내 귀족, 승려 사원 등의 면세특권을 폐지하고 시민에게도 각종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세제를 독자적으로 강행했다. 이 바람에 ‘인간이 숨쉬는 공기에 대해서까지 공기세를 물릴 것’이라는 평판이 나돌았다. 지출면에도 극도로 절약해 왕실의 내탕금을 줄인 것은 좋았으나 시민들에게 과도한 절약생활을 강요했다. 예컨대 초상화를 그리는데 많은 돈을 들여 전면을 다 그리기보다는 값싸게 얼굴의 특징을 옆얼굴로 나타내는 그림자그림, 흑색반측면상으로 그리도록 하는 법규를 정했다. 사진술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이다. 사진 기술의 원리가 발명된 건 비슷한 시기인 1723년이었으나, 실용화로 보급된 것은 100년도 더 지난 1839년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명사화한 실루엣이란 말이 복식분야에서도 쓰이는 점이다. 옷의 라인, 스타일, 루크와 함께 유행형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된다. 옷의 무드나 세부에 관계없이 전체적인 외형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스포츠의 사격에선 실루엣경기에 쓰이는 높이 160㎝ 폭 45㎝의 전신입상 흑색판 표적을 ‘실루엣 표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루엣은 결국 귀족과 시민사회의 반발로 얼마 뒤에 실각, 그가 강조했던 그림자그림처럼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막강한 권좌에서 물러난 그를 가리켜 프랑스 계몽기의 문학가 볼테르는 “독수리가 변하여 볼품없는 거위가 됐다”고 말했다. 권좌에서 물러나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걸 두고 ‘실루엣그림자’란 말이 또 나온 게 이에 연유한다. 여러가지 뜻을 나타내는 실루엣 말 가운데 특히 생각되는 것이 ‘실루엣 그림자’다. 노무현 정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 끝까지 대못질에 혈안이었던 사람들이 불과 서너달 뒤 권좌에서 물러난 뒷모습이 어떨지 두고 보고싶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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