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쭉날쭉 판결

특정 종교 교리인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의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 여부의 법원 판단이 들쭉날쭉하고 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6단독 무죄, 춘천지법 형사단독 유죄, 전주지법 형사5단독 유죄, 수원지법 성남지원 영장담당판사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 재신청 기각, 수원지법 영장담당판사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 있다며 영장 발부,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3단독 유죄판결 등이다. 약 2주동안에 법원의 판단이 엇갈린 이런 시리즈가 이어졌다. 교리가 내세운 객관화 될 수 없는 양심의 자유가 객관화된 헌법과 법률에 우선할 수 없다고 믿어 병역법상 유죄로 봐야 한다는 것이 본란의 개인적 소견이다. 법원의 판단이라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판사의 판단이다. 또 들쭉날쭉하는 판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1심 판결이 기계로 찍어내듯이 똑같은 것도 문제가 없지않다 할 수 있다. 판사가 재판에 임해 심증을 형성하는 직능은 그의 자유다. 담당판사가 사건을 어떤 각도로 보는 것을 더 중시하는가가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 이래서 ‘판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도 있다. 특히 성전환 수술에 의한 호적정정신청같은 것은 판사의 심증형성이 크게 좌우된다. 물론 사건마다 살펴야 할 구체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사안에 판사 개개인의 판단이 다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법원은 하급심의 들쭉날쭉한 판결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상고심이 걸린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빨리 선고해 보일 것이라고 한다. 헌법재판소에 걸린 헌법소원 결정도 시급성이 요구된다. 사회통념이란 게 있다. 특정 종교 교리가 실정법보다 우위로 볼 수 없는 것이 사회통념이라고 하면 이에 합당한 결론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져 본다./임양은 주필

17대 국회 개원

제17대 국회가 지난 5일 제247차 국회(임시회) 1차 본회의를 갖고 열린우리당 김원기 의원을 전반기 의장으로 뽑았다. 이어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을 하는 가운데 개원식을 갖는다. 새 국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의장과 상임위 배정을 놓고 각 당마다 이해득실이 첨예해 상생의 정치는 말잔치 뿐이라는 정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무릇 무슨 자리든 자리엔 책임이 따른다. 이런데도 책임감 보다는 권능감이 앞서 자리다툼을 하고 그것도 좋은 자리 챙기기에 혈안이 되곤 한 것이 전통적 국내 정치 풍토다. 새 국회 출범을 맞아 특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발 싸움질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말라는 것이 국민적 바람이다. 정당은 궁극적으로 정권 장악이 목표다. 정권을 가운데 두고 아주 싸우지 말라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멱살잡이 하고 집어 던지고 욕지거리를 일삼는 파행은 국민들이 보기에 이젠 넌더리가 난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정책대결 같은 것으로 좀 근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싶어 한다. 새 국회의 특성은 299명의 의원 가운데 63%가 초선인 점이다. 새 인물로 물갈이를 많이 했다며 참신한 국회 모습을 기대하는 시각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새 인물은 그때마다 많았다. 새 국회의 또 새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참신한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성급하다. 문제는 정치권의 정치토양을 바꾸는 데 있다. 아무리 새 인물일 지라도 정치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내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만다. 정치토양의 변화는 돈 안드는 선거를 정착시켜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 돼야 하고 경직된 계보정치의 시급한 타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인을 위한 소모성 정치행위는 철저히 지양되어야 한다. 민생을 위한 생산성 정치행위로 전환돼야 한다. 물론 새국회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나 앞으로 크게 지켜보고자 한다./임양은 주필

귀신고래

‘귀신고래’는 포경선이 추적하면 수중에서 귀신같이 진행방향을 바꾼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는 미국 탐험가이자 고래 연구가인 로이 챔프맨 앤드루가 1912년 울산에서 조사하며 이름 붙였다. 그는 1914년 논문을 통해 한국계 귀신고래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귀신고래는 오호츠크해와 한반도 해안을 회유하는 한국계, 북극해와 멕시코를 오가는 캘리포니아계로 나뉜다. 캘리포니아계는 20세기 초반 수천마리까지 줄었다가 적극적인 보호로 2만여 마리로 불어났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동해 북부와 오호츠크해의 수심 얕은 연안에서 번식을 하다 늦가을 남쪽으로 이동한다. 11~12월 울산 앞바다를 지나 남해, 서해 및 동쪽 중국해에서 번식하고 다시 3~5월 울산 앞바다를 회유하며 북상한다. 몸 전체가 회색이며 최대 길이는 약 16m, 몸무게는 45t, 임신기간은 13.5개월이다. 출생 직후의 길이는 4.5~5m, 2~3년에 1회 출산하고 수유기간은 7개월이다. 최대 수명은 70세 정도다. 한국계 귀신고래와 우리 민족의 친밀성은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3마리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또 ‘연오랑 세오녀’등 각종 설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등 수천년동안 연관을 맺어왔다. 그러나 한국계 귀신고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외국의 포경에 의해 남획되며 멸종위기에 까지 이르렀다. 1974년 멸종된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지만 한국·미국·러시아 등이 벌이고 있는 사할린 연안조사를 통해 현재 100여마리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귀신고래가 회유하는 울산 장생포 해역은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뻘을 삼켜 갑각류 등을 먹는 귀신고래의 ‘바다 밑 경작’은 해류에 비해 3배 가량 효율이 높다. 비옥한 바다를 만드는 농사꾼인 셈이다. 근래에 향고래 떼가 우리 해역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해양생태계가 살아있다는 바로미터다. 연안생태계가 되살아나 16m의 거대한 귀신고래가 한반도 연안에서 회유하는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가슴이 설렌다. / 임병호 논설위원

북한의 화학무기

인간이 개발한 3대 대량파괴무기(WMD)로는 핵(Atomic)무기, 생물학(Biological)무기, 화학(chemical)무기가 대표적이다. 이 3대 대량파괴무기는 영문자 이니셜을 따 ‘ABC무기’로 불린다. ABC무기 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 화학무기다. 북한은 1961년 “독가스와 세균은 전시에 효과를 발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화학무기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장비와 물자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1980년대부터는 각종 생물학 작용제를 생산 비축하면서 독자적인 화학전 공격능력을 완비하게 됐다. 현재까지 북한이 비축한 화학무기는 2천~5천t 규모로 이 양은 4만t을 보유한 러시아, 3만t을 비축해 놓은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화학무기 보유국가이다. 화학무기 1천t으로 대략 4천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데 신경가스인 ‘사린가스’의 경우 4.5㎏만 살포해도 4분만에 1천만 명 정도를 몰살시킬 수 있다. 북한은 2억 명 살상분 화학무기를 보유했는데 함경남도 함흥·흥남, 함경북도 청진·아오지, 평북 신의주, 자강도 만포, 평남 안주·순천 등 8곳의 화학무기 생산시설과 4곳의 연구시설, 170여 개의 지하 저장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북한은 다양한 화학탄 투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지상에서는 박격포, 야포, 방사포와 프로그(FROG), 스커드(SCUD), 노동1호 미사일, 해상에서는 화력지원정, 공중에서는 전투기, 폭격기, 수송기 등을 이용하여 전방은 물론 부산과 목포지역까지 동시에 화학탄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소리 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화학무기를 지구상에서 추방하기 위해 체결된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이 1997년 4월27일 국제적으로 발효됐다. 그러나 현재 북한,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는 아예 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국방대학교 정병호(丁炳浩)박사가 지난 4월28일 국방·안보 학술세미나에서 “북한은 이미 2002년초 휴전선 일대 전방부대에 화학무기 배치를 완료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의 무력이 이러한 데 주한 미군이 감축, 아니 철군해도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안보의식은 위험하다. / 임병호 논설위원

생계형 범죄

조선시대 순조 연간에 남종현(南鍾鉉·1783~1840)이란 빈한한 서당 훈장이 쓴 ‘도둑맞은 내력’이란 산문이 있다. 1794년에서 1832년까지 서울 월암동에서 38년간 살며 스무 번을 도둑맞은 이야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이 해 도둑이 앞마당에 들어와 무명 열댓 근과 햇볕에 말리려고 걸어둔 빨래 여덟~아홉 벌을 가져갔다. 그해 겨울, 추위에 떠느라 죽을뻔 했다. 을묘년(1796)에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와 요강과 책 몇권을 훔쳐 달아났다. 경오년(1810)에 도둑이 부엌에 들어와 솥 두개를 파갔는데 뒤를 밟아 보니 이웃사람이었다. 을해년(1815)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와 서적 4권과 송곳, 칼, 가죽신발 등속을 훔쳐갔다. 신사년(1821)에 도둑이 안채 동쪽방에 들어와 식기, 그릇, 의복을 훔쳐 달아났다. 이 해에 도둑이 아랫방에 들어와 흰 천을 뜯어갔다. 임오년(1822)에는 도둑이 사랑채에 들어 서적 열두 권을 훔쳐 갔는데 태반이 남에게 빌린 것이었다.” ‘치졸하고도 야박한 좀도둑’이 가난한 훈장의 세간을 야금야금 들어낸 것이다. 빨래, 서책, 요강, 솥, 톱, 송곳 등등 세간살이는 당시에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긴요한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임진년(1832)에 도둑이 바깥 문에 들어와 쇠로 만든 문고리를 떼어갔다”는 얘기도 썼다. 요즘 도둑들도 ‘금붙이’만 훔쳐가는 게 아니다. 고철 모으는 일도 바닥이 나 하루 하루 끼니 잇기조차 힘겨워 남의 집 ‘압력밥솥’등 살림도구를 훔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일하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훨씬 많은 데다 경기침체로 먹고 사는 게 힘든 가정이 많아지면서 춥고 배고프던 1960~70년대 시절의 범죄 양상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2003년도 한해 동안 도내에서 검거된 강·절도 사범이 9천900여명으로 월평균 820명이었는데 올 들어서는 월평균 980명 수준으로 늘었다. 이렇게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는데도 정부는 경제가 위기상황은 아니라고 태평스럽게 말한다. 고급관저 안에서 호의호식하니까 정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일본왕실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 왕을 ‘덴노헤이카’(天皇陛下·천황폐하)라고 한다. 그냥 황제도 아니고 하늘의 황제, 또는 하늘이 내린 황제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한 최경칭의 지칭으로 자국의 긍지를 드높이고자 하는 것이 일본인 기질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기 전에는 현신(現神), 즉 살아있는 신이라고도 했다. 신이 아니라며 ‘인간선언’을 한 것은 종전이 된 이듬해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 왕을 지금도 지극히 숭배한다. 왕실의 일거일동은 중대 뉴스다. 지난해 마사코 태자비가 황궁병원으로 해산하러 가는 길을 NHK 방송은 줄곧 현장 중계했다. 여기엔 아들 낳길 바라는 일본인의 국민적 염원이 담겼던 게 딸을 낳았다. 일본 왕실은 지금 나루히토 태자를 계승할 세손이 없어 걱정이 태산같다. 나루히토 태자는 딸만 1명이고, 태자의 동생 그러니까 현 아키히토왕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는 딸만 2명이다. 아키히토 왕은 올해 70세다. 태자는 44세다. 세손이 다급한 형편이다. 문제는 마사코 태자비 또한 40대가 되어 앞으로의 임신이 불확실한 데 있다. 일본의 황실전범은 왕(천황)의 자격을 ‘황실 태생의 남성’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만약 앞으로도 ‘황실 태생의 남성’이 나오지 않으면 나루히토 태자를 계승할 후계자가 끊길 실정이다. 이래서 얼마전에는 참의원(상원) 헌법조사회 공청회에서 황실규범을 고쳐 여성도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전통의 고수를 주장하는 보수층 반발에 묻혀 공론화 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나루히토 태자부부, 특히 마사코 태자비는 왕실 안팎에서 아들 낳길 바라는 무언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 왕실이 세손 후계자를 보게될 것인지, 아니면 부득이 여왕을 받들게 될 것인지 앞으로의 일이지만 두고 볼만 하다. /임양은 주필

나라없는 백성?

중국 산둥성(山東省)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영훈씨(41)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내 마음은 항상 당신과 아이들과 함께 있고 마음은 갇힌 자가 아니라 세상을 훨훨 날아 다니면서 나의 소망과 삶을 위해 살고 있어…” 또 이런 대목도 있다. “하루 종일 먼지 날리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당신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고생스럽지만 감옥에서 나갈 때까지 참고 견뎌주기 바래…”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말을 했다. “기쁨의 극치는 받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주는 데 있단다. 기쁨은 실제로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어서 그 기쁨을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다. “아빠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남북한 민족이 사랑하고 단합해서 통일되는 거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빠지만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단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작은 사랑 실천이야. 나머지는 전문가들이 하고 남북 정부가 해야겠지…” 중국에서 자그마한 사업을 하던 최씨는 지난해 1월 옌타이항에서 탈북자 80여명을 탈출시키려다가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1년4개월째 복역 중이다. 얼마전에 어느 신문에 보도된 그의 편지 내용이 이토록 애절하다. 신문 보도는 자신을 체포하고 기소하고 재판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직분이니까 중국 당국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그의 심경을 전했다. 지난 한해동안 중국이 탈북자들을 붙잡아 북송한 수가 8천여명에 이른다. 아직도 중국에서 숨어지내는 탈북자가 약 1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평양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두려워 북의 인권문제엔 일체 입을 다물고 있다. 중국에도 역시 정부 관계자들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들려주기 거북한 말은 아예 입을 봉하고 있다. 이 바람에 죄같지 않은 죄를 진 최씨 같은 사람들만 고생을 하고 있다. 민족사랑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해도 남의 일처럼 못본 체 한다. 그는 나라없는 백성이 아니다. 나라의 주권 체모가 참으로 말이 아니다. /임양은 주필

고통만 있고 책음은 없다

1997년 김영삼 정권 말 외환위기의 실상을 축소 보고해 환란을 초래한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된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에 대한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지었다. 1998년 검찰의 기소로 시작된 IMF사태 법정공방은 결국 이렇게 끝났다. 정책 실패가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이 본 무죄 이유다. 하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난번 탄핵소추 중 경제정책 실정 역시 소추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헌법재판소는 이 부분은 각하한 바가 있다. 환란이 가져온 것이 공적자금 투입이다. 외환위기로 기업의 연쇄부도가 급증, 금융권이 부실채권 누적으로 위기에 처한 경영난을 정상화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164조원이 투입됐다. 문제는 공적자금 회수다. 최근 감사원 감사에 의하면 회수된 건 전체 투입액의 40.4%인 66조4천억원에 불과하다. 미회수 금액 중 69조원은 회수가 불가능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떼인 공적자금이 돌려받는 공적자금보다 더 많은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공적자금의 관리책임을 맡은 정부 투자기관과 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 등의 도덕적 해이다. 방만한 자금 운용으로 무려 1조760억원의 공적자금이 낭비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회수가 불가능한 69조원 중 49조원은 25년간에 걸쳐 재정자금으로 대납하고 20조원은 금융기관이 역시 나눠 부담하기로 했다. 정부가 대납하는 49조원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된다. 정책 실패의 책임을 사법적으로 묻기로 하면 공직자가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웬지 허망하단 생각도 없지 않다. 환란으로 고통받고, 공적자금은 떼이고, 흥청망청 낭비한 돈까지 국민이 또 부담해야 할 판이니 참으로 황당하다. 이런 데도 일을 저지르고 공적자금을 주무른 사람들은 거의 다 물러가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조차 없다. ‘미안하게 됐다’는 말 한마디 들을 길이 없다. / 임양은 주필

환경호르몬

환경호르몬은 인간이 사용하는 화학물질 중에서 호르몬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물질이다. 남성의 정자수 감소 등 생식기능을 저하시키고 기형·암 등을 유발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제품에도 포함돼 있으면서 환경으로 배출돼 생태계를 교란한다. 국내 하천 생태계에서 물고기나 개구리의 암수 뒤바뀜 현상이 관찰됐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도 나쁜 영향을 준다. 비스페놀A·프탈레이트류·알킬페놀류·다이옥신·PCB(폴리염화비페닐) 등이 대표적이다. 1996년 데오 콜본 등은 ‘도둑 맞은 미래’란 책에서 화학물질, 특히 환경호르몬의 위협을 경고했다. 인간이 사용한 화학물질이 생태계를 돌아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이것이 건강에 직격탄을 날린다는 내용이다. 이미 국내 소각장 주변지역에선 주민을 대상으로 일부 혈액 조사를 한 결과 외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PCB, 브롬화 난연제(PBDE), 다이옥신 등이 검출된 바 있다. 해외에선 ‘사람의 피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는 슬로건으로 혈액조사가 심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여름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WWF)이 영국내 13개 지역에서 지원자 155명의 혈액을 채취해 유해화학물질 존재 여부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혈액은 유해물질의 칵테일’인 것으로 밝혀졌다. 많게는 한 사람의 혈액에서 조사대상 78종의 63%인 49가지 물질이 검출됐다. 미국의 질병관리센터(CDC)도 지난해 미국인의 혈액 속에 들어 있는 중금속과 유해화학물질 116개를 조사한 결과 1~5세 어린이 723명의 혈액 100㏄에 납이 평균 2.23㎏(마이크로그램 100분의1㎎)이 들어 있었다. 국내에서도 일부 연구에서 산모의 모유 속에 들어 있는 다이옥신의 농도가 일본·독일·미국 등과 비슷하거나 다소 높은 것으로 나왔다. 다이옥신은 쓰레기 소각장 등 각종 연소시설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월남전에서 사용된 고엽제의 불순물도 다이옥신이다. 환경이 아프면 사람의 몸도 아플 뿐 아니라 혈액마저 변질된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환경오염이 무서운 줄 모른다. / 임병호 논설위원

순전한 믿음

1517년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분화(分化)에 분화를 거듭해왔다. 우리나라 장로교의 경우 예수장로교로 통합과 합동 그리고 기독교장로교로 분파됐다. 예장의 분파는 무려 200여개에 이른다. 가톨릭은 교황과 사제 등 사도의 권위, 즉 조직을 중시한다. 하나의 신앙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계시 내용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권한(교도권)을 가지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게 가톨릭의 입장이다. 가톨릭에서 가장 먼저 분리된 교단이 루터교다. 루터교는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권위도 두지 않는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3원리는 루터교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장로교는 루터교와 마찬가지로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가 있지만 회중을 교회의 중심으로 삼는다. 이는 만인제사장설로 발전한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미 창세 이전에 예정돼 있다는 예정론을 신봉한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로마교황청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세속 권력의 의지에 의해 분리됐다. 교리와 제도는 가톨릭과 비슷하다. 신부의 결혼이 허용된다는 차이 정도만 있다.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분리됐지만 교리나 제도에선 별 차이가 없다. 중앙집권적 감독제나 성직자 파송제 등은 성공회와 닮았다. 다만 실천적 측면에서 감리교는 개인과 사회의 성화를 함께 강조한다. 감리교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을 강조해 신구교 교리를 잘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감리교는 성경보다는 이성, 개인보다는 사회에 비중을 두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세속화’에 반발해 나온 것이 성결교다. 성결교는 개인의 성화와 구원을 강조한다. 개신교 가운데 조직보다는 개인의 자발적 믿음을 가장 강조하는 교단이 침례교다. 오순절교회는 20세기 초 성령운동 차원에서 탄생했다. 하나님의 시대, 예수와 제자들의 시대를 거쳐 지금은 성령의 시대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다수 개신교의 경우 교단이나 교파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교단,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이것이 순전한 신앙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外國化

최근 사용하는 용어들 가운데 ‘캐시그랜트(cashgrant)’는 투자를 희망하는 기업에 터 매입 등 투자비 일부를 현금으로 지원하는 것을 뜻한다. ‘클러스터(cluster)’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 밀집해 있는 모양이다. 기업·대학·연구소 등이 기술, 인력 및 지식정보의 교류를 통한 상승효과를 얻기 위해 특정지역에 모여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임베디드(embdded)’는 무엇이 속에 고정돼 있는 뜻이다. 전자제품· 컴퓨터· 엘리베이터 처럼 어떤 소프트웨어에 의해 작동하는 자동장치는 모두 임베디드 시스템 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물이나 공기처럼 언제 어디서나 모습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시간이나 장소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컴퓨터 망에 접속할 수 있는 통신환경을 의미한다. 이런 용어들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이 요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거나 공문서를 작성하면서 쓰고 있는 외국어들이다. 사전을 뒤지거나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지 않으면 무슨 뜻인 지 쉽게 알 수 없는 용어들이다. 일례로 농림부가 최근 ‘지역농업 클러스터’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는데 정작 농협 직원조차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아예 ‘영어도시 서울’로 만들려는 지 대중교통체계를 바꾼다며 시내버스에 로마글자를 표기하고 있다. 또 거리에 ‘Hi Seoul my bus 7월1일부터 버스가 빨라 집니다’란 현수막을 내걸어 불필요한 영문혼용을 하고 있다. 시민단체인 ‘우리 말 살리는 겨레모임’이 “서울시가 지금처럼 영문표기를 계속 부추긴다면 이명박(李明博)서울시장을 올해의 ‘우리 말 으뜸 훼방꾼’으로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공감이 간다. ‘우리 말 해치는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말도 괜찮겠다. 일본은 ‘유비쿼터스’를 ‘시공자재(時空自在)’라는 용어로, 인센티브는 의욕자극제, 글로벌은 지구규모 등으로 바꿔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행정용어 뿐 아니다. 대기업들도 회사명을 거의 영어로 바꾸고 있다. 이러다간 앞으로 자녀들의 이름도 외국명으로 지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임병호 논설위원

고이즈미 일본총리

북엔 대남공작을 위해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납치해간 일본인들이 있다. 일본의 해안이나 제3국에서 북녘 사람들이 납치해 갔다. 2002년 9월 1차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고이즈미 일본총리에게 이례적으로 이같은 사실을 시인했다. 납치 일인은 13명으로 이중 8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생존해 있다며 사과까지 했다. 생존한 납치 일인들도 세월이 흘러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이 가운데 3명이 1년7개월 전 북에서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귀국했다. 당초엔 다시 돌아가기로 됐으나 일본정부는 이들을 보내지 않았으며 본인들도 머물고 싶어 했다. 문제는 북에 있는 이들의 자녀 등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이산가족의 재결합이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위해 지난 22일 평양에 가서 2차 북·일 정상회담 끝에 그날로 5명을 비행기에 태우고 돌아갔다. 남편이 월북 미군이어서 북을 떠나면 재판받을 것을 걱정해 고이즈미와 동행을 거부한 미국인 남편과 자녀들을 제외한 나머지 납치 일인 가족들이 돌아오던 날 NHK방송은 진종일 시시각각으로 생중계했다.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 내기에 바빴다. 불과 1개월여 전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일본이 3명이 납치됐을 때의 분위기와는 아주 판이하였다. 이라크에서 자위대 철군을 요구하며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 데도 일본 정부는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 국민들도 공연한 여행을 하여 나라에 부담을 끼친다며 인질들을 나무랐다. 인질들은 나중에 억류가 풀려 귀국하고서도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라크 인질과는 달리 언론의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돌아온 납치 일본인 자녀 5명은 그냥 귀국한게 아니다. 쌀 25만t과 의약품 1천만달러 상당을 북에 지원하기로 하고 데려왔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들을 데려오고도 혼났다. 평양에서 귀국한 당일 밤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돌아오지 못한 피랍자 가족들로부터 “아직도 의혹이 짙은 피랍자 10명에 대한 문제는 왜 더 따지지 못했느냐”며 호되게 몰아 붙였고 고이즈미는 입을 꾹 다문채 그같은 질책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임양은 주필

청와대 취재통제

‘청와대, 취재통제 ‘논란’ 기자협회보(제1237호) 5월19일자 1면 머리기사의 큰 제목이다. 기사 내용은 “청와대가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복귀 이후 ‘대통령의 언론노출을 줄이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내부행사에는 풀 기자의 참석을 허용하지 않기로 해 출입기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라고 돼있다. 청와대 비서실의 자유취재가 통제된 이후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보좌관회의에는 풀 기자 2~3명이 들어가 회의시작 직전 10여분동안 참모진들을 상대로 사전 취재를 해온 관행이 그나마 깨지게 된 것이다. 이에 청와대측은 브리핑을 자주 갖는 등 보완책을 세워 브리핑룸제를 활성화하는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하지만 기자들의 불만이 심상치 않다. “똑같이 듣고 똑같이 쓰면 왜 많은 언론사가 필요하겠느냐”며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기자협회보 기사는 전했다. 결국 외부 인사 등이 참가하는 행사외에는 기자의 직접 취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청와대 방침이다. 도대체 “대통령의 언론 노출을 보호한다”는 것 부터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언론 통제를 말하자면 유신정권이나 5공정권을 흔히 꼽지만 그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청와대는 걸핏하면 언론 보도를 상대로 고소·고발 민사소송을 일삼았다. 그러고도 또 무엇이 불안한 건지 도시 알 수가 없다. 잘못된 것은 언론 보도의 잘못으로 책임을 미루곤 했다. 그러고도 또 무엇이 그토록 언론이 부담스런 건지 도시 알다가도 모르겠다. 만약 전시성 행사 외에는 발표하는대로 받아 쓰라는 게 청와대 생각이면 청와대 기자실 말처럼 무엇때문에 그토록 많이 출입할 필요가 있겠는가, 언론사 팩스로 보도자료를 보내면 그만인 것이다. 말로는 개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예전 정권보다 진부한 언론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유감이다. 언론을 획일화하여 입맛대로 주문생산하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아 보인다./임양은 주필

고건(高建)

고건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지 열흘이 다 되도록 물러가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다음 총리를 지명하려면 제17대 국회 원구성이 6월2일경 가야 하는 일정상의 이유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부분 개각에 있다. 부분 개각이 또 총리 지명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열린우리당의 사정이 그러한 데 있는 것 같다. 입각파에 대한 견제와 자리 다툼이 묘한 역학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이러므로 고 총리가 열린우리당의 입각파에 대한 (대통령의) 장관(국무위원) 임명을 위한 제청권을 빨리 행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총리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관측된다. 총리는 이미 사의를 표명한 입장에서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가 있다. 고 총리는 흔히 ‘행정의 달인(達人)’이라는 말을 듣는다. 얼마전에는 행정의 시의 적정성을 강조하는 말로 “행정은 낚시의 타이밍과 같다”하여 화제를 뿌렸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원칙주의자라는 점이다. 원칙은 정수인 데 비해 변칙은 꼼수다. 대통령도 원칙이란 것을 많이 강조하지만 이런 청와대가 물러가는 총리더러 제청권을 행사해주길 바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꼼수인 변칙이다. 총리의 제청권이 비록 실권이 못되는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 하여도 그게 원칙이 아닌 것은 부인될 수가 없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를 보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렇게 본 일부 사람들의 말이지만 그런 얘기가 파다했던 것은 원칙주의에 대한 신뢰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소추를 기각하면서도 ‘헌법 준수 의무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물러가는 총리에 대한 제청권 요구는 바로 이에 위배되는 것으로도 보아진다. 고건 국무총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헌법정신의 원칙을 지킬 것인지 어쩔 것인지 그것이 주목된다./임양은 주필

사제 관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22세(1783년)때 과거에 급제하여 75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3년의 파란만장한 공적(公的) 삶을 살았다. 53년 중 20년간을 유배생활로 보냈다. 그 중 18년간을 전남 강진 한 곳에서만 지냈다. 이 유배생활 중 다산은 많은 젊은이와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었는데 황상(黃裳·1788~1863)이라는 제자와의 관계는 사제지간의 표상이었다. 강진 유배생활을 시작할 때 다산은 38세였다. 12세 황상이 다산을 찾아와 제자되기를 청했다. 매사에 자신(自信)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황상을 다산은 잘 보살펴 주었다. 황상도 시골에서 보기 드문 다산의 진면목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겼다. 12세였던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노인이 됐다. 회갑을 몇년 앞두고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강진을 떠나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왔다. 황상을 비롯한 강진의 제자들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茶)를 매년 마재로 부쳐 보내곤 하였다. 다시 18년의 세월이 흘러 황상이 48세에 이르고 다산은 74세의 노인이 됐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그리워 열흘을 걷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18년 만에 스승과 제자는 해후의 기쁨을 만끽하고 황상은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귀향 중에 다산의 부음을 듣고 길을 되돌려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0년 후 58세의 황상은 타계한 스승이 그리워 열흘 길을 걸어 다산의 생가를 다시 찾았다. 다산의 아들들은 이런 황상의 정성을 다하는 제자 모습에 감격하여 정씨(丁氏)와 황씨(黃氏), 두 가문의 계약을 맺었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갈 진저. 계(契)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삶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후세사람들은 이른바 ‘정황계안(丁黃契案)이라고 불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과 감사가 부족한 오늘날 절실하게 생각 나는 다산과 황상 간의 전설같은 일화이다. 무릇 사제지간의 관계는 이래야 한다. /임병호 논설위원

화술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는 어려서부터 말재주로 유명했다. 나이 든 두 명의 시인이 시험삼아 그를 찾아왔다. 한 사람이 홰(槐)나무에 올라가 물었다. “내가 무슨 나무 위에 있는가?” “소나무 입니다.” “왜 그런가?” “어르신께서는 나이가 많으시니 할아버지(公)입니다. 공(公)자 옆에 나무가 있으니 소나무(松)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시인이 같은 나무에 올라가 물었다. “이 나무도 소나무이니 나도 할아버지가 되겠구나?” “그 나무는 홰나무 입니다.” “왜 전과 다르게 말하느냐?” “이전과 다르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귀신(鬼)이 나무 위에 있으니 홰나무(槐)가 맞습니다.” 두 시인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자사생합(字詞省合)’, 글자를 해체하거나 조합해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책략이다. ‘부와 지위의 상징’인 더글러스는 대선에서 “저는 링컨이라는 시골뜨기에 귀족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링컨은 유세 때 이렇게 말했다. “더글러스는 체신장관, 토지장관, 내무장관 등을 역임한 큰 인물입니다. 반면에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재산이 얼마인 지 물어 봅니다. 저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밖에 없지만 그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지할 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오직 여러분들 뿐입니다.” 더글러스의 자랑은 부메랑이 되어 약자를 멸시하는 행위로 비치게 됐다. 부드러움으로 견고함을 이기는 ‘이유극강(以柔克剛)’이다. 일부러 어리석은 척 하는 ‘가치부전(假痴不顚)’, 제가 놓은 덫에 걸리게 하는 ‘청군입옹(請君入瓮)’, 괴이한 물음에는 괴이하게 대답하는 ‘괴문괴답(怪問怪答)’, 잘못한 김에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장착취착(將錯就錯)’,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하라는 ‘인인시언(因人施言)’ 등 화술은 다양하다. 상대를 이기는 데만 힘을 쏟는 변론술의 맹점은 진실의 누락이다. 세치 혀가 백만군사보다 강할 때가 있지만 능란한 화술은 약(藥)이 될 수도 있고, 독(毒)이 될 수도 있다. 정치판 달변가들이 쏟아내는 ‘말’이 불안할 때가 많다. /임병호 논설위원

언론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최소한의 뉴스와 최대한의 정치’를 제공하던 ‘정치적 신문’들은 남북전쟁 내내 연방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남북전쟁에 반대하고 노예제도 폐지령을 격렬하게 비난하던 언론과, 노예제도 폐지에는 찬성하지만 그 범위와 방법, 시기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전쟁 찬성 언론들이 대통령 링컨을 괴롭혔다. 그러나 링컨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남북전쟁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어려운 균형잡기’에 노력했다. 정치가로서 링컨은 타고난 연설가였다. 농민과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어투로 대중에게 호소력있게 다가섰다. 하지만 대규모 청중을 모으기 위해서는 연설을 보도해 줄 매스컴을 이용해야 한다는 현실에 적응했다. 링컨은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반대하던 기자들과 편집자들을 친구나 동료로 만들었다. 1860년 2월 뉴욕의 쿠퍼유니언에서 ‘노예제도’폐지 연설을 끝내자 마자 그는 ‘뉴욕 트리뷴’지의 조판실을 찾아가 자신의 연설문이 제대로 실렸는 지 교정쇄를 직접 확인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링컨은 자신의 신임을 얻은 기자들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다. 때때로 기자들은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내용을 써놓은 쪽지를 보냈다. 링컨은 만약 질문이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면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주제가 자신의 주된 관심사라면 그 기자를 집무실로 불러 들이거나, 기자 대기실로 직접 가서 세부질문에 대답했다.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공화당을 지지하는 ‘뉴욕 트리뷴’과 민주당 쪽 ‘뉴욕 헤럴드’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것은 가장 힘든 일이었다. 윌리엄 셔먼 장군은 비판기사를 써대는 ‘뉴욕 헤럴드’에 대해 “대통령이 ‘뉴욕 헤럴드’를 통치하지 않으면 ‘뉴욕 헤럴드’가 대통령을 통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방제 수호’에 정치적 생명을 걸었던 링컨은 반대세력이 주장하는 것을 알기 위해 ‘뉴욕 헤럴드’를 즐겨 읽었다. 링컨을 존경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고해야 할 ‘링컨의 언론관’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민노당의 북한 '논쟁'

“이제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며 정확한 실체를 모른 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민에게 민주노동당과 (북의) 조선노동당이 상관이 없다고 설명할 때 곤혹스러웠다. 민노당이 남한은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에는 왜 관대한가 라는 국민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 “민족의 최고 가치가 통일이라면 그런 관점에서 북을 통일의 상대방으로 보고 대응해야 한다. 조선노동당을 잘 모르기 때문에 조급하게 굴지말고 교류 속에서 북을 더 알아야 한다” “권영길 대표도 북한문제만 나오면 북한을 잘 모른다고 하는데, 국민은 꽃제비나 탈북자 등 북한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이 과거에는 보수언론의 장난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조작할 수가 없다. 북한 인권과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극우세력들에게 맡겨놓고 우리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북한 체제에 대해 우리가 언급하고 비판해야 당에 대한 국민적 설득력이 높아진다” “간단하게 답하기가 어렵다. 나중에 (더) 토론해 보자” 핵 문제에 대해 “북한도 미국도 문제라는 양비론은 어쩔 수 없다고 보지만 북한이 핵 문제를 통해 경제문제를 풀려고 했다면 왜 오랫동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북핵 문제라는 말 자체가 본질을 흐린다. 나는 모든 핵에 대해 반대하지만 북핵 문제는 미국에 의한 북의 포위 고립으로 쟁점화 된 것이다” 이상은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경선에서 주대환·이용대 두 후보가 가진 토론 중 일부의 보도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주 후보의 평등과 민주주의 시각의 좌파와 이 후보의 반미 자주통일 노선 좌파간의 견해 차이다.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이런 북한 논쟁이 거론된 것은 무척 신선하다. 이달 말 당원 투표로 뽑는 정책위원장 직선 결과가 주목된다. /임양은 주필

비서실과 내각

조선조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은 의정부와 육조 등 조정에서 논하는 대소 정치사에 초연했다. 이를 테면 측근정치의 배제였다. 승정원엔 도승지를 최고 책임자로 하여 좌승지와 우승지가 있었고 좌부승지·우부승지 밑에 동(同)부승지를 두었다.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왕과의 독대가 금기시된 게 원칙이었으나 승정원 승지들은 왕명을 지근에서 받들면서도 다만 임금의 그림자일 뿐 소리 소문없이 숨을 죽였다. 왕을 빙자한 호가호위의 권좌로 비칠 수 있음을 스스로가 애써 근신한 것이다. 문재인 ‘왕수석’이 청와대 비서실에 복귀하였다고 야단 들이다. 비서실 직제가 개편됐다는 뉴스가 또 요란하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은 어디까지나 비서실일 뿐이다. 대통령 측근인 누가 무슨 자리로 비서실에 들어왔건 말건 민중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비서실 구조가 2실·6수석·5보좌관·48개 비서관인 가운데 그중엔 ‘리더십 비서관’이란 직함이 생긴것 같다. 일반 부처는 기구 하나 바꾸려면 이리 저리 걸리는게 많아 협의 절차가 꽤나 복잡하다. 비서실 기구 개편을 떡 주무르듯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청와대이기 때문인 지는 몰라도 민중은 이 역시 별관심이 없다. 다만 의문스런 것은 항상 비서설 규모를 줄인다면서도 어떻게 된 건지 줄인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21세기 첨단시대의 대통령 비시설을 케케묵은 왕조시대의 승정원과는 비할바가 못된다. 비서실 기구를 어떻게 두든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국정의 중심은 비서실(승정원)이 아니고 내각(조정)이다. 이것이 바로 선 나라의 면모다. 자고로 환관(황제의 내시비서)의 목소리가 커서 잘 된 나라는 없다. 측근정치, 비서국정의 폐악은 지금도 경계의 대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년차 국정운영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국정의 무게를 내각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임양은 주필

孫 지사의 연극출연

“너희(당신)들은 다만 운명적으로 선택받았을 뿐이다. 시청자들 가운데는 선택받은 너희(당신)들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지대子는 방송담당 일선기자 시절에 신인 탤런트들에게 연기자가 가질 수 있는 교만을 늘 이렇게 일깨워 들려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기에 소질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에 일반인의 아마추어 재연 연기가 프로페셔널 뺨치게 잘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게 그같은 예다. 연기의 요체는 연기자가 작중 인물에 용해되어 몰입하는 데 있다. 연기를 하면서 자신이 연기를 한다는 이중 개체 의식을 가져서는 연기가 잘 될 수 없다. 작중 인물과 얼마나 일체가 되느냐가 항상 중요하다.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어려운 것은 대사 발성의 극적 조화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NG가 용납되지 않는 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연기자가 잘못하면 다시 되풀이할 수가 있으나 연극무대에서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관객이 보아주질 않기 때문이다. 또 연극무대의 연기는 특히 드라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장중하다. 모든 배역이 혼신의 열정을 내뿜어야 한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경기도립극단 제47회 정기공연 출연이 화제가 됐다. 연극 ‘카메오’에서 검찰관의 하인역은 비교적 단역이긴 하다. 그러나 무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연극에서는 아무리 단역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연극의 특성이다. 상대 배역과 호흡을 잘 맞춰야 연극의 전반적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난다. 손 지사의 아마추어 연기가 프로페셔널의 관점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 지가 궁금하다. 경기도립극단의 깜짝 출연은 지방 연극문화의 관심을 그렇게라도 해서 지역사회에 제고한 점은 인정할만 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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