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왔던 서름 가득히 들고 갔다가 네 앞에 서면 비워진다 하얗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하얗게 비워진다 늘 그랬다 너와의 만남도, 헤어짐도 무시로 찾아 드는 딜레마일 뿐 변하는 건 없었다, 변함이 있다면 네게서 떨어져 나온 형체 잃은 조가비의 생애와 흩어지는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 모래알의 무표정을, 내가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너의 거대한 울부짖음에 비한다면 내 서러움은 단지 수평선 너머로 곧 사라질 안개일 뿐이나, 너와 헤어져 돌아온 내일이면 나는 또 내가 있는 공간에서 아프고 서러움 쌓아 질 때면 또 다시 목 놓아 부서지는 너를 찾게 될 것이다 <시인 약력> 서울 출생 / ‘문학시대’로 등단 / 창시문학회 회원
시간이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출렁 출렁 강을 건너간다. 거미줄 같은 그리움 뭉쳐두고 썰물처럼 시간은 이슬을 만들며 새벽을 연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던 시간들이 높은 산을 이루었다. 12월이다. 꿈을 잡으려다 놓쳐버린 날도 있지만 그러나 지나가는 날짜들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바라본 적도 있었다. 이미 떠나갔지만 지금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찾아본다. 아직 늦지 않은 12월이다. 홍 명 희 <시인 약력> 경북 상주 출신 / ‘문학시대’로 등단 / 시문회·경기시인협회 회원
겨울나무는 언제부터인가 군살을 빼고 뼈대로만 남아 우드득 소리를 냈다. 관절들을 하얗게 드러내고 겨울나무는 곧잘 너털웃음 소리를 냈다. 안으로 파고드는 한기에도 늑골 사이로 빠져나오는 온기를 감싸며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는 겨울나무 흰 뼈대들을 바라보며, 한 그루 겨울나무로 다가섰다. 겨울나무를 닮은 노인들이 납작 엎드린 가랑잎새를 밟고 그들의 융성하던 날을 말할 때도 겨울나무는 웃음소리를 냈다. 얼어붙는 손으로 차디찬 허공을 움켜쥔 채 온몸을 뒤척이는 겨울나무에서 아버지 헛기침 소리를 듣고 아버지 연세보다 많을 겨울나무 허리 굽은 근골에 손을 얹자 나무의 혈맥들이 내 심장으로 뛰어왔다. <시인 약력> 경기 안성 출생(1945년) / ‘문예비전’으로 등단 / 시집 ‘바람은 능선 위 구름을 쓸고’ / 문비문학동인회 회장 / 현재 성남 늘푸른중학교 교장
길고 부드러웠다 따뜻하기도 했지 사열한 유리진열장을 빠져나와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가락에서는 깊은 사유의 푸른 잉크 냄새가 났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그림 속에서 그가 그리다 만 장닭이 갑자기 일어나 꼬끼오 훼를 치는 바람에 뒤돌아보니 그가 빙긋이 웃으며 떨리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할 말이 있소 삶이 그대를 속인 적이 있던가요 그래도 노여워할 일이 아니라오 그대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소.” 그때 안경을 썼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검은 색 모자였지 아마 조용히 벗은 모자를 내게 씌워주고는 말없이 시대를 걸어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시인 약력> ‘문학예술’로 등단 / 시집 ‘그리움을 끌고 가는 수레’, 수필집 ‘로시난테의 오막살이’ 등 다수 / 드로잉 ‘새로운 바람전’, 도 판화 개인전 ‘흙, 바람을 채집하다’ 등 개최 / 한국시인협회·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바람이 산을 흔들고 낙엽 쌓여 인적 뜸한 날 찬바람 등에 지고 찾아간 무덤에서 “어서 오게나”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두번 반 절하고 무덤 한 바퀴 돌아 막걸리 한 사발 올리니 천천히 마시며 여전히 세상 풍자로 내 맘 열어 주셨다. 하직 인사 드리고 산을 내려오며 몇번을 뒤돌아 봐도 “껄 껄 걸” 웃음소리만 보일 뿐 선생의 모습 안 계셨다. 오던 길 되돌아가는 발걸음 가볍지 않았다. 바람에 떠밀리는 구름처럼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서 선생의 영혼은 전설처럼 쉬고 계셨다. 터진 물길 따라 내려가면 더 깊은 길, 보일까 <시인 약력> 경기 의왕 출생 / ‘문학시대’로 등단 / 저서 ‘섬강을 지나며’ / 시문회·경기시인협회 회원
억새들 소리 내어 울었다 미친바람이 싣고 온 허무맹랑한 야욕의 뿌리 뽑히지 않으려고 일어서 손을 잡고 운다 섬 기슭 깊숙이 발목 묶어 놓고 어미의 젖줄에 흐르는 참 사랑 지키기 위해 억새들이 운다 이쪽, 저쪽 소리 내어 울었다 저 혼자 피고 지는 비비추의 자줏빛 꽃 무리 침략의 발자국에 밟힌 어머니의 영혼처럼 안고 자존의 문 열고, 문 닫으며 동해를 지키는 억새가 운다 날 세워 기어오르는 저 질긴 바람의 허욕 부딪쳐 밀어내며 억새가 운다 손을 잡고 운다 <시인 약력> 충북 청주 출생 / ‘월간문학’(수필), ‘시문학’(시)으로 등단 / 저서 ‘사과나무’ 외 다수 / 한국여성문학인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이사, 경기시인협회 회원
새벽 녘 갈증처럼 와 안기던 새초롬한 그믐 달 안동 땅 월영교에 서니 만월로 뜬다. 어느 남정네*의 무덤에서 여인의 ‘머리카락미투리’가 나왔다지. 그 이야기가 다리에 붙어 다녀 사람들을 부른다지. 올올이 탐스런 여인의 머릿결이 이루어지는 사랑노래로 분수처럼 흩어진다지. 탈골된 남편 곁에서 흙을 데우던 따스한 기운 400년 후 서슬 퍼렇게 살아나 낙동강 가로지르는 교각 떠받친다. 이쪽과 저쪽 이어주는 기개로 달을 밀어 올린다.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 행여 못 미칠세라 마음의 머릿결 뽑아 미투리를 삼는다. 촘촘하게 직조하여 그리는 이 댓돌 위에 살포시 놓아본다. 달빛은 가슴에 차고 발아래 강물 흐르는데 월영교 위 누각에는 고이느니 바람소리 뿐 그 신발 / 신고 오실 이 저 너머 / 햇살이어라. *이응태 <시인 약력> 충남 신도안 출생 / ‘월간문학’으로 등단 / 제1회 한하운문학상 수필 대상 / 국제펜클럽·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시집 ‘눈뜨고 꿈을 꾸다’ 등 다수
품에 안은 것들 위로 던지고 아래로 받는다 너무 높지는 않게 품 안에 받을 수 있을 만큼 부르르 전신으로 떨며 추스른다 가벼운 것은 털어내고 티끌은 날려 보낸다 반짝이는 낟알 반짝이는 꽃, 반짝이는 별 알맹이로 남아 빛나는 저녁 해거름 강물에 나아가 물방울로 뒤채이며 단단하게 마른 슬픔의 껍질 벗겨 내듯 찌뿌드드한 미련 따위를 까부른다 내 안에서 너는 온전한 낟알 그리운 알맹이로 남기를 까불러진 낟알들 항아리에 담긴다 그래도 남은 검부러기 반편들 몇 섞여 있다 <시인 약력> 강원 횡성 출생 / ‘문학시대’로 등단 / 창시문학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現 용인 구성중학교 교사
바람이 분다 두고 온 고향 서러워해야겠다 바람이 분다 세월의 강을 건너며 훠어이 훠어이 살아온 계절 쑥대머리 진양조가락 고개를 넘으면 허기진 숲에 불어오던 바람 순수로 피던 하얀 박꽃 바람이 분다 두고 온 고향 그리워해야겠다 바람에 기대어. <시인 약력> 전북 진안 출생 / 한국문인협회·한국현대시인협회·경기문학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제5회 팔달문학상 수상 / 시집 ‘아버지의 바다’ /현재 오산시청 기획감사실 근무
재생되지 않는군요 스물아홉 쯤에 잃어버려 이제라도 찾아보려 하니 허술하게 보관된 흑백필름처럼 곳곳이 끊겨 애를 먹이는군요 더러는 금세 지나간 일인양 선명해도 깊숙이 감춰둔 비밀처럼 우리로 지냈던 시간들은 어디쯤에 잘 묻혀있겠지요 멀어져서 잊혀져서 슬픔이 되는 지난 날들을 추억이라 말해야 편해질까요 미움보다 아픔보다 더 지금까지 나를 견뎌온 힘은 그립습니다 <시인 약력> 충남 아산 출생 / ‘문학시대’로 등단 / 동남문학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시집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대를 두고도’ 간행
높이 뜨거라, 또 한번의 태양으로 -국립경찰 60년에 부쳐 전갑성 뚜득, 뚝 세상이 금가는 소리를 내고 겨레가 헉헉 숨을 몰아 쉴 때 정의를 어깨에 메고 어둔 길 걸었다 허기진 반세기 국민들 눈총에 따갑게 명중이다 구멍난 상처 인권으로 아물리며 핏물 흥건한 자리 쓸고 닦아 대한의 울타리 다시 일으켜 세웠다 신뢰와 사랑은 하늘과 산이 되고 / 꿈은 바다로 출렁거린다 삼천리 꽃동산에 가득한 향기 의연한 자태로 피어난 경찰 60년 황금빛 장년이여 못다 푼 실타래 술술 풀으며 올곧은 길 따라 힘차게 뛰어라 높이 뜨거라, 또 한번 겨레의 태양으로 사천오백만 가슴에 영원한 등불되리 <시인 약력> 경기 화성 출생 / ‘문학세계’로 등단 / 시집 ‘잠시 그대를 내려 놓았습니다’ / 한국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현재 경기지방경찰청 교통계장
바닷바람은 모두들 키를 낮추라 한다 달맞이꽃 땅에 엎드린 채 샛노란 눈 또랑거린다 발그레한 얼굴 내밀고서 모래찜질을 하듯 아예 몸을 숨긴 메꽃 발에 차인다 어디 너희들뿐이랴 빌딩 숲 햇귀 찾아 방 한 칸에서 첫아이 낳고 방 두 칸에서 둘째아이 낳아 눈 딱 감고 숨죽이며 살았다 이제 허릴 펼까 한다만 세상은 온통 회오리바람 속 우장 쓴 언덕 삐비꽃이 비상을 한다 멸치 떼가 솟아오르듯 은빛 꿈 날개 털며 하늘로 솟구친다 <시인 약력> 전북 부안 출생 / 한국시인협회·국제펜클럽 한국본부·민족문학작가회·한국문인협회(고양·부안문인협회) 회원 / 서울시인상 수상 / 시집 ‘여자가 씨를 뿌린다’ ‘삐비꽃이 비상한다’ 등 다수
모래로 된 섬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지, 그것도 썰물 때만 드러난다는 허연 가슴팍 문득 내 늑골 아래 사륵사륵 모래 밀려와 砂丘를 이루려는 지 뻐근해, 바람 같은 약속의 나무를 심지마 눈 들면 갈매기가 날아갈 뿐 하늘에 구름이 떠있을 뿐 일생 수평선 한 번 차고앉을 수 없는 그 슬픈 섬에 또 그렁그렁 밀물들잖아, 궁평리 가는 길 <시인 약력> 경북 포항 출생 / ‘문학과 세상’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 경기시인협회 회원
Ⅰ 눈을 감으면 풀내음이 코끝에 스민다 손을 뻗으면 아픈 배를 쓸어주시던 거친 손이 잡힌다 낡은 옷 입고 호미질 하시던 백발이 눈에 선하다 병약한 마지막 아들을 안타까이 바라보시던 애틋한 사랑의 눈빛 아,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회한의 그리움으로 내 가슴 속에 다가온다 Ⅱ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습니다 드리고 싶은데 드릴 수 없습니다 가신 줄 알았는데 가시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시인 약력> 강화 출생 / 동남문학회 회원
내 그대에게 푸른 별이 되고자 깜깜한 밤하늘 은하수 등지고 새벽 외로이 반짝인다 그대 나에게 가슴 타는 꽃이 되라고 새벽 이슬 열린 잎 적신다 사랑이여 푸른 별 타는 꽃으로 홀로 외로워 말자 여름밤 허전해 별은 이슬로 내리고 꽃은 밤하늘 은하수 탄다 내 그대에게 반짝이는 별 하나 되고자 그대 나에게 뜨거운 꽃이 되라고 밤은 더욱 깊게 어둠에 잠기고 바람도 이슬 젖은 먼길 떠난다 <시인 약력> 경북 안동 출생 / 한국문인협회·과천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저서 ‘기억 속에 숨 쉬는 풍광 그리고 그리움’ ‘손이 차가워지면 세상이 쓸쓸해진다’ / 현재 ㈜대길 근무
달은 바위에 입 봉한 새색시보다 더 고요히 앉아 둥긋이 말이 없다. 산비둘기 콩새도 달빛 속에 잠이 들었다. 맨살이 빚어낸 화사한 배꽃. 수줍은 신부처럼 처음사랑을 알아버렸네. 당신의 영토에 당신의 손과 발로 차 오르는 영혼 가둘수록 환한 그곳. 갈대 속으로 스며 조용히 울고 있을 죄 많은 나를 가두소서. <시인 약력> 서울 출생 / 시집 <원추리>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 한국문인협회·수원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오랫동안 가슴에 흰 꽃을 달고 달려오는 사내에게 징한 정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예요. 몸 속으로 박히던 그의 흔적들 어느 날 사내는 바람과 어여쁜 물새들과 끼룩이며 먼 바다로 나갔어요. 사내는 수평선 너머에서 가슴을 내밀고 흰 웃음을 흘리고 다녀요. 절벽에서 꽃은 혼자 피고 지고 사내가 숭숭 뚫어 놓고 간 바위구멍으로 교암 바다 그 징한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어요. <시인 약력> 본명 김영자 / 평택 출생 / ‘문학공간’으로 등단 / 저서 ‘아름다움과 화해를 하다’ ‘문은 조금 열려 있다’ 외 / 한국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석천리 임 애 월 1 절반쯤 버리고 나니 바다가 보였다 남양만 밀물이 가슴 속으로 흘러왔다 2 스무 살 된 내 딸 아이의 자랑거리는 별꽃 무장 피어난 석천리 밤하늘이다 밤새도록 여름을 부르는 무논의 개구리소리이다 들녘에 가득 고인 바람의 그림자이다 3 손바닥만한 텃밭에 고추 심고 / 토마토 심고 상추도 심었다 절반은 달팽이가 먹고 나머지는 내가 먹고 풀만 먹고 풀밭에서 구린내 나는 욕심 버리고 살다 보니 뱃속도 맑아졌는가 요즘은 방귀를 뀌어도 들풀냄새가 난다 <시인 약력> 제주도 애월(涯月) 출생 / ‘아동문예’(동시), ‘문학과 세상’(시)으로 등단 / 한국아동문학인협회·한국문인협회·경기시인협회 회원
이제는 익숙해졌을거라 생각했다 안개 속에서도 그대를 향해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거라 믿었다 알아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대도 역시 그러리라 믿었다 그러나 나를 스쳐 다른 길로 가는 그대의 손을 잡으려다 헛손짓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안개 속을 걸어 온 그대와 나는 안개로 흩어진다 익숙해진 것은 안개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손 내밀면 사라지는 그대 앞에서도 웃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막막함을 견디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 약력> 용인 출생 / <창조문학>으로 등단 / 저서 <내게 꽃이 되라 하지만> / 동남문학회· 경기시인협회 회원
권선고등학교 인근 문화센타 노부부들의 댄스 강좌가 한창이다 꽃대 같은 여강사의 몸놀림 하나 둘 셋 넷 보~옴 여름 가을 겨울 보~옴 여름 가을 겨울 구령과 박자에 맞추어 노부부들의 워킹이 계속되고 있다 저들은 얼마만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문처럼 외우고 살아 왔을까 교문을 빠져나온 학생들의 소란거림이 문화센타 댄스교실로 스며들고 있다 느리게 움직이던 율동이 갑자기 살사댄스 음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서로가 손을 맞잡고 빙빙 돌다가 손바닥을 마주 대며 밀어낸다 때로는 혼자서 돌다가 격렬하게 몸을 흔든다 삐끗, 가끔은 엇박자에 휘청거리지만 파트너는 양손을 내밀어 다시 잡아 준다 나는 천천히 춤판 속으로 걸어간다 창가에 놓여진 늙고 허리 굽은 소나무 분재 봄볕 속에서 푸른 속살을 촘촘히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시인 약력> 경기 화성 출생 / <세기문학>으로 등단 / 경기도공무원문학회·경기시인협회 회원 / 현재 경기도 제2청사 감사담당사무관